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4일 금요일

날수 세는 것을 가르치사

 

날수 세는 것을 가르치사

시편 90장 14절. 그런즉 우리에게 날수 세는 것을 가르치사 우리가 지혜에 이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쓰게 하소서.


성경에서는 지혜의 시작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잠언 9장 10절.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할때,

옆에서 누가 자신을 지켜보던지 아닌지 상관없이 늘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돌아보고 악을 멀리하게 되며, 그렇게 살아갈때에 비로소 성경이 가르치는 진짜 지혜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똑똑하게 뭔가를 해결해 나가거나, 기가막힌 아이디어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죄를 짓고 끝까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거부하면서 결국 지옥으로 간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시편 90장 14절은 이런 지혜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배울것이 또 하나 있다고 가르친다. 

날수 세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 중에, 살면서 앞으로 자신이 살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어 보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지긋이 들어가면 주위에서 하나 둘씩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게 마련이다. 부모, 친척, 때로는 친구가 될수도 있다. 이런 경험들을 몇 번 하게되면 비로소 자신이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끝자락에 가서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경험들을 통해 날수 세는 것을 한 두 번 해본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남은 시간도 얼마 없고 또 그때가서 자신의 인생을 돌이키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이렇게 느즈막에라도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면 그나마 참 다행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젊을때부터 날수 세는 것을 배워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정말 값지고 뜻깊게 사는 것이 그 무엇보다 유익할 것이다.

우리가 일찍부터 날수 세는 것을 배워야 할 이유이다.


2022년 8월 17일 수요일

대언하다. to prophesy

 

사무엘상 18장 10절에는 일반 크리스찬들이 잘 몰랐던 내용이 나온다.

사무엘상 18장 10절. 개역 한글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여기서 야료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부분을 보면 내가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는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흠정역 성경으로 다시 한번 같은 구절을 살펴보자.

사무엘상 18장 10절. 흠정역

10. ¶ 그 다음 날 하나님으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하매 그가 집의 한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 다윗이 다른 때와 같이 손으로 하프를 켜더라. 사울의 손에 창이 있었으므로

그렇다. 대언을 한 것이다.

영어로는 prophesy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누구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Prophet, 즉 대언자라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예언자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 대언자를 예언자로 표기하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이 구절을 잘 보면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했을때 사울이 무려 "대언하고" 있다.

보통 교회에 가면 성령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악한 영도 임할수 있고, 악한 영이 임한 사람들은 악한 영의 말을 대신 전할수도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특히 교회에는 거듭난 사람 뿐만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가득하다.

이들이 악한 영의 말을 대신 전하는 말을 단지 교회에서 들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받아 들였다가는 큰일난다.

도대체 방언도 번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게 성령의 말인지, 악한 영의 말인지 알수가 없다.

방언을 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나?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내용이 악한 영이 전하고픈 메세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것인가?

방언을 하면 다 거듭난 사람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무엇을 고백하는지 들어보기 전에는 알수없다.

방언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

불교에서도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

무슬림도 방언을 한다.

힌두교도 방언을 한다.

그러니 이해할수 없는 방언을 단지 교회에서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메세지를 하나님의 메세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지극히 혼란한 시대이다.


2022년 7월 4일 월요일

두 번째 유월절

 

성경을 여러 번 읽었었는데, 어째 읽을때 마다 매번 새롭다.

보통 알고 있기를,

일 년에 한 번 있는 유월절 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민수기 9장 11절을 보면 두 번의 유월절을 지내는 경우가 나온다.

민수기 9장 11절.

둘째 달 십사일 저녁에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고 유월절 어린양을 누룩 없는 빵과 쓴 채소와 함께 먹을 것이요,


한 해의 첫 번째 달 14일에 지내는 첫 번째 유월절을 지낼때,

그때 때마침 여행중이거나, 시체 같은 부정한 것을 만져서 부정해지는 바람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첫 번째 달 14일에 지키는 유월절에 참여할수 없었으므로 그 다음달 즉, 두 번째 달 14일에 지키는 두 번째 유월절에 참여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1년에 한 번 있는것이 아니라 2번 있는 것이다.

물론 민수기의 기록시기인 그때만 예외적으로 2번의 유월절을 지켰다고도 볼수 있겠지만..

사람 사는데에는 늘 변수가 넘치는데,

그 다음 해 부터 모든 유대인들이 마침 유월절 시기에 단 한 사람도 부정하게 되지 않았다거나, 단 한 사람도 여행중이었던 사람이 없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당연히 그 다음 해에도 이런 어쩔수 없는 경우에 있었던 사람들을 위해 두 번의 유월절이 지켜졌을 것이고,

이것은 아마도 전통처럼 지켜졌을 것이다.

아마 예전에도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사실을 인식했을텐데..

왜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실처럼 느껴지는 걸까?

드디어 내 머리가 정말 뒤돌아 서면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른걸까? ㅡ.ㅡ


2022년 6월 16일 목요일

영, 혼, 육 정리

 

성경에서는 사람이 영, 혼, 육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23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을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본따서 이 영, 혼, 육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육)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영)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혼)이 되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중 어느 한 인격만 완전히 따로 떼어내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사람도 영, 혼, 육 어느 하나만 완전히 따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몸이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 몸안의 영과 혼도 어쩔수 없이 그 일을 하는데 동조할수 밖에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 혼, 몸 중의 어느 하나가 어떤 영향을 받거나 무슨 일을 하면 나머지 부분들도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로 미치는 영향을 받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 혼, 육은 완전히 따로 떼어내서 각각을 이해하는 시도를 아무리 하려고 해도, 이 셋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긴밀하게 연결된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따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 혼 육에 대해서는 언제나 기본적으로는 종합적 이해를 할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그래서 영, 혼, 육을 필요에 따라 따로 분리해서 기록할때도 있지만, 또한 '사람' 이라는 단어를 써서 이렇게 총체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이해를 요구할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속사람' 으로 표현되는 성경구절에서는 비록 '속사람'은 성령을 따르는 영적 존재로 나오지만 육과 혼을 모두 완전히 분리해서 '속사람'을 오직 영으로만 분리해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속사람'은 영을 따를때의 그 사람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육 ( = 몸, 겉사람, 옛 사람)

보통 에 대해서는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에 어렵지도 않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육(몸)에 대해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 육을 쫒아가는 일이 있습니다. (벧후 2:10 ... 부정한 정욕에 빠져 육체를 따라 걸으며...)

* 육을 쫒아갈때에 몸 뿐만아니라 혼과 영도 어쩔수 없이 같이 동참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을 쫒아 살았던/사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옛 사람' 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2. 혼 ( = 자아, 나, 마음(mind), 내가)

흔히 생각, 정신, 감정, 의지, 이성과 오성은 혼의 기능이라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어떤 사람이 있을때 혼은 그 사람의 인격을 뜻한다고도 보면 됩니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하는 생각, 정신, 감정, 의지 등은 모두 홍길동의 혼에서 이루어 지는 일입니다.

혼은 구원받는 대상이지 거듭나는 대상이 아닙니다. 거듭나는 것은 입니다.

믿음의 결말은 혼의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9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혼은 영을 따를지 혹은 육을 따를지를 판단 할 수 있고, 생각과 고민을 통해 선택할수 있습니다.

혼은 마치 배를 조종하는 키의 역할을 하는데, 때로는 그 키를 쥐고 있어도 폭풍이 몰아치거나, 그와 반대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배를 조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수 있습니다. 즉 때로는 영이나 몸이 혼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혼이 원하는 방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이나 몸 중에 어느 한 쪽을 따르도록 하게끔 하기도 합니다.

3. 영 ( = 속사람, 마음(Heart), 마음의 감추어진 사람(the hidden man of the heart))

혼과 영은 둘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혼은 자아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나 자신을 뜻해서 그나마 이해가 쉽지만 영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잡는 것은 그야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은 직관(intuition), 양심(consciousness), 영교(communion, 영적 교통, 영적 교류)의 기능을 갖는다고 설명됩니다.

사람은 무언가 결정할때 명확한 생각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 아닌 말로 할수 없는 어떤 감? 같은 것에 의지할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고 나서 마음속에 어떤 불편함, 후회 같은걸 느낄때도 있구요. 이러한 것들이 영의 기능에 의해 일어난다고 이해하는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때 거듭나게 되는 존재입니다.

거듭난 영은 몸 속에 오시는 성령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끊어졌던, 그래서 성경에서는 죄로인해 죽었던 상태라고 정의되는 사람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거듭나게 되면서 다시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영, 혼, 육으로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그 중의 하나인 영이 성령 하나님을 쫓아 살수 있게 됩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어릴때부터 이런 영이 매우 강건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40

아이가 자라며 영이 강하게 되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성경에서 '강건'이라는 표현은 주로 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에베소서 3: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사람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을 튼튼하게 만들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이 튼튼해지면 파급효과로 혼도 건강해지고 영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과 연합된 이 영은 꾸준한 말씀읽기와 기도를 통해 강건해져서 혼과 몸까지 그 파급효과를 미치게 할 수 있습니다.

꾸준한 말씀읽기와 기도는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많은 영향을 받을수 있게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말씀읽기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같이 자라나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도들과의 교제(영적 교제)가 영에 활력을 불어넣어줄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3

그런즉 우리가 너희의 위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고 참으로 디도의 기쁨으로 인해 넘치도록 더욱 기뻐하였으니 그의 영이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다시 활력을 얻었느니라.


영, 혼, 육은 항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영을 강하게 하는 가장 느린 방법은 몸을 단련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우리의 혼을 통해 말씀읽기와 기도를 꾸준히 하는 것이며, 가장 빠른 방법은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직접 강건하게 하실때에 가능합니다.

시편 31:24

주께 소망을 둔 모든 자들아, 너희는 크게 용기를 내라. 그분께서 너희 마음(heart)을 강하게 하시리로다.


고린도 후서 4:16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


2022년 5월 11일 수요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

 

크리스찬이 되고 나면 궁금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이 부분에서 자신의 욕망을 섞는다.

예를 들면,

국제 콩쿨을 준비하는 음대생들의 경우 흔히 콩쿨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그걸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많이들 고백한다.

또 운동선수들은 올림픽이나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으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고시에 합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하기도 한다.

TV 에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시상식에 나와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여주고, 이런 화면을 본 크리스찬들은 이렇게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세상적 성공의 순간에 하나님께 감사해하고, 그들의 성공이 하나님 덕분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일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세상적 성공을 통해 영광을 받거나 영화롭게 되시는 분이 아니다.

성경에는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지 나와있다.

시편 50:15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세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고난들을 만난다.

이러한 고난의 날에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에서 건져주신다고 적혀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난을 극복한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고난에서 건져진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세상의 성공=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공식과는 오히려 반대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세상의 삶은 많은 고난을 가져다 줄수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는 그래서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럴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확실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다.

시편 50:23

찬양을 드리는 자는 다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자기 행실을 바르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로다.


또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이 분명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법이 나와있다.

이 역시 세상의 성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혹시 세상의 성공을 이루지 못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찬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세상은 자꾸 우리를 속이려고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2022년 5월 4일 수요일

예수님은 왜 웃지 않으셨을까?

 

이 질문은 참 여러가지 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나의 답을 말하라면, 예수님께서는 웃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답하겠다.

물론 평소에 자주 웃으시곤 했는데, 성경 말씀에 기록되지 않은 것 뿐이라고도 생각할수 있겠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삶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프고, 병들고, 지칠대로 지친 수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끊임없이 예수님께 왔다.

가르치고 가르쳐도 끝없이 계속되었을 그 만남들..

예수님께서 보고 느끼고 한없이 깊이 공감하셨을 그 사람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매일 매일 느끼셨을 그 감정들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수많은 눈물을 흘리셨겠지만 모두 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안타까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몸이 못박히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없었을 것이다.

 

오직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신다.

우리가 이제는 이 땅에서 웃음짓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기쁘게 할 차례다.


2022년 3월 16일 수요일

가나안의 도덕적 상대주의

 

신명기 12:8

또한 너희는 우리가 이 날 여기에서 행하는 모든 것 즉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본받아 행하지 말지니라.


근래에 들어 도덕적 상대주의라는 개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온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다. 아니, 이미 널리 퍼져서 젊은 세대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각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를 다룰때에는 이 사상이 절대 진리인것처럼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듯 하다.

또한, 도덕적 상대주의는 오랜 기간동안 역사를 통해 발전해온 인류의 철학적 금자탑인것 마냥 가장 최신의 도덕적 판단 기준처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알수 있듯이, 이런 사상은 이미 수 천년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탈출했던 당시에 가나안 민족들이 가졌던 사상이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전혀 현대적인 것도 아니고, 오랜시간 철학적 윤리관이 발전을 거듭해서 생겨난 최신의 도덕 윤리관도 아니다. 오히려 수 천년전의, 죄로 충만했던 가나안 족속들의 아주 오래된 윤리관일 뿐이다.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옮은 대로 행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도덕적 상대주의의 끝판왕이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의 이런 사상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수천년전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본받아 행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시는 사상이며, 크리스찬이라면 절대 본받아서는 안되는 사상이다.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사기 17: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가나안을 정복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이스라엘 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던 저 도덕적 상대주의를 그대로 본받아 행하고 말았다.

이러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충만한 사회는 결국 인간의 죄성에 날개를 달아주어 온갖 죄들로 가득하게 될 뿐이다.

성경에는 이런 죄들이 가득했던 사회마다 어김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고, 그래서 도덕적 상대주의가 가득했던 가나안의 족속들 역시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레위기 18:24-25

너희는 이것들 중의 어느 하나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이 모든 민족들이 이 모든 것들로 더럽게 되었고 그 땅도 더럽게 되었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땅의 불법을 그 땅에게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자기 거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세상의 끝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이 주위에서 이러한 도덕적 상대주의를 목격하는 것은 결코 놀랄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상을 매우 주의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가랑비에 속옷이 젖듯 어느새 크리스찬들도 이를 본받아 행하게 될 것이다.


2022년 3월 12일 토요일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노라

 

누가복음 9장 51-53절

¶ 그분께서 위로 올려져서 영접 받으실 때가 이르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자기 얼굴을 고정하시고 사자들을 자기 얼굴 앞에 보내시니 그들이 가서 그분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니라.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듯한 얼굴이므로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위해서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관통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 간에는 역사적으로 깊은 갈등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과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혼인으로 생겨난 혼혈족속인 사마리아인들을 유대인의 정통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로 생각해 완전한 이방인 취급을 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유대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이방인보다 오히려 더 미움받으며 천대받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과 자신들을 배제하는 태도로 인해서 그들 역시 크게 유대인을 미워하고 있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었기에,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갈때 중간의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짧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크게 베레아지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이방인들과 다름이 없는 사마리아의 지역을 통과하면서 이방인인 그들과 교류가 일어날수 밖에 없는 상황 자체를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마리아인들도 자신들 주변에 유대인들이 있는 것 자체를 매우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므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꽤 난감한 상황을 여러번 넘겨야만 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인들을 전혀 차이를 두지않고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사마리아 인들에게도 자신들이 사는 지역내에 하나님을 섬기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며, 예수님 같은 분이 자신들이 마련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간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마리아 인들의 태도를 보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다음과 같은 말을한다.

누가복음 9장 54절

그분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


한마디로 야고보와 요한은 이런 사마리아 인들의 행태를 괘씸하게 보았다.

감히 자신들이 모시는 예수님께 정통성 문제를 따지면서 예수님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자신들이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신앙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던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이 천벌을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9장 55-56절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 하시니라.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가니라.


비록 사마리아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오해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가지,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문제에 모든 촛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계신다.

오히려 오래 참으시는 길을 택하시고, 그들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들을 미워하며 차라리 그들이 죽어버리기를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영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아닌, 악한 영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을 주고 계신다. 즉 사마리아 인들이 잘못하고 있으므로, 당장 죽어버리기를 원하는 마음은 악에 속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이 분명 잘못하고 있는게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꽤 오래전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사실인지 확인은 할수 없지만, 구원파 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기성 교회를 나가게 되어서 그들의 모임을 떠나게 되면, 그들 내부에서는 그렇게 떠난 이들을 향해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 취급을 하고, 온갖 부정적인 말로 그들을 모함하기도 하며, 심지어 처음부터 사탄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식의 저주 같은 말들을 쏟아 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내부 단속에 더 힘을 쏟는것처럼 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만약 정말 그런 일들이 그 안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 더 하나님의 영에 속한, 더 올바르고 더 정통적인 교회라고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에서 살펴본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해볼때, 그들 스스로가 오히려 악한 영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임을 알수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계속해서 오랫동안 인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떠난 사람들을 오히려 더욱 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떠난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더 잘 믿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울수 있었던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마음, 그 영에 속한 마음임을 알수있다.

어떤 교회를 다니던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지, 또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말들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남아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교회가 진정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를 판단할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