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매체의 영향력과 현대역본의 관계 / 김재욱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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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별 매체의 변화를 가장 잘 예측했다는 마샬 맥루한(H. M. MacLuhan, 1911~1980)은 방송과 전자 시대를 가장 잘 예측한 탁월한 미디어 비평가이며 매체 이론가였다. 미디어의 발달로 급속히 가까워질 세계를 지칭하는 '지구촌'이라는 개념도 그가 만든 것이라 하는데,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매체는 곧 메시지이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것이라 한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한마디 말에서 생각나는 것은, 항상 마음을 꽉 채우며 부담으로 작용하는 성경의 부패와, 되돌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 권위를 어떻게 알리고 회복할까 하는 문제들이다.
 
' 매체는 곧 메시지이다'라는 말은, 어떤 매체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보다는 매체의 독특한 특성 자체가 사회에 더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쇄술의 발명 후 인간의 감각은 시각적인 것으로 많이 이동되었는데 이런 문화는 많은 것들을 시각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쇄술의 시작을 알린 구텐베르크의 첫 인쇄물은 42행 성경이었다. 인쇄 매체의 나아갈 길과 파급력을 생각할 때 무척 상징적인 첫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한 신문도 각자의 색깔이 있어서, 사람들은 기사 자체의 내용을 파악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신문이 그 뉴스를 냈는지에 더 주목하고 이미 논조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체는 기사나 논설 하나하나보다도 그 존재 자체로 사회에서의 비중이 결정된다. 어떤 언론매체가 사멸되거나, 통폐합 등의 조치로 없어지면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엄청나게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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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물론 담고 있는 내용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모두 중요한 사항들인데, 이것이 하나로 묶이면 매체가 된다.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나 어떤 사본 등등 모두 각각의 매체가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매체 자체가 지닌 특성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스토리 등에서 그것의 영향력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1611 년 5월 2일에 반포된 킹제임스 성경은 제임스 왕의 명령에 따라 순수한 수용본문의 원어에서 번역하였으며, 건전한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하고 수정한 성경인데, 40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용의 수정이 없는 놀라운 성경이다.
 
이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하나의 매체는 그 자체로 온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교황과 영국의 왕이라는 대결 구도에서 나온 이 성경은 그간 성경을 읽지도 못하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틴데일과 같은 이들이 뿌린 눈물과 기도의 응답이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만든 이 성경은 암흑시대의 종말을 알리고 종교개혁과 복음운동의 경계가 되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로마 카톨릭 세력에 가하는 일격이었다.
이 런 매체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것처럼 유일한 창구로 남아 있을 때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친다. 모세가 받은 돌판은 집집마다 가지고 있을 수 없지만 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은 한 단어도 바뀌지 않은 채 집집마다 모두의 손에 들려질 수 있는 엄청난 매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힘을 카톨릭 세력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성경을 숨기고 보고 가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큰 힘을 발휘하자 그 매체의 특성 자체를 허무는 전략을 세웠을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다양한 버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다른 철학, 다른 신학, 무신론, 심지어 사탄적인 생각에서 나온 여러 가지 역본들이 세상에 나오게 됐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은 서서히 변해간다.
 
말씀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번역을 위한 본문도 한 가지가 아니고, 그것도 결국 사람이 선정했구나.
말씀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구나.
시대에 따라 다른 번역을 볼 필요가 있구나.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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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역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세한 것들을 바꾸고, 오역하고, 이교적인 철학과 사탄적인 개념들을 삽입했으며, 의도적으로 핵심적인 교리들을 삭제, 훼손했다. 이런 것들의 문제도 크지만 성경 자체가 하나일 필요가 없다는 개념을 도입해 매체 자체의 영향력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 거짓된 성경들이 나오기 전까지 '성경' 하면 킹제임스 성경이었고, '홀리 바이블' 하면 킹제임스 성경이었다.
그 들의 전략 이후로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의 좋은 성경, 오래된 말투의 옛날 성경으로 전락해갔고, 이제 한국에서는 이단 성경으로까지 인식되는 황당한 세상이 되었다. 교인들에게 인기 있는 것들은 모두 천주교가 변개한 성경들이며, 감히 성경이라고 할 수도 없는 '메시지' 같은 것들은 카톨릭의 관상기도 운동 등을 주도하던 번역자의 이름이 붙어 아예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바이블'로 통한다.
 
이처럼 매체의 권위와 영향력이 파괴된 것은 큰 변화를 초래했다.
목 회자나 기독교 저술가는 자기주장을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증명할 수 있는 갖가지 역본을 골라서 인용한다. 정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답을 만들어간다. 이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역본을 통해 자기 논리를 완성해가는 것이다.
 
교회의 신자들은 신학자나 교단이 추천하는 역본을 골라서 사용한다. 이들은 오류를 집단으로 수용하고 유통하게 된다. 만인 제사장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그들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가 판단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는 수십 년 동안 복역한 늙은 재소자 레드가 출소하여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장면이 있는데, 일하다가 사장에게 화장실을 가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사장이 그를 불러, 화장실 가야 할 때는 말 안 하고 다녀오라고 한다. 레드는 변기 앞에 서서 소변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이제 허락을 받지 않으면 오줌도 안 나온다.'
바로 이런 지경이 되어, 시키는 대로 성경을 선택하고, 의혹이 생겨도 목회자가 괜찮다 하면 넘어가고, 애매하고 이상해도 눈을 감는다. 신학생들도 이런 형편은 마찬가지이다.
 
일반 신자들의 경우, 모르면 몰라서 그런다 치지만, 알면서도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을 보는 이들이 많다. 대체 어떻게 예수님과 마귀를 동일시한 책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말씀을 주셨으며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고 거짓말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며, 자기가 만든 하나님, 자기가 원하는 신을 세워놓고 거기 절하는 사람들이다. 혼자나 망가지지 왜 많은 신자들을 인도해 안락사 시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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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이 한 가지이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것이 매체의 유일성과 성경이라는 책이 지닌 영향력이 파괴된 결과로 나타난 현상들이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킹제임스 성경과 무디와 웨슬리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킹제임스 성경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 경이 한 가지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파되고 말씀에 힘이 있었으며 놀라운 부흥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말씀이 조롱의 대상이 되고 무기력해져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동원되어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을 여러 개로 다르게 주셔서 그런 것인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을 다르게 바꾼 여러 가지 유사품 성경이 나와서 그런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역본들의 영향력 자체를 살펴보고, 그 스토리에 주목해보라.
카 톨릭에 대항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기도가 이루어진 성경과, 그것을 허물기 위해 진화론자이며 무신론자들인 학자들이 비평하고 가위질한 카톨릭 신학의 성경은 같은 목적과 의도를 지닌 매체일 수가 없다. 로마 카톨릭은 왜 이런 유의 모든 성경에 관여하는 것일까? 그들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그 다양해보이는 역본들도 결국은 같은 계열이며 궁극적으로 성경은 두 종류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다면, 어떤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성경인지 맑은 정신으로 판단해 보라.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며 한 입으로 두말하시지 않음을 기억하고, 그분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계 22:18~19)

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옛 사람의 판단.

성경이 가르치는 어떤 교리에 대해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양쪽에서 좋은것을 취하고, 또 둘 모두의 진심을 알아주고, 좋게 알아서 적당히 받아들이면 될 것을
왜이리 논쟁하고, 헐뜯고, 각을 세우고, 내가 맞다 라고만 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을때가 저도 있었습니다.

모두 사랑이 부족한 것 같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둘 다 지켜보며 양쪽에서 좋은 것만 취하고 내가 해온대로,
그저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되겠지... 하며 교리논쟁으로부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위와 같은 판단을 내릴때 이제 성경을 다시 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성경을 확인하는 경우를 제 주변에서는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야말로 양측의 입장 뿐만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입장을 우선 내려놓고, 오로지 그 주제에 대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살피는, 그런 확인 말입니다.


과거에 잠시 짬을내어 양쪽의 입장을 듣고 정말 그런가 해서 성경을 확인해 보았었던 적이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이 역시 어느 한쪽이 근거로 주장하는 성경 구절을 그들이 가르쳐주는 해석법(?)대로 확인해 보고 그럴듯 하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때로 이런 확인조차 할 시간이 없을때는, 그저 양쪽의 주장에 대해

내 자신이 가진 성정과 경험과 인격으로 판단을 내렸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된지 한참 지났을때까지도 이런 식의 판단으로 넘어간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식의 판단이 바로 옛 사람의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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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려면 성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꾸준히 읽는 말씀으로 성장하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로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반복되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3:12-14)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니라.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히브리서 5:13-14)


사실 옛 사람이 가진 인격도 세상이 말하는 의를 따라 좀 다듬어지면 웬만한 상황에서도 좋은 면을 볼 줄 알게됩니다.

경험도 좀 쌓이면 원래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고 좋게 봐 줄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분들의 여유있고 인품있는 모습은 자연스레 밖으로 드러나와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치 장성한 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옛 사람의 경험과 인격과 성정은 모두 옛 사람의 의에 속할뿐입니다.

옛 사람의 인격, 즉 공자와 맹자와 석가모니와 여러 성현들이 가르치는 세상의 의를 따라 키우고 다듬은
이 옛 사람의 인격은 하나님에겐 누더기 걸레와 같은 사람의 의일 뿐이며 성령의 열매또한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경험을 거쳐 부드러워진 인격으로 부터 나오는 그야말로 진국처럼 보이는 것들조차 성령의 열매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따라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이

말씀을 먹고 성장하며, 성령님의 충만을 통해 나의 몸으로 반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위력은 단 한 구절만 제대로 소화해도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정도입니다.
이런 말씀의 권능아래서 성령님을 통해 몸으로 행해지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 내 장막은 깊은 흔적들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흔적들로 인해 비로소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장막을 통해서도 비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를 통해 옛 사람의 인격이 새 사람과 같이 바뀌거나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새 사람만이 자라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함에 따른

행함을 통해 새 사람이 자리를 잡고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것일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내 옛 사람의 갈고 닦인 의도 이제는 누더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새 사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죄를 지을수도 없고 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된 이 새 사람이 드러나는 것은, 여전히 썩어 없어질 몸의 장막을 지닌채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혼이 결단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과거에는 노예의 신분으로 자각하지 못한채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여 내 안에 창조된 새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도록 할 수 도 있고,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아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끔 하는 삶을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선택하여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새 사람의 모습이 나의 몸에 습관으로,

또 깊은 흔적을 남길 정도로 반복되면 나의 선택은 점점 더 쉬워집니다.

그러나 그 연습이 되지 않았을때 나의 선택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길거리의 창녀가 나를 향해 외치며 유혹의 손짓을 할때,
또한 동시에 주님께서 주신 양심이 나를 흔들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길을 걷고있는 나를 향해 외칩니다.

그 가운데에서 여전히 육신을 쫒으려 하는 나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내 안의 새 사람이 성령충만함을 통한 행위를 거쳐 이 세상에 자주 드러날수록 새 사람의 인격은 확고히 자리잡게 됩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이러는 와중에도 옛 사람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옛 사람은 절대 개선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조차 옛 사람을 개선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든 옛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속입니다.

훌륭하다고 칭송받던 크리스천이 부지불식간에 극도로 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앞선 주제로 돌아와 보면, 이제 문제는 옛 사람의 인격이 세상의 가르침과 인생의 경험을 통해 어느정도 성숙했던 사람일수록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며,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아기가 젓을 먹듯 열심히 먹어가며, 새롭게 배워나가고 연구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을 도울때, 자기도 모르게 예전의 착한 성격으로 돕습니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채,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돕는것이 아니라 여전히 예전의 인격으로 돕게 될때가 많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실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는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낼 힘을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해 주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많은 시간이 흘러 자신의 의가 인정받게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 마치 모래집처럼 순식간에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짧은 기간동안에는 제 삼자에게 전혀 그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쉽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그것이 마치 새 사람을 통해 나온 행위인것 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또한 그래서 스스로 조차도 어느 정도 내 믿음이 장성했구나 라고 속게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행위뿐만 아니라 말 한마디에도,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써 내려야할 판단에서조차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채 여전히 옛 사람의 인격을 따라 반복되어 일어나기 쉽습니다. 
 
예전부터 쉽게 어딘가에 깊이 빠지는 것 없이, 
 
또 스스로 잘 알아보면서 따져보고 하는 것들 없이도 비교적 중도?의 길을 본능적으로 잘 택했던 경험.
 
큰 잘못없이 남들이 다 옳다고 하는 길로 나가는데 익숙했던 옛 사람의 판단. 
 
이렇게 옛 사람으로 살아온 긴 세월이 주는 경험은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에 대한 간절함을 귀찮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때, 더욱 쉽게 옛 사람의 경험과 판단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 선택이 비록 평화적이며 온유하게 보여서 주위 사람들에게 여전히 좋은 평판을 들을때도 많지만

정작 그 속의 새 사람은 그런 판단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 사람은 여전히 말씀에 굶주려 있으며 성령님은 억눌린채 옛 사람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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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도(?)처럼 보이는 길을 옛 사람의 인격과 지식으로 선택하며,

성경은 외면한 채 옛 사람의 모습대로 세상속에서 잘 융화되어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나는 성숙한 인격으로 양쪽에서 좋은 것을 취하며 잘 살아가는데,

왜 그리 목소리를 높이며 꼭 그렇게 걸고 넘어가서 분란만 만드냐고 점잖게 한마디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럴때가 옛 사람의 모든것을 내려놓을 때인것 같습니다.
또한 바로 이럴때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뭐라고 하시는지 찾아보고 연구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사랑의 권면

자신을 낮추고 사랑으로 권면하는것을 연습해본 적이 있나요?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누구도 자신의 인격으로 그렇게 한다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그저 자신이 주님앞에 얼마나 죄인인지.
자신이 어떤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인지..
그렇다면 저 분은 나보다 얼마나 더 훌륭한 분인지..

이렇게 바르게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떠올리며 입을 엽시다.

참으로 부끄러운 입술이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사랑이 넘치기만을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게다가..

행여나 내 속에 숨어있던 교만이 조금이라도 섞여들까 조심 또 조심해야합니다.

그리고 권면을 들으시는 분이 즉시 바뀔것이라는 망상?은 피하시는 것도 잊지마셔야죠.

사람이 사람의 말로 쉽게 변하는 존재는 아니니까요.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도와주고 도움받으면서 / 옮긴글

 출처: 가나의 혼인집 ( http://www.cana.kimc.net/ )

한국에 있을 때
아마도 월드비젼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단체에서 저금통을 만들어 나누어주면서 저금통 다 차면 후원금으로 받았습니다.
많은 교회도, 길거리에서도 저금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해의 연말이 되니
무료 호텔 숙박과 세미나 한다고
참여를 묻는 전화에
무슨 비용이 이냐고 물으니
올해 후원금이 넘쳐 행사하고 남은 돈이랍니다.
전화 끝나고 참 허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눌 돈이 아무리 많은들 남을리 없을 것이고
교회의 담임 목사님 부부만 초청을 하는 것이라니
그 숨은 의도가 후년에 더 많이 후원해 달라는 얄퍅한 상술같은 처사가
없지만 푼돈 모아 도우려는 따스한 사람들의 마음이나
코묻은 어린아이의 동전을 모아 그리 한다는 사실에
분하였습니다.

그 후로 여러 정황이나 정보들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그런류의 단체들이 일도 키우고 조직을 늘리려면
스텝들 급여를 비롯해 유지 비용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실질적이 도움을 필요로 시작한 일이 후에는
점점 조직을 키우는 것으로 목표 수정이 되어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드리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순수한 돕는 마음이
무너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누구나 그 실망감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는 후로
단체에 대한 믿음을 포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빛도 없이 이름 없는 나눔으로 방향을 전환 하였습니다.
그 중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제게 좋은 길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돕지 않았고
자신의 삶의 전개 속에서
자신의 역량이 되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해
물질과 시간에 대한 희생을 기꺼이 나누었고
주님이 말씀하신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참조 / 메뉴의 "주님비유"에 올린 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한다는 것(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읻음 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서 이끄신다고 믿는다면
우리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의 도울 자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능력과 한계 안에서 맞는 일로 말입니다.

이미 굳어진 프로그램에 의한 선행은
개인일지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고
또 시간이 흘러 마음과 신앙의 유지를 위해 꼭 해야 한다는 알량한 자기 의가 들어와 앉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순수했던 돕는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
스스로의 의를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상대의 허물에 분해 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돕는 일은 단순히
내 삶에 만나면 외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돕고
1회 성으로 끝날 일이면 1회 성으로
여러 번 할 일이면 여러 번으로 끝내고
또 다른 일을 만나게 하실 주님의 이끄심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 저의 삶을 그렇게 하니 주님께서 자유롭게
끌어 가십니다.
어떤 프로그램에 묶여 도와 가면 다른 도울 일이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 다가와도 이미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외면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쩜 그렇게 정확하게
도울자를 만나게 하시고 그 도움이 그들에게 힘이 되게 하시는지
주님의 일하심을 알게 된답니다.

그 이후로 수입의 십분의 일은 되도록 모아 두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합니다.
누구도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도우려할 때 고개를 저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어려우면 상대의 도움을 감사히 받는 것도
체면을 구기는 것이 아니고
나의 낮아짐도 허용하여야 겸손할 수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아픔도 공감하고 배려하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내가 힘들어
모아 놓은 십일조를 다시 나를 위해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주님이 저에게 책망하실 것 같진 않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신앙용어'에 올린 '헌금의 의미(십일조)'를 꼭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도우면서
주님께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한 몸에 붙은 두 손이 한 손의 일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돕되 얼마만큼 단순하게 돕고,
도움 이후에 도운 일들을 잊으라는 뜻이라고
저는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세도 중요하고
또 도움은 언제나 상호간에
서로의 형편과 상황을 충분히 나누는 교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저 물질이나 시간만 나눈다는 것은
안 하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나
동물들에게 사료 주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주고 받으면서 동시에 정과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감동하고
그 진솔한 나눔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느끼게 되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