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9일 목요일

스테레오 타입

아래는  "스테레오 타입"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한 야후 사이트의 내용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한번 읽어보시면 아마 저처럼  여러가지 생각이 들것 같습니다.



고정적·선입견적인 사회적 관념. <판에 박힌 형(型)>이라고 번역된다.

W. 리프먼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 《여론(1922)》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이래, 사회심리학뿐만 아니라 널리 사회과학상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그는 이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 개의 경우,  우리는 먼저 보고 나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정의를 내리고 나서 본다. 외계(外界)의 어떤 방도도 없고 떠들썩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문화가 이미 정의를 내린 것을 선택하고 문화가 유형화한 그대로 그 선택된 것을 지각하게 된다>.

이와 같이  스테레오타입이란, 특정한 문화에  의하여 미리 유형화되고 사회적으로도 공유(共有)된 고정적인 관념 내지 이미지를 말한다.
그 특징으로는
① 너무  단순화되어 있다는 점
② 불확실한  정보나 지식에 기초해서 과장되고, 종종 왜곡되게 일반화 내지 범주화했다는 점
③  호오(好惡)·선악(善惡)·정사(正邪)·우열(優劣) 등 강력한  감정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
④ 새로운 증거나 경험과 마주쳐도 쉽게 변용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이 왜 스테레오타입을 고집하는가에  관하여 리프먼은 2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인간의 환경적응에서 스테레오타입의 경제성 때문인데, 스테레오타입에 의하지  않고 일상생활의 모든  사물을 새로 상세하게 지각하려고 하면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잇따라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또  하나는 스테레오타입의  체계는 아이덴티티(동일성)의 핵심이며 자아방위(自我防衛)의 메커니즘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벽한 세계상은  아니지만, <세계에 관한  질서이든, 많든 적든 시종일관된 화상(畵像)>이며 인간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 정상적인 것, 의지할 바가 되는 것의  매력>을 가지며,  <일단 익숙해지면 늘 신던 신발처럼 마음에 쏙 드는> 것이다.

그 결과 스테레오타입을 동요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존재기반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이 되며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된다. 스테레오타입이 단순히 엉클어지고 기준치가 없는 현실을 대신하는 질서의 대용품이라  하더라도, 현실로 가는 첩경도 없고 가치규범이나 도덕이 담긴 신념체계인 한, 스테레오타입의 체계는 사회전통의 유효한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사람들이 지배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수용하지 않고 거부한다면 반도덕적·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을 그들에게 찍고 비난과  공격을 퍼부으며 제재를 가해도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런 정통성 때문에 사람들은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규범적인 순종과 동조를 보인다.

현대사회에서는 매스컴이  스테레오타입의 배양기 및 증폭기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
생각을  정리하는 것인가 봅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이후, 지금까지의 수많은 생각들을 다 정리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차 곡차곡 정리하고, 조리있게 풀어나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아마 크리스천이라면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질 문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여러가지 상황들에 답답한 마음들이 가득할때...
당장 해결하고픈 기분...  목소리를 내어  크게 외치고 싶은 마음들...

어렵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후에 차곡차곡 그 생각들을 정리하자면..
이미  그때에도 그러한 생각들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게 되겠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앞에 비춰볼 때의 그 초라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겠습니다.

말씀속에서 정리되어지는 생각들만 적을수 있다면,
아마 저에게도 또 누군가에게도 반드시  도움이 되겠지요.

앞으로는 그런 글들이 많이 써지면 좋겠습니다.

2010년 4월 21일 수요일

작은 돌

그 집은 건축할 때에 돌을 거기로  가져가기 전에 미리 예비하여 건축하였으므로
그것을 건축하는 동안에 집안에서는 쇠망치나 도끼나 어떤 쇠 연장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더라.(열왕기상 6 : 7 )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베드로전서 2:5)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 미리 예비된 돌입니다.
또 한 교회의 모퉁이 돌되신 예수님위에 세워지는 영적인 집, 곧 교회를 이루는 살아 있는 돌입니다.

솔로몬이 처음 성전을  지을때 어떤 쇠 연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오직 거듭남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 우리를 그 누구도 다시 다듬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를 이루며 올바르게 자라야 할 존재일뿐입니다.

다만 주님의 도움을 받아  세상속에서 새로운 존재로서,
빛으로 소금으로,
또한 주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증인의 삶을  살기위해서
그렇게 끊임없이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는 일만 남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살아있는 돌로,
그 중에 작은 돌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곳 블로그의 이름이  작은 돌입니다.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가인의 노력과 수고

오래전  아내와 나누었던  내용과 또 김문수 형제님의 예전 글도 참고했습니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이브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이브가 또  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지키는 자였으나 가인은 땅을 가는  자였더라.
시간이 흐른  뒤에 가인은 땅의 열매 중에서 헌물을 가져와 {주}께 드렸고
아벨도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 중에서 가져왔는데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므로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빛이 변하니라. (창세기  4장 1-5절)

제 집앞에는 정말 손바닥만한 정원(?)이 하나 있습니다.
울타리가 높이  둘려있고 꽃들이 피어있는 아담한 그런 정원이 아니라,
발목 높이만한 쇠 울타리가 둘려져있고 길가에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볼수 있는 한 2평정도 되는 조그마한 풀밭입니다.

그런데 이 풀밭에서 올라오는 잡초는 정말 여름 기간 동안 저를  무척이나 힘들게 할때가 많습니다.
깍아도 깍아도 순식간에 자라버리는 잡초는 뿌리째 없애도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매 번  뿌리까지 없애는 것도 소용이 없어서 이제는 풀깍는 기계까지 동원해서 잔디와 함께 바짝 깍아버리지만
한 2주 정도만 지나면 또  수북해집니다.

처음에는 풀깍는 기계가 없어 일일이 손으로 깍고 뽑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손으로 2평도  안되는 풀밭을 깍는데 잡초를 뽑아가며 하자니 얼마나 시간이 걸리던지요..
불과 2평도 안되는 풀밭이 이러한데, 제대로 농사를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 농사를 지어본 일은 없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인은 땅을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었던 것이지요.
땅의 열매를 얻기위해 도대체 가인은 얼마나 노력을 해야만  했겠습니까?

그 당시에 기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미 아버지인 아담으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아 계속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니(창 3:18)
지금처럼 농약도 없던 시절에 얼마나 그 노동이 힘들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열심히..
땅이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드디어 열매를 얻은 뒤의 가인의 표정은 아마 함박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이브,
그리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아마 가장 좋게 열린 탐스런 열매들을 고르고 골라서
정말  기쁘고 스스로에게도 자랑스런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지요.

그런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함박웃음과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가인의 얼굴빛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열매는  둘째치고서라도, 땅위에서 그렇게 수고했던 그 긴 시간의 노력과 수고를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또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요.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의 심정은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이겠지요.

그 서운함과 서러움, 원통함과  미움이 쌓인 가인에게 사탄이 찾아갔을 겁니다.
아니 가인이 스스로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사탄 앞에서 그동안의 모든  것을 털어 놓았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사탄은 축 처진 어깨를 토닥여 주며 거짓된 위로로 그 마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그렇게 노력한게 있는데.. 나는 공정하게 널 인정해.
나는 네가 얼마나 수고한건지 다  아니까...

그 달콤한 거짓 위로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맞다며 맞장구 쳐주는 사탄...
그렇게 가인은  사탄에게 마음을 주며 그에게 완전히 속한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 그는 저 사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형제를 죽였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그를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되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요일 3:12).

그리고나선 동생 아벨에게 토로했겠지요.

자신이 했던 그 수많은 노력과 땀을 보여주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불공정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수 있느냐며
나와 함께 하나님을 버리자고 이야기 했을 겁니다.
나의 노력과 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저 사탄이야말로 공의로우며 섬길만한 대상이라고 설득했겠지요.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올때 받으실만한 헌물이 무엇인지 이미 우리에게 말하시지 않았느냐고...
왜  그것을 무시했느냐고 오히려 되물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창조하신 분일진데 그 분의 말씀을 왜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말이지요.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것임을 다시 한번 알려주며 다음부터라도 그래서는  안된다는것을 알려주었을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인은 사탄에게 속해버린 뒤였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가인에게 아벨의 대언은 오히려 증오심만 끓어오르게 했겠지요.

이로써  창세로부터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눅 11:50-51).


도저히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공정하기만 한 하나님과 그런 하나님의 말을 토시하나 빼놓지 않고 자신에게 전하기만 하는 아벨. 아벨도  자신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듯 보였을겁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기왕이면 자신이 그렇게 땀흘려 노력하고 수고했던 그 땅.
바로 그 땅 들판의 한  가운데서 죽이기로 말이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의 피붙이 혈육인 동생마저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창 4:8)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르다 생각한  대로...
정말 열심히 행했고..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불공정하다며 거부한 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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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가인을 보는지 모릅니다.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받드시 인정받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하며, 그것을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복음에는 그들의 수고나 노력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때문입니다.


그 노력과 수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것입니다. 오히려 노력하고  수고하는 모습은 본받아야 할 일이지요.
다만 그 모든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변함없이 수천년을 이어온 완전한 그  말씀,
언제나 동일하신 그 하나님을 바른 말씀으로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인것입니다.

바른 성경,  바른 교회, 바른 신앙생활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저도 나중에 주님을 만날때
잘못된 노력의 열매를 가져간  가인처럼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안에 머무를 그때에, 바깥으로 쫓겨나 이를 가는 무리들을 보며
말씀 대로 행하길 정말 잘했구나하고 함박웃음을 짓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과학의 한계

아는 것이 힘이요, 모르는 것이 약이다 라는 말은 자주 듣는 말중의 하나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는  것, 즉 정보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수가 없을 정도이지요.

세상속에는 수없이 많은 거짓 정보도 함께 있기때문에 이러한  정보의 진위를 따지는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참된 정보로 대부분 받아들입니다.
과학자들이 쏟아내는 무분별한 말들조차 과학자라는 신분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습니다.

과학적 지식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며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누구나 수용할만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바로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과학" 이란 관찰 -- 가설 -- 실험 -- 법칙의  순서로,
검증되고 객관화된 지식이 쌓인 지식체계를 말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을 통해 미래의 일을  예측하려고 하는데,
과학적 지식으로 정확한 예측을 할수 있게 되면 많은 일들을 해낼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 잡한 기계를 만들때 그 기계의 부품 하나하나가 어떻게 작동할지 과학적 지식을 통해 예측할수 있기때문에
필요에 따라 설계할 수  있게 되고, 또한 그 기계를 적절히 사용할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과학적 지식들로 설계도 할수 있고, 필요에 따른  새로운 것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학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과학은 무엇이든 설명해주는 만능(?)  지식으로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운명도 과학으로 설명하려 하지요.
자신의 존재도 그저 생물학적 지식으로,  자신의 죽음도 의학적 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랜시간 발전해온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 언젠가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할수 있으리라 믿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실.  과.학.은.가.장.중.요.한.것.을.설.명.하.지.못.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과학은 "왜 그런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만드는 모든  것에는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왜 이 기계가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위해 만들어 졌는지를 모르면 그 기계를  적절히 사용할수 없게됩니다.
"왜", "무엇을 위해"는 어떤것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 질문중의 하나입니다.

그 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은 그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최종적인 법칙을 만드는 것이 전부입니다.
한마디로 과학은 처음과 끝은  모른채 중간의 현상만 잘 정리해 모으는 지식체계인 것입니다.

과학으로 제트 비행기를 만들고 우주 탐사선을 띄울수  있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물이 H2O 라는 화학식으로 되어 있다는것은 초중학교에서 이미 배우는  과학적 지식입니다만,
왜 물이 H2O로 되어야 하는것인지,
그러니까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한개가 모여서 왜  물의 성질을 나타내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가 모이면 물의 특성을 띄며 물이 되더라 라고 하는  것이 과학이 설명해 줄수 있는 전부입니다.
무엇을 위해 물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존재하니까 그 특성을  관찰해 특성마다 적절한 이름을 지어줄 뿐이지요.

양극과 음극은 서로 당기고, 같은 극끼리는 밀어낸다고 과학은  설명하지만
왜 양극과 음극이 서로 당기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왜 하필이면 1극,2극, 3극이 아니라 양극과 음극이란것이  존재하는지도 과학은 설명할수 없습니다. 관찰--가설--실험--법칙으로 어떻게 이런것을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질량을  지닌 물체간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과학은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그 현상을 표현할 뿐,
왜 서로  끌어당기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고 하나의 법칙으로 "이름"을 정했을  뿐입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 쿨롱의 법칙, 케플러의 법칙, ... 법칙, ...법칙, ...법칙, ...

수  없이 나열되는 이런 과학의 법칙들은 다만 자세히 관찰하여 반복되는 것들에 대해 "이름"을 정해둔 것일 뿐입니다.

이 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물에 대해 이름을 지어준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을 부르는 바가 그대로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창세기 2장19절)

인류가 기나긴  역사속에서 찬란하게 발전시켰다는 과학이란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이 한 일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창조물을  보고 이름을 짓는 일일 뿐임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전도서 1장 9절)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자랑하는 과학의  실체입니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채 그저 이름짓기만 할 뿐입니다.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질문에 단 하나도 대답할수 없었던 몇천년 전의 욥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2010년 4월 8일 목요일

keepbible.com 사이트 소개

인터넷에 보면 성경을 통해 얻은 지식을 정말 잘 간추리고 알기쉽게 풀이해서 적은 좋은 글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  글들을 보면 모두 이곳 블로그에 갈무리해서 올려놓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만..

아마 그렇게 하다보면 이 블로그는 그렇게  갈무리된 글들로 가득찰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것 보다는 좋은 글들이 있는

사이트를 소개하는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블로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블로그라서.. 정말 적은 분들이  오시지만.. 그 분들께만이라도 소개를 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이 되실때 Keepbible.com 이라는  사이트에 꼭 한번 들려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곳 자유게시판에 가셔서 김문수 형제님,  김재욱 형제님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성경을 읽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곳에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은  최근에 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 바르게 읽는 성경 / 김문수 저 / 출판사 그리스도 예수안에 ")

그  외에도 수많은 주옥같은 자료들이 모여있습니다. 설교, 동영상, 기타 지도, 선도자료 등등등.

제 최근 글들도 그곳  자유게시판에 한동안 꼬박꼬박 올렸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보기에는 크리스쳔들에게 가장 좋은 사이트중  하나가 아닐까 하여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