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인가? / 김문수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8807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 사람의 구원 문제가 결정되며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죄인들은 복음을 듣고 그에 대해 반응(믿거나 거부하거나)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들만 먼저 거듭나게 한 다음에,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선택(elect)은 하나님께서 섬김, 특별한 사역, 축복 등을 위하여 사람을 세우시는 것을 말하지, 누구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하고 누구는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미리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칼빈의 신학 사상은 거의 대부분 로마 카톨릭 신학자인 어거스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글에서 어거스틴의 글을 자주 인용합니다. 칼빈은 예정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논증합니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게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선명한 거울이 되는 예가 교회의 머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become) 것은 그가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위대한 영예는 그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선물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거저 주어졌다(freely presented). 여기서 누군가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분이 받은 것을 누릴 수 없느냐고 묻는다면,... (중략)... 만약 그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누군가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정죄에 이르도록 예정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빼앗게 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II:xxii, 1.)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누군가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만 구원하신다는 예정 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느냐 영원히 버리느냐를 결정할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보듯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Christ's eternal Sonship)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믿는 오리겐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것이 어거스틴, 칼빈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그분의 아들이 되었다(become)고 주장하며, 자신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시편 2편 7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하거나 출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무궁토록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며, 그 분은 신성과 영광과 권능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존재도 이런 영광을 누린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되신 것은 상속을 통해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4-5)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 시편 2편 7절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시편 2편 7절에 기록된 이 날(this day)이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출산한 날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바로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성취하셨다는 것이라. 그것은 또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바,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함과 같도다(행13:33).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영원무궁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declared)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made) 준 것이 아닙니다. 개역의 번역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부활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흠정역: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1:4).

개역: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오리겐, 어거스틴, 칼빈, 여호와의 증인들이 뭐라고 주장하건 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무궁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eternal Sonship)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개역이나 NIV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은 먼 옛날의 어느 때였다고 주장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그분께서 영원부터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개역: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흠정역: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NIV: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KJV: But thou, Bethlehem Ephratah, though thou be little among the thousands of Judah, yet out of thee shall he come forth unto me that is to be ruler in Israel; whose goings forth have been from of old, from everlasting.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origin)이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조언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사9:6).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 칼빈이 잘못 이해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지, 그의 인격에 대해서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이루어놓은 업적 중 긍정적인 부분들도 있겠지만, 다만 그가 로마 카톨릭의 종교적 관습과 어거스틴의 교리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것이 개혁(reformation)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개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new creature)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1년 11월 9일 수요일

오늘 아침에...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더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이것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언하도록 보내어진 자더라.

그 빛은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되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고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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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출근길에서 이 말씀을 들으며 얼마나 은혜로왔는지 모릅니다.


큰 감사의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힘차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과

그 커다란 감동에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걷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이렇게 말씀이 너무 달고 좋을때의 그 기분은 말로 다 표현 못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이런 경험들은 해보신적이 있겠지요?

이럴때는 참 힘이 납니다.


왜 이 구절에 이런 갑작스런 감동을 받은걸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주님을 볼때에는 얼마나 더 기쁠까요?


주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요 !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새로운 시작

벌써 세번째 가정예배를 경험했습니다.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를 조용히 나와서, 제가 설교를 하고 제 아내 홀로 제가 준비한 설교를 듣는 가정예배입니다.
이제 1년 6개월이 된 제 어린 아들을 위해서 짧은 어린이 예배도 드립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저나, 제 설교를 진지하게 경청해주는 제 아내나,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채 "하나님"을 겨우 따라하는 제 아들에게 이 곳 독일 생활에서의 가정 예배가 얼마나 지속될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좀 더 바른 신앙 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과, 교회를 다니면서 생겨나던 내적인 갈등을 더 이상 두고 볼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된 가정예배였고, 이제 이렇게 새롭게 내 딛는 발자국에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간절함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교할 자격이라고는 한 가정의 가장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신학교육은 근처도 가보지 못하였기에,
저를 따라 진지하게 저와 동행하고 있는 제 아내가 너무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 많은 교회가 넘쳐난다지만 흠정역 성경을 들고 성경의 가르침을 간구하며 한 걸음씩 걷는 교회가 주변에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주님께서 이곳 독일땅에서도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는 형제 자매님들을 만날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