2006년 6월 22일 목요일

위로가 없는 교회

내 곁에 있는 누가 아파하거나 슬퍼하거나 어려워할때

혹 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앞서
진심으로  위로하는 마음이 있기를 정말 바란다.

위로하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이
그 사람을 돕는건 허울뿐인  위선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기뻐할때,
즐거워할때,
축하할 일이 있을때,

같이 기뻐하는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어렵고 그늘지고 고통스러운 마음곁에 함께 아파하며 위로하며 서있을 수  있다는건
사랑이 없이는 할수없고 스스로의 의를 내세우며 몇번은 한다해도 사랑이 없이는 곧 흐지부지 되고 만다.


흔 히들 아주 쉽게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행복속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테두리에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렇게 쉽고 간편한게 사랑의 테두리는 아니다.



고통을 넘어 죽음이라는 최대의 희생으로 증명하신 예수님의  일생은
무엇이 사랑인지 정확히 말해준다.


항상 교회에서 즐거운가?
항상 교회에서 기쁨이 넘치는가?
만 약 그 교회안의 눈에 띄지 않는 누군가가 당신이 기뻐할때에 혼자 아파하고 절망하며 힘들어 한다면..



그  교회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99명의 기쁨과 풍족함을 누리는 형제자매들 속에서 같이 기쁨을  누리는것보다...
1명의 어렵고 힘든 형제 자매를 찾아 헤매는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  형제를 짓누르는 고난과 고통속에 뛰어들어가 함께 슬픔을 나누며 다시오실 주님을 바라본다면..


절망스런  고난속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있는 위로와 안위의 아름다운 말들이 서로에게 힘이 된다면...


깊은 탄식과 함께 두  무릎을 꿇고 그 아파하는 형제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권능의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면..

그 기쁨은  분명히 99명과의 즐거운 파티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다를것이다.


그제서야 ...
진짜배기 사랑의 띠가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며
부족한 빵을 나누는 우리의 손을 주님은 축복하실 것이다.


난 이런게 목마르다.

용어의 혼란에서 시작되어

참 많은 곳에서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이런저런 글들과  설교들을 들을 기회가 많습니다. 교리의 차이가 보이는 곳에서는 교리적인  내용을 이야기 할때 등장하는 신학 용어도 많이 들을 수 있구요..타 종교에 대해 변증론적인 접근을 할 때에도 물론 많은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항상 문제는 기본적인 용어에 대한 정의들이 모두 다르게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구원'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어떤 이들은 '혼의 구원' 을 제일 먼저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반면에또 어떤 이들은  '어려움에서 벗어나는것' 을 제일 먼저 마음속으로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터넷이나 주위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글들을 읽게되면..그 혼란이 더욱더 커지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등의 부작용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수 학에서 '공리'를 바탕으로 '정의'를 약속하면서 동일한 기반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듯 신앙의 글들도 그렇게 될수만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어찌보면 그래서 더욱 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이 정의하고 또 설명하고 있는 그 단어의  의미들이야 말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기초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불완전함은 이런 것에도  드러납니다.
도무지 성경이 정의하거나 설명하고 있는 뜻을 사람마다 동일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배경과 그  당시의 상황등을 고려하여 조금은 더욱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해석' 을 하기 시작하면서 동일한 문장에서조차 그 이해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누구는 이것이 그 단어에 대한 성경의 '정의'라고 인정하지만 누구는 그것이 '정의' 라는 의견에 반대하게  됩니다.
무려 4000~5000 년 이상의 세월동안 한치의 틀어짐도 없이 보존되어 내려온 성경의 내용은 상식을 지닌 보통의  사람 들이 읽었을때 이해가 되는 부분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과 전혀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로 (사람마다 달리) 나뉘어  집니다.
어떤 사람도 성경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런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일치점을 찾기위해 동일하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동일한 부분들에 대해 '신앙고백서' 라는걸 만들었고저마다 그런  '신앙고백' 을 하면서 그걸 기준으로 '교파' 들이 나뉘어 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제 이해가 짧을수도 있습니다.)
어 찌보면 부족한 인간이기에 나뉘어 질수밖에 없는 존재같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쉽게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한국에서 소위 틀릴리가 없고 안전하다는 장로교에 다니면서 장로교의 '신앙고백서'를 읽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일반 성도님들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한 문제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교파' 가 나뉘어 질수 밖에 없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도대체 틀린게 뭐냐고 크게 외치면서도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의 '신앙고백서'는 읽지도 않고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꼼꼼히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금계산서나 영수증이나 각종 고지서를 꼼꼼이 확인하듯 그렇게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확인할수 있는건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지에 더이상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도, 또 그럴 필요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공통된 것 하나는 분명히 발견됩니다.
자신의  판단과 생각과 경험과 논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결정짓는데 최우선시 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령님이 항상 충만한  상태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혼돈의 상태에 놓여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과연 누가 이러한 혼란뒤에서  미소짓고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 같습니다.

논쟁을 한다는것은 자신이 믿는것이 무엇인지를 그나마 어느정도 알고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세워주며 동일한 믿음안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할 크리스천끼리저마다 마음속에 다른  '정의' 를 지닌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여 언급하며 무섭게 치고 받는 피투성이 논쟁들이 오늘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불신자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직 주님을 드러내는 논쟁을 몇년간이나 열정적으로 했었던 사도 바울의 논쟁처럼, 저마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확인하며, 이 불신의 세대에 오직 주님이 드러나는 논쟁이 곳곳에서 보여지길 간절히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