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8일 수요일

말씀의 젖

새로 태어난 첫 아이로 인해 거의 한달 만에 글을 써보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이라서 그런지 아이를 키우는 모든 과정이 정말 신비롭고 대단하게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처음 며칠간은 제왕절개 수술로 엄마의 젖이 금방 나오지 않아서 아기는 살이 빠졌었습니다.
젖만 물리면 금새 잠에 빠지는 아기를 보면서 왜 먹지 않고 잠만 잘까 하고 애타게 고민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결국 엄마의 젖이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되었을때,
젖을 물고서도 먹지 못해 잠만 자면서 살이 빠져가는 아기의 모습은 너무 안타깝기도 하고
젖을 주고 싶은데 주지 못하는 엄마의 울음도 옆에서 지켜보는 제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이제는 정상적으로 젖을 줄 수 있게 되어서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는 아이의 모습에 또 놀라워하기도 하지만,
젖을 주지 못할때... 살도 빠지고 약해져서 잠만 자던 아이의 모습을 통해 제 신앙적 모습을 돌아보게 되어
깊이 회개하였던 기억도 납니다.

말씀의 젖.

우리는 늘 말씀없이도 잘 살수 있는것처럼 살아가지만,
나의 아이를 보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궁핍한 삶을 사는지 알게됩니다.

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수고를 통해 이토록 풍성하게 주신 바른 말씀을
더 열심히, 매일매일 부지런히 읽어서
이렇게 낳아주신 하나님께 저의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말씀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2010년 8월 10일 화요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 김문수

장문의 글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글이어서 이곳에 옮겨둡니다.
아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순식간에 읽힐겁니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649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http://www.keepbible.com 에 가셔서 이 분이 쓰신 자유게시판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아마
마른 목을 적시는 듯한 느낌을 받으실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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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롬12:2)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2).


1970년대 후반에 기독교계에서 유행하던 우스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어떤 못 생긴 여자가 그의 무릎 위로 넘어졌습니다. 그 신학생은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버스가 급정거하자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예쁜 여자가 넘어지면서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여,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주(主)라는 크고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을 가지고 우스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잘못이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 "주님 뜻대로"라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의미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주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만큼 널리 사용되면서도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도 드물 겁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은 인생 여정은 한 가지일텐데 자기가 그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위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애타게 찾고자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상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작은 선택의 문제 하나하나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기까지는 감히 행동으로 나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다른 분들은 자기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으면서 "뭐,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체념을 하거나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번 주제는 글로만 전달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볼만한 흥미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어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입장을 한번 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1)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

기독교인들 중에서 많은 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며,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은 장래 일을 그분의 뜻에 따라 미리 결정해 두었기 때문에 사람이 이를 거스르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숙명론적인 주장을 믿는 분들은 자기들이 실수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길 혹은 계획하지 않으신 길을 선택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매사에 선택과 결정의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숙명론, 운명론에 빠지게 된 데에는 칼빈주의에서 나온 잘못된 예정론 교리가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무엇이거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독재자 혹은 전제군주로 보았으며, 그에 비해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사상과 교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한 개인의 장래는 하나님에 의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숙명론에 쉽게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교도들의 신들과 같이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자기 멋대로 해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이교도들의 신들은 델피의 신탁을 통해서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으면, 사람들이 제 아무리 그 운명을 피하고자 오이디푸스를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이려고 해도 결국은 신탁의 내용대로 이루어지고 맙니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에서 나쁜 마법사가 "공주는 열 여섯 번째 생일날 물레에 찔려 죽게된다"고 하면 왕이 나라 안에 있는 물레를 다 없애버리더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고 그분께서 써 두신 각본대로 사람이 움직이도록 조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이나 인형에 불과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마26:34). 그러나 주님의 미리 아심(예지)이 베드로의 선택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계획되고 작정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니라(마26:41).

베드로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님을 부인하도록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면,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둘 일이지 구태여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로 대비하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부인할 것인지 시인할 것인지를 선택할 여지가 남아있었다는 겁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30:19).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나쁘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거하고 있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수24:15)

심지어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문을 열고 그분을 모셔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 역시 우리 각자가 결단하고 선택할 문제이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자신의 미래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자신의 모든 행동과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에 대해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선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그냥 하고 싶은대로 기분내키는대로 하면 될 일이지 왜 골치 아프게 이런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합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자기 맘에 드는대로 행동합니다. "내가 오늘 경건치 않은 분위기의 모임에 가게 되는데,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막아서 못 가게 하실 것이다." 이런 변명을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내세우고 하나님의 적극적인 반대가 없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의 천사를 보내어 대언자 발람을 막듯이 그를 가로막기 전에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창조주시요, 통치자시요, 심판자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자기 멋대로" 권능을 행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사랑과 공의라는 기준에 따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시기에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개인의 선택과 판단을 존중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나중에 그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시고, 주의와 경고를 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미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빠져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을 위해 최적으로 맞춤 설계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무당들을 찾아가서 상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일상생활에서의 선택과 하나님의 뜻

여러분은 신발을 신을 때 오른발과 왼발 중 어느 쪽부터 신습니까? 혹시 어느 쪽부터 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께 물어보고 결정합니까? 오른발부터 먼저 신을 경우에는 왼발부터 신을 경우에 비해서 여러분 앞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종종 이런 사소한 영역 하나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따라 행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발부터 신발을 신느냐 하는 문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밥은 숟가락으로 뜰까요, 젓가락으로 집을까요?", "제가 짜장면을 먹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짬뽕을 먹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오늘은 제가 성경 어느 부분을 읽기를 원하십니까?" 등을 일일이 물어보고 주님의 뜻을 분별한 다음에 행하려고 합니다. 아마 정상적인 경우라면 하나님께서는 위의 각 질문들에 대해서,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라.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라. 어제 읽은 다음부터 읽어라."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이처럼 생활 중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참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분들이 전혀 일상생활에 지장을 겪지 않고 신발을 신기도 하고, 수저를 사용하기도 하고, 짜장면을 먹기도 하고, 성경을 읽기도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행치 않겠다더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물으면, 그분들은 당당하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다."라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 선택과 결정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반 상식과 개인의 선택권을 무시하면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 상당한 이질감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직통 계시를 주지 않으실텐데 도대체 그 계시라는 음성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어둠의 세력에 속한 악한 영들로부터 온 것이거나 자기 마음 속의 욕망이 발하는 메시지일 겁니다.

이전에 제가 결혼하기 전, PC통신 게시판을 통해 여러 형제 자매들과 결혼에 대한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자매가 바로 "내가 하나님께 물어봤더니 ~ 라고 하시더라."라며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자매가 저에게 "내가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형제님의 모습을 보여주더라."라고 말하며 접근해 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자매치고는 좀 대범한 프로포즈라고 생각하며 좋아했을까요?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고 받아주었을까요? 저는 한번도 그 자매를 결혼 대상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가 관심도 갖고 있지 않는 사람하고 결혼하라고 하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냥 무시해 버렸습니다. 결국 저는 그 자매와 결혼하지 않았고 그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 자매의 입장에서는 나와 결혼하는 것이 그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여러가지 사소한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일일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하여 어떤 신비한 음성을 들으려고 하거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이성과 분별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 상식과 이성과 선한 양심에 따라 선택을 하면 됩니다.


(3) 안 되면 조상 탓 대신 하나님 탓?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사전에 결정되어 있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각본대로 따라가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처한 모든 상황은 자기 의지와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선택하여 얻은 결과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여 병에 걸리거나, 늦잠을 잤기 때문에 학교 수업에 지각을 하거나, 운전 중 한 눈을 팔다가 교통사고를 내고서도 태평하게 "이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여기에도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실한 자세로 건강하고 평안한 가운데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지, 뭔가 교훈을 주기 위해서 자기 자녀들을 강제로 병들게 하고 사고를 당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원인을 무조건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숙명론을 빙자하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합리화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이 잘 안 되면 조상 탓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두시고, 순종과 불순종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하여 얻은 결과를 팔자 소관이나 운명 탓으로 돌리는 입장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한 것이거나 사람의 잘못이나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4)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란 건 없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한 최적의 인생항로를 정해 두셨다고 생각하고 과연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신비한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려고 애쓰고, 또 어떤 이는 그런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기독교 무당 앞에 가서 상담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개의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자기 뜻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선교단체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저와 함께 성경을 읽고 깨달은 내용을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필 심이 뚝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건 오늘은 성경을 그만 읽으라는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성경을 덮어버렸습니다. 성경 읽기 노트를 작성하다가 연필 심이 부러진 것이 과연 성경 읽는 것을 중단하라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연필을 새로 깎아서 쓸 수도 있고, 다른 펜으로 기록할 수도 있고, 혹은 기록하지 말고 성경만 읽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는 성경을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이 들자, 자기에게 닥친 그런 사소한 환경의 변화 하나를 핑계거리로 삼아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을 하여 자기가 내린 결정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지역교회 연합 모임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주 아름다운 자매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청년은 그 자매가 마음에 들었지만 교제를 신청했다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봐 말을 건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꺼냈습니다. "저기~ 안녕하세요. 오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과 결혼하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 주셨는데, 괜찮으시다면 우선 친구로 사귀어 보실래요?" 그러자 그 자매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그럼 우선 집에 돌아가서 제 남편과 한번 상의해 볼께요."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 속으로 원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고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최종 결재 도장을 찍어주기를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가부를 판단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결재 도장을 찍고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의 간섭이나 참견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계획과 의지를 관철시키고, 사람들 앞에서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온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나를 위해서 뭔가 일을 해 주는 도우미로 여기는 자기 중심적 사고에 기초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나오는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그분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위한 뜻이지 결코 사람을 위한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 "너희를 향한 그분의 생각"은 있어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없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 하니라(눅2:14).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노라. 그것은 평안을 주려는 생각이요, 재앙을 주려는 생각이 아니니 곧 기대하던 결말을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렘29:11).

자신의 삶 가운데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중심이 되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 뜻, 자기 계획을 많이 세우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런 수많은 계획을 세울지라도 오직 주의 뜻만이 서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잠19:21).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 그것만이 서리라(잠19:21).

그러므로 하나님을 종으로 여기고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맞춤 설계는 무엇인가?"를 찾는데 골몰하지 말고, 먼저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고(엡5:17),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약4:15).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그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며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하여야 하나(약4:15)


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인 예

이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인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짬뽕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고 묻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먹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내가 오늘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 마태복음을 읽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그다지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마4:4).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성경을 어떤 순서로 읽을 것인지는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결정하면 될 일입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이번에는 좀 더 중요한 문제,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어떤 형제가 영희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순희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에는 "나의 결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신 결혼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지 말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8). 그러므로 독신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서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좋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마19:12, 고전7:26).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으면 믿음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후6:14).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것은 물론이고, 두 사람이 함께 걸으려면 주 안에서 같은 믿음의 방향과 목표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암3:3).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느냐?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느냐?(고후6:14)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암3:3)

그리고 일단 결혼하면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엡5:33).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결혼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듯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엡5:33).

결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이렇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그런 기준에 따라서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하면 됩니다. 만약 그런 조건에 맞는 대상자가 여러 명이 있다면 그 가운데서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 선택은 여러분 자신의 몫입니다.

3.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적인 예

우리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인물들의 사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는지, 또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선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야곱의 결혼

아브라함의 종이 신부감으로 데려온 리브가와 결혼한 이삭과는 달리 야곱은 자기 스스로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중매 결혼을 했느냐, 연애 결혼을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방법은 각기 장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야곱이 배우자를 선택한 판단 기준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기 좋은대로 아름답고 잘 생긴 여자를 선택했습니다(창29: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우나 라헬은 아름답고 잘생겼더라(창29:17).

레아를 선택하건 라헬을 선택하건 그것은 야곱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삼상16:7). 그래서 그분은 얼굴이 예쁜 여자보다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잠31:30). 눈에 보이는 정보에 따라 행하는 것은 믿음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후5: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16:7).

호의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으리라(잠31:30).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 동안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잔치를 마치고 신부와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간교한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 속아서 결혼한 야곱은 다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결혼을 무효로 돌리고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 일할 것인가, 아니면 레아를 평생 아내로 사랑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 여러분 중 누군가가 야곱에게 다가가 "이것도 다 주님의 뜻이겠지요." 라고 말하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체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더라도 라헬을 애타게 연모하는 야곱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야곱은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간 더 라반을 위해 일을 하겠다고 자처합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야곱이 레아와 결혼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레아를 미리 그의 신부감으로 점찍어 두셨는데, 야곱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라헬에게 마음을 두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라반을 사용하여 야곱에게 속임수를 써서 레아와 억지로 결혼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중 어느 하나를 야곱을 위해 예정하고 이를 그에게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레아, 라헬이 태어났을 때 보이지 않는 실로 그들을 연결하여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천생연분의 배필로 맺어지게 하는 삼신 할머니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존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이는 것이나 야곱이 그 속임수에 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레아가 결혼한 것은 라반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므로 이 결혼은 무효로 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좋아했지만, 레아 역시 야곱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그녀에게 라헬 대신 신방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을 때 이를 수락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로 위장을 하고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장자의 축복을 받고 싶었던 것처럼 레아 역시 자기 동생 라헬 행세를 하며 야곱을 속여서라도 그에게 시집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유효했던 것처럼,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결혼한 것도 유효합니다.

이제 이렇게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부부가 된 상황 하에서 과연 야곱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야곱은 레아를 원치 않으니까 그녀를 내쫓아야 할까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아내가 음행을 한 적이 없다면 그녀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며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마5:32).

레아가 야곱을 버리고 간음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녀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레아와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라헬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이 좋을까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결혼 제도를 만드실 때 한 남자(a man)가 한 명의 아내(his wife)와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부일처 제도를 만드셨습니다(창2:24). 그러므로 야곱이 레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처제인 라헬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그 상황에서 야곱은 레아를 부인으로 인정하고 자기 아내가 된 그녀를 사랑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록 레아가 라헬만큼 귀엽고 사랑스럽지는 않았겠지만, 야곱은 그녀를 아내로서 사랑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슴 설레는 애틋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이며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황홀한 연애 관계를 깨뜨린 레아를 미워하였고(창29:31), 라반에게 7년간 더 일해 주기로 약속하고 라헬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주께서 레아가 미움 받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수태하지 못하였더라(창29:31).

제 생각에는 야곱이 그때 레아라는 한 여자로 만족하고 그녀를 아내로서 사랑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괜히 라헬까지 아내로 맞아들이는 바람에 레아와 라헬 두 자매 사이에는 반목과 질시가 있었고, 서로 아들 낳기 경쟁을 하다가 마침내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두고 열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르우벤과 빌하 사이에는 근친상간이 일어났고, 배다른 형제들은 서로 시기하고 다투다가 마침내 자기 형제 요셉을 노예로 파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만약 야곱이 레아와만 결혼하면 이스라엘 12지파는 어떻게 생기느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으나, 저는 하나님께서 꼭 네 명의 아내를 두어야만 이스라엘 12지파를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한 명으로도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백성을 만드셨으니 레아가 낳은 여섯 명의 아들들로도 충분히 크고 강한 민족을 만드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라반이 야곱을 속이는 것이나,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결혼하는 것이나, 그가 자기 아내 레아를 미워하는 것이나, 그가 또다른 아내들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가 라헬과 결혼하느냐, 레아와 결혼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자기 아내가 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분명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야곱의 뜻이나 야곱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을 좀 더 오래 부려먹고 싶은 라반의 뜻이며, 그런 속임수를 써서라도 야곱에게 시집가고 싶은 레아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과 레아의 자유의지를 가로막지 않고 내버려두셨을 뿐입니다. 제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야곱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야곱의 뜻 이외에 라반의 뜻과 레아의 뜻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제가 예로 들었던 자매, "결혼을 위해서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형제님을 보여주셨다."라고 하던 그 자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순전히 그 자매의 뜻이었지, 제 뜻도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A 자매와 결혼할 것인지, B 자매와 결혼할 것인지에 대해서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결정을 내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들 자기 중심적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끼워맞추다보니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럴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버리셨는가?",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라고 생각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야곱은 한 여인과 결혼하여 그녀를 일평생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처음에 점찍어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일부일처 제도를 위반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가 다른 아내를 취하는 것을 막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따라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그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란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다 치밀한 계획 하에 정해져 있다고 하는 숙명론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곱은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그 결과 그의 가정 생활이 엉망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그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과 실수까지도 다 수습하셔서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최종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롬8:28). 숙명론자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12 지파를 만들기로 작정하셨다. 이를 위해서 야곱이 12명의 아들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가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도록 예정해 두셨다. 그냥 내버려두면 야곱은 라헬과만 결혼하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은 레아도 야곱과 결혼하도록 라반을 시켜서 야곱이 결혼 사기를 당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자매들이 서로 아들 낳기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야곱이 레아를 미워하고 그녀를 구박하도록 하셨고, 그 자매들이 자기 하녀들도 남편에게 첩으로 갖다바치게 하셨다."고 하고 싶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이미 저질러진 야곱의 실수와 라반의 죄, 사람들의 욕망의 산물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야곱을 속인 것이 아니며,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 아내를 둔 것이 아닙니다.


(2) 요셉의 고난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총애를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통해서 자기가 형제들 가운데서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아버지의 총애와 그의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흉년으로부터 구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풍부한 자원으로 크게 번성하게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번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즉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한 도구입니까?

숙명론자들은 창세 전에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그의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파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의한 것이며, 또한 그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에 의해 집행된 것이며 하나님은 그 모든 죄의 배후 세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런 죄를 짓도록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신 적이 없다고 증거합니다(렘19:5).

또한 그들이 바알의 산당들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로 바쳤나니 그것은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한 바가 아니니라(렘19:5).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것은 그들의 시기심과 탐욕 때문이었지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의지로 요셉을 팔 수도 있었고, 팔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노예로 팔려서 이집트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그분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을 훔쳐다가 상품으로 파는 것을 죄라고 하시며 그에 대해서 벌하시는 분입니다(신24: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훔쳐다가 그를 상품 취급하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도둑을 죽일지니라. 너는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할지니라(신24:7).

어느 누구도 요셉의 형들이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유다가 며느리와 간음을 한 것도,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한 것도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도록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업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일등공신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 기록을 살펴보면,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동생을 노예로 팔지 않았으며 요셉 역시 팔려가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며 그분을 찬양하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요셉은 과거 일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창50:20)

분명히 그 형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셉에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형들이 저지른 악행조차도 사용하셔서 그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일으키는 일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노예로 팔리지 않았더라면 이 하나님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팔리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그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요셉이 팔려가는 비극적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처럼 크고 놀라운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다면, 요셉이 팔려가지 않고 다른 형제들과 화목했더라면 더욱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최적화된 마스터플랜이 이미 나와 있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거쳐가야 하는 인생 경로까지도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나의 이런 죄악된 행동과 부정적인 환경도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이므로 이것은 주의 뜻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죄와 실수를 정당화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3) 모세의 인생 여정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구출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가 40세에 살인자가 되고, 80세에 부르심을 받고, 120세에 죽도록 미리 그분의 뜻에 따라 그의 운명을 예정해 놓으셨던 것일까요?

이집트의 왕자로 자란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동족들의 고난을 돌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여러가지 선택가능한 대안들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자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방법, 자신이 이집트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방법, 백성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고 탈출하는 법,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의 노예 감독을 몰래 해치우는 방법 등... 모세는 자기 형제를 학대하는 자를 쳐서 죽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행7:25).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40세에 이집트 사람 한 명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쳐야 했을까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40년간을 광야에서 살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모세는 광야에서의 생존 전략을 미리 연구하기 위해서 미디안에서 양치기 생활을 했어야 할까요?

만약 모세가 숙명론자였더라면 자기가 저지른 살인죄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내가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 무슨 뜻이 있어서겠지요."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당시에나 그후에도 결코 자신의 죄에 대해 그와 같이 변명하거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서 광야로 도망한 후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신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모세가 스스로 판단하여 저지른 일입니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택하지 않고 죄를 지었지만 그의 죄와 실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무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저지른 잘못까지도 선을 이루는데 사용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그 길이 평탄하고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실수와 약점 때문에 좀 더 그 과정이 길어지고 시간이 지연되기도 하지만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면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지만, 그들이 믿지 않으면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패역한 자들이 다 죽어 소멸된 후 남은 자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거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성취하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집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혹은 체념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신대로 다 알아서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무절제와 방탕에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상황을 선하게 사용하여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충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하며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만약 현재 처한 상황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깨달았을 때 즉시 거기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4) 사도 바울의 선교

사도 바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분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워 땅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네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위한 일꾼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매(행13:47)

그런데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의 선교 방향을 두고 한 가지 선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사도가 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행21:4).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아가보라고 대언자가 찾아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되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했습니다(행21:10-14).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혹시 사도 바울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동족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고 로마로 이송되어야만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물거품이 되어 버릴까요? 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행 선택 여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던 제자들은 결코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를 권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말했으며(행21:4), 성령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행21:11).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을 뿐 결코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거나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 바울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분의 뜻을 가지고 계셨고, 이미 이를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를 신중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루살렘에서나 혹은 다른 곳에서나 주님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일 주님께 순종하며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사는 한, 주께서는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도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수 있고,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떠어떠한 경로를 거쳐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일까?"에 대해서 고민하지 마시고 사도 바울처럼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4.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반적인 예와 성경적인 예를 통해서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선택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성경에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짚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 대표적인 성경 말씀들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고후7: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너희는 음행을 삼가고(살전4: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위에 열거한 구절 이외에도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겠지만, 죄를 미워하고 슬퍼함으로 회개에 이르는 것, 거룩한 분리와 성별된 생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과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반적인 원리보다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원합니다. 내가 어느 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좋은지,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내가 어느 선교지로 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구체적인 부분들을 관광코스 안내지도처럼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느 유원지에 들렀다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떤 유적지를 방문했다가 그 다음에는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채로 우리에게 제시해주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지금부터 너희는 강을 따라 올라가서 하란으로 가고 거기서 머물다가 데라가 죽거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지시한 땅"이 아니라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직 아브람에게 가야 할 여정은 고사하고 최종 목적지조차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는 겁니다(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히11:8)

그런데 아브람이 어떻게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인줄 알고 거기로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그가 매일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눈에 펼쳐진 관광 안내지도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풀어서 읽어야 하는 두루마리(scroll) 성경과 같습니다. 현재 펼쳐진 부분을 읽고 나야만 그 다음 부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통해 가르쳐주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할 때 그 다음 단계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5.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를 구했고(렘42:3),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렘42:6).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갈 길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우리가 당신을 주 우리 하나님께 보내오니 일이 좋든지 나쁘든지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리이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잘되리이다, 하니라(렘42:3,6).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에게 그 땅에 머무르며 바빌론 왕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자,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며 예레미야가 전한 주의 말씀을 부정했습니다(렘43:2). 그들은 애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생각이 없었으며 자기 마음속으로 속인 것입니다(렘42:20).

너희가 나를 주 너희 하나님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해 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대로 우리에게 밝히 알리소서. 우리가 그것을 행하리이다, 하여 너희 마음속으로 속였느니라(렘42:20).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만 하고, 정작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에 순종하지 않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하면서 부지런히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없으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롬12:2)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5:16-18; 눅2:14)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맞춤형 설계도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 그것만이 서리라(잠19:21).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잠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