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30일 화요일

성경에 대한 무지


언뜻 생각하기에 크리스천들 만큼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은 없을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시중에 성경이라는 제목으로 팔리고 있는 많은 책들을 보면서,

성경이라는 제목만 붙어 있으면 전부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뭐랄까요?

너무 순진하다고 할까요?

"00성경" 이라는 책 표지만 보고 다 같은 성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현실을 전해야 할지도 참 막막합니다.


어찌보면 크리스천들만큼 자신들이 읽고 있는 성경에 대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사람도 없는것 같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에 대한 지식이 크리스천들에게는 너무나 부족해 보입니다.



책방에 보이는 수많은 성경들은 대부분 조금씩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구절을 비교했을때 서로 반대의 내용이 담겨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선 이런 사실부터 알리는데 힘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2017년 5월 19일 금요일

권면.

권면.


"권면"이라는 말은 사실 일상적인 대화나 글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이 단어를 잘 알고 있지요.

뭐랄까.. 마치 기독교인들의 전문용어 처럼 사용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비슷한 말은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충고" 라는 단어를 떠올릴수도 있는데,

"충고"라는 말에는 뭔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혹은 경험자가 초보자에게 처럼,

뭔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듯한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비슷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안"이라는 말도 뭔가 비슷한 말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보입니다.

"제안"은 여러가지 중의 선택중에 그저 하나의 의견으로 내 놓는 느낌이 들어서

권면까지 이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권면" 이라는 단어를 크리스천들이 사용할때에는

주변의 다른 크리스찬에게 따뜻한 마음과 진정을 담아서 동료에게 하는 "충고아닌 충고" 정도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 이라는 뜻이라고 설명되어 있네요.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 이렇게 주변의 크리스찬에게 권면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 사람이 뭔가 나보다 잘나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정말 나를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내가 더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구나" 라고 듣는 사람이 느끼도록 말하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권면은 성경에는 나오지만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그런 일이 되어버립니다.



가까운 사이라면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볼수 있겠지만,

심지어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서도 서로를 향해 권면하는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상대방의 약점들마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뭐라고 하건간에 상대방 눈에 들어찬 들보가 먼저보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모든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에게는 권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말씀가운데

롬 12:8 말씀에 보면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섬기며, 주는 자는 단순함으로 그 일을 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권면하는 일은 심지어 섬기는 일에 속합니다.


언뜻 생각해보면 권면을 하는 사람은 참 속편할것 같고,

그 반대로 권면을 받는 사람은 뭔가 잘못이 있어서 고통스럽게 뭔가를 바꿔야 하는것 같고, 또 그렇게 바꿔야 할 것이 있어서 부담을 더 느껴야 할것 같은데..

성경은 오히려 권면을 하는 사람이 섬기는 일, 힘든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롬 12:1a)"

라고 말하며 그의 권면을 시작합니다.


앞서 권면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말을 생각해 보았을때 저는 "간청" 이라는 말을 떠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간청" 이라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던 "권면"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가진 단어니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너무나 큰 죄인이라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로 이렇게 이야기 하는것이라며 자신의 말을 시작하고,

또한 듣는이를 향해 "간청"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네. "간청" 이라면 과연 그것이 섬김이라는데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의 권면이 간청이 될때.. 우리는 권면으로 주변의 형제 자매들을 섬길수 있을겁니다.


동료에게 정말 진정으로 따뜻한 권면을 해야할때 내 마음가짐이 진정 어떠해야 할지

성경은 바울의 이런 마음가짐을 통해 권면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는것 같습니다.



행여나 누군가 저에게 이런 권면을 할때 그 분의 마음이 저를 향해 간절히 간청하고 있음을 제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2017년 5월 18일 목요일

분노와 정치


대한민국은 탄핵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를 통해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지난 과거에 일어난 부조리와 부패와 각종 비리들이,

때마침 드러난 증거들과 함께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지며 분노를 일으켰고,

그 동안 쌓여왔던 불만들이 터져나오면서 마침내 그 분노는

대의 민주주의라는 틀을 거쳐 평화적으로 정권이 바뀌는 힘을 제공했습니다.

그저 투표에 참가해서 표를 던진 것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는,

이런 모든 과정들을 보며 우리나라가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는 어느새 이런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도 같이 커나가고 있었습니다.

..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지난 두 정권동안 각종 언론과 공공기관들은

4대강 사업으로 강줄기가 오염되듯 상당히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일들에는 관성이라는 것이 있듯이, 규모가 클수록 그 행태가 갑작스럽게 변할수 없다는건 누구나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타락해버린 언론과 공무원들 역시 십 년의 세월동안 뿌리깊이 적응해온 만큼

새 정부에 대해 여전히 기울어진 시선의 기사들을 쏟아놓고,

악의적인 뉘앙스가 가득 담긴 비 정상적인 뉴스들도 여전히 신문과 방송을 타고 나오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화가 더디기만한 이런 모습을 보며

특히나 젊은 세대들은 그 뜨거운 분노를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더 크게 표출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뒤돌아보면 탄핵때부터 불이 지펴진걸수도 있고,

혹은 그 훨씬 이전부터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자라온 분노일수도 있겠습니다.



저 역시도 이 모든 과정들을 함께 지켜보며 같이 분노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제 마음속에 불질러진 이 분노는,

어느새 제 스스로도 염려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언제나 제 모든 생활의 주님이 되셔야 할 그 분의 자리에,

어느덧 주님 대신 저의 분노가 앞서가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불공정과 비리와 온갖 더러운 부조리를 보고 분노가 일어나는건

양심과 정의를 갖춘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이 모든 분노는 저의 품속에 지녀야 할 분노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의 분노는 많은 것을 굽게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굽게 하고, 시간을 되찾아야 할 크리스찬들에게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울 수록 이 세상이 어떠하게 변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성경을 읽는 시간마저 뉴스를 보는데 사용하고,

기도할 시간을 빼앗아 저주와 욕설을 내밷는데 사용합니다.

간간히 틈을 내어 듣던 설교말씀들을 제쳐두고, 여러 팟캐스트를 통해 부패한 정치의 단면을 듣습니다.

더이상 길거리에 핀 꽃을 보며 주님을 떠올리지 않게되고,

부패한 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죄악을 쌓아왔는지 찾아보고, 읽으며 분노에 분노를 쌓습니다.

그러한 분노는 정의라는 명분아래에 나의 옛사람에게 또 다른 즐거움과 쾌감을 줍니다.


분노는 제가 크리스천임을 망각하게 하고, 제 주변의 작은 일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웃과 동료 크리스챤과 나누는 대화에서 정치 이야기만 하게 만들고,

하나님앞에서 죽을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 고백한 제 입에서

또다른 누군가를 저주하고 비난하는 말들만 나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은 분노하는 자의 몫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며 지켜보고 계십니다.

성경은 세상의 끝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무너져가는 이 세상에 희망을 가질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넓은 바다에서 사람을 살리는 어부가 되어도 모자랄 제 인생을

어느덧 분노가 좀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하고 계신 형제 자매님이 계시다면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눈을 돌려 더 자주 하늘을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시간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성실하게 시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되,

이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분노는 더이상 제 맘속에 두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악을 보며 책망하고 화를 내어도 더이상 주님을 외면하는 죄를 짓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에 둬서는 안될것 같습니다.

다른 것들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떨어뜨려 놓습니다.

2017년 5월 17일 수요일

뉘우침과 사랑


사람을 평가할때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할수 있겠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애절하게 보여지는 순간 누구나 그 사람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게 됩니다.

특히 부모의 내리사랑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심지어 끔찍한 살인을 할 살인자라도

감옥의 창살에 갇혀 지난날을 뉘우치며 늙은 부모에게 죄송하다는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지요.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니던 청년이 치기어렸던 젊은 시절의 잘못들을 뉘우치며 부모님께 눈물짓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과 따뜻한 시선을 갖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부모는 자식을 용서하고, 자식들에게는 어떤 잘못을 해도 돌아갈 버팀목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보는 문화가 있어왔습니다.

이런 긴 문화의 영향인지 몰라도, 적어도 부모와 자식간에 보여지는 이런 사랑의 모습 앞에서는

누구나 얼음같은 차가운 감정들이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비단 효를 숭상하는 문화때문은 아닌것 같습니다.

제가 오랜시간 독일에서 살면서 이곳 사람들도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뉘우치고 돌아서서 부모에게 용서를 빌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바라볼때 누구도 그것에 대해 공의를 먼저 내세우지 못할것입니다.

못난 자식의 잘못에 댓가를 치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죽음에 까지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눈에 띄게 늘어난 부모님의 주름과, 인생의 고된 여정에서 단단하게 박힌 굳은살을 보며

눈가의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어느 못난 자식의 모습에서,


머리에 깊숙히 박혀 피가 쏟아지는 가시 면류관과 양 손을 뚫고 십자가에 박혀있는 굵은 대 못에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눈물로 회개하는 이 못난 저의 모습에서...


이건 그저 부모가 베푸는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릴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