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복음에 관한 고민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해보았습니다.

그럴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대부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스스로 경험했던 교회에 대해서,

또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혹은 자신이 알고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선입견들이 복음을 듣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됩니다.

순수한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 이의 마음은 이럴때마다 마치 해결사가 되어야 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사람 불리려고 우리 교회 다니라는 말도 아니고, 헌금 내라고 해서 돈을 뺏자고 하는 말도 아닌...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하고자 해도, 이미 듣는이의 마음속에는 선입견들이 불쑥불쑥 솟아나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설득하려고도 했었고, 얼르고 달래가며 전하기도  했지만 듣는이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 싶어 미리 시간을 내어 열심히 기도한뒤 전해도  듣는이는 냉담할 뿐입니다.

사랑이 없었구나 싶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해보아도 여전히 듣는이는 다른곳만  쳐다봅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요령까지 생깁니다.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준비하는 철저함까지 갖추지만 그래도 듣는이의 마음은 세상의 다른 생각들로 가득차있습니다.

방해가 되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 세련되게 준비된 대답으로 하나하나 넘기며 전해도 듣는이의 마음은 열릴줄 모릅니다.

다시 고민은 스스로에게 돌아와서, 내가 전하는 복음이 혹시 잘못된건 아닐까 점검을 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때 이 내용도 빠뜨린것 같고, 저것도 빠뜨린것 같아 지금까지 잘못 전한 것 같다는 생각때문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라도 잘 전해보아야지 하며 복음을 깊이 깊이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복음으로  풀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찬찬히 흟어보니 이 말씀도 복음이었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저 말씀도 복음이구나  하며 고마우신 예수님께 감사가 흘러나오고

말씀의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저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무지 헤아릴수 없는 이 커다란 주님의 은혜를 어찌 다 전할지 알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복음을 잘 전해보고자 복음에 관한 말씀만 정리해보자며  시작했었는데..

복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전해야 할 말씀이 정리되기는 커녕 모든 말씀이 복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더불어 내 삶의 모든 것이 복음으로 감싸여 있는걸 보게 됩니다.

내  못난 모습들도 주님의 피 아래에 덮여있고 내가 갈 앞으로의 인생도 오직 부활하신 주님이 중보하고 계십니다.

도무지 어떻게 이 한없는 은혜를 전해야 할까요?

그러나 이런 시간동안 어느새  하나님은 저를 조금씩 조금씩 빚어가고 계신것을 깨닫게 됩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점점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점점 더 주님안에서의 평안을 알게하십니다.

감사할줄 모르던 이기적인  마음이 길 옆의 풀만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할줄 알게 되고,

남을 깔보고 제 멋대로이던 마음도 섬기는 기쁨을  알게 하시며 그와 더불어 제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도 깊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설득하려고 애쓰던 제가,

스스로를 먼저 낮게 여기는 저를 보게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해야지 하던 제가,

이미 사랑이 넘치는 마음이 되어있는 저를 보게되었으며,

기도하고 전하려고 미리 시간을 내던 제가,

이미 기도하고 있는 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잘 전해보려고 애쓰던 저는 이제 복음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복음을 도무지 어떻게  전해야 잘 전하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나를 생각치도 못한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셨으니 앞으로 더 복음을 잘 전하는 모습으로 바꾸실 것이라 그저 굳게 믿을뿐입니다.


----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덧붙입니다.

복음의 은혜안에서 말씀을 볼때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구약의 여러 내용들도
죄에  대한 용서라던지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등등...
복음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은혜, 공의 등의 내용을 증거하는  예들로 이해 될 수 있고,
또 다양한 상황속에서 창세기부터 목격할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엿볼수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모든  말씀이 복음이 되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때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죽음과 부활까지 곁들여 설명하며 길게 설명하기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족할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예: 죄의 댓가는 죽음이다..)중 하나에 포함되어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할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부 이야기하며 그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이야기 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자면 끝이 없겠지요.
그래서 처음  복음을 간결히 전할때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구절을 보여주는것으로 족하다 생각합니다.

복음은  나의 말솜씨와 상관없이 기회가 될때마다 선포하는 것이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내가 더 잘 전하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시는 일임을 아시고 계실것이라 생각되지만 글을 쓰고 난뒤에 다시 읽어보니 오해의 여지가 다분히  있는것 같아 이렇게 덧붙여 씁니다.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마음

교회에는 많은 다양한 분들이 옵니다.

우 선은 믿음이 없이 방문하거나,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매주 출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정상적으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분명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들었던것  같은데, 일주일간의 삶은 보지 않아도 뻔할 정도로 멋대로 살다가도 희한하게 주일날은 교회에 와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분들도 보이고,

몇 개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척 보아도 드러날 정도로 탐욕스런 눈빛을 지닌채 몇  달만에 하필이면 수련회 같은 곳에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큰 소리로 주님을 찾는 분들도 보입니다.

일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알 수도 없지만 오랜만에 한번 불쑥 찾아와서는 나름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고는 교제도 없이 휙하니  집으로 되돌아 가는 분들도 계시며, 매우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교회를 다니시던 분이 역시 조용히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도  목격합니다.

게다가 어떤 분들은 서너 달에 한 번 정도씩 교회에 와서는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또 몇 달간 감감 무소식으로 교회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 분들도 계십니다.

지 난 날을 뒤돌아 보면 저 또한 이런 식(?)으로 교회를 다녔던 경험이 있습니다.

몇 달간 열심히 빠지지 않고 다니다가 또  몇 달간 나가지 않거나, 한 두 해 정도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갑자기 다른 교회에 출석해서는 또 몇 달 다니다가 다니지  않고... 갑자기 아무 교회에 불쑥 한 번 가서는 예배를 드린 다음에 사람들과 교제하기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곧바로 집에오는  등등...

그 때를 생각해보면 결국 제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 경을 통해 알수 있는 바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내 머리속 그 하나님의 모습이 전부인양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했었던 모습이었던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평소 사는 모습을 엿볼수록 역시나 내  사는 모습이 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확신했었고
그래서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더 속으로는 떳떳했던것 같습니다.

지 금 되돌아보면, 예수님 덕분에 다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시 허락해 주신 시간들과 여러가지 여건들을
또 다시  거듭나기전의 내것처럼 허비했던 무지하고 부끄러운 시간들입니다.

어쨋거나 그렇게 간신히 돌아선 그 마음들이  가끔씩이나마 저를 교회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교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때의 참담했던 심정의 저보다 더 나을것 없는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고
뻔하고 힘없는 설교에 실망하거나, 도무지 이런식의 예배로는 허망한 마음 한구석이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되돌아  왔었던 기억도 납니다.

어떻게 보면 제 스스로가 이런 시간들을 경험했기때문에,
또 다시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때에 더 다가가서  바르게 하나님을 알려주는것이 옳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그 때의 제 마음을 또한 기억하기때문에 아무도 한 두 마디 말로 그  단단한 마음을 깨뜨릴수는 없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그 끝을 경험하거나 스스로 그  참람한 상황들을 좀 더 확실히 깨달을때에야 그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되돌려지는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오히려  누군가 곁에서 한마디 하는게 오히려 반발심을 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고, 결국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니 그냥 두는것이  돕는것이라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무관심이 돕는것이고 그저 잊지 않고 기도로 돕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 (누가복음 15장  17절-24절)

비록 이 말씀은 문맥상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지만, 이  이야기에 나온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제 마음의 태도를 깊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난 한번이라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나온 분들에게 이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을까요?

정말 그렇게 아끼고 불쌍히 여기며, 이제 다시 돌아왔으니 너무나  반갑게 여기며 껴안고 애정을 보이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 같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왜 가지지  못했을까요?

그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저같은 놈도 구원해주셨는데...
그렇게 어렵게 다시 교회에 나온  그 분들의 마음을 이해한답시고 결국 멀찍이 떨어져서 냉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던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네 것이니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누가복음 15장 31-32절)

그 분들의 평소의  생활이 어떠한지, 교회에 잘 나오는지 아닌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렵게 어렵게 예배에 나온 그 분들을 내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가 나와 항상 함께  계시고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 있으니 이 사랑을 표현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체하셨습니다.

우선  제가 자주 가는 어느 의사선생님의 블로그에서 잠시 인용하고픈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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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분들을  만나다보면 항상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제 병은 체한 게 아닌가요?" 라는 질문입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환자분을 만나면 이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제가 환자분께 반문을 하곤  하지요.

"환자분은...'체했다'라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대개 말문이 막혀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그, 그럼...체했다는 병은 없다는 건가요?" 라는 질문을 하시지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체했다는 병명은 없답니다. 다만, 체했다는 증상이 있을 뿐이지요.
가슴이나 윗배에서  음식이 잘 안 내려간 듯 더부룩하고 미식거리고 속이 아프면 '체했다'라고 표현하시잖아요?
그러니 '체했다'라는 것은 그런  증상을 말하는 것 뿐이고 그 '체했다'라는 증상을 일으키는 병은 수없이 많지요.
위염, 역류성식도염,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급성간염, 췌장염, 담석증, 담낭염,  급성충수돌기염, 위암, 대장암도 그런 증상을 일으킬 수 있고 심지어는  급성심근경색에서도 환자는 '체했다'라는 증상을 호소하고 병원에 오는 경우도 있는 걸요?"

환자분들은 "체"라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체"를 없애기 위해 "체내림"이라는 것도 하러 다니는 것이구요. 저는  그렇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유가 참 궁금했습니다.
누가 이런 얘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걸까?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사전도  검색을 해 봤는데 "체"라는 명사는 따로 없더군요.

그런데 어쩌면 이게 원인이 아닐까..하는 짐작되는 단어를  찾았습니다.
그렇군요. 한의학에서는 "체증"이라는 명사를 쓰는군요.
비록 병명으로는 안 나와있지만 어떤 명사로 쓰는 걸  보면 이게 실존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실제로는 한의사의 탓만은 아닌 것 같은  게...환자들에게 물어보면 일부 약사들이나 응급실이나 개인의원의 의사들도 환자들이 자신의 병명이 뭐냐고 물어보면 "체한  것이군요."라는 성의없는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참..답답한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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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증"에 대한  위의 대화들은 이렇게 알고보니 정말 황당한 대화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화입니다.

저도 살면서 제 친구나 주위의 사람들이 병원에 다녀온 다음 "이거 체한거래.." 라고  답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봤었으니까요.

잘못된 것을 알고 고치려 하는 환자들의 질문에서도,

잘못된 것을 알아내어 고치려 하는 의사들의 대답에서도,

그 원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이런식으로  ...

왜 그런지에 대한 이해와 관심 부족으로 생기는 온갖 주변의 상황들을 하나 둘씩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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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마 항상 눈에 보이는 세상 소식들만 서로 나누며 교제(?)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대화속에서...

매주 교회에서  나누는, 주님안에서의 교제라 여겨지는(!) 예배후의 대화속에서,
가끔씩이라도 우리의 모든 원인되시는 예수님이 등장하면 참  좋겠습니다.

이번 주간동안 새롭게 알게된 주님의 모습과, 나를 변화시켰던 주님의 말씀들과,
자신의 힘든  처지에서도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나누는 기회가 조금씩 조금씩 더 많아지면 참 행복할것 같습니다.

누구나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인정을 하는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에 몇가지 기준들이 있게  마련인데,

언제나 그런 것들을 통해 자신이 생각할때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더 좋은  것을 두고 오히려 다른 것을 선택할 때에도 역시 그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다른 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각자가 가진 의견이 다를때에도 이것이 존중되면 그  사람의 의견도 가치있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게된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내가 볼때 말도 안되는 의견, 주장을 내세울때에도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유에서이건

그것이 현재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그는 그런 입장인 것이지요. 내가 그렇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함께 일을 할때에는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최선이라 여기게 하는지 알아내는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때문에 이것을 최선이라 여기는지 곰곰히 생각해야 합니다.

합의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서로 다를때,

그 사람도 현재 나와 같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상대주의를 옹호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상대주의에 관해서는 C.S.루이스의 "인간 폐지"를 읽어보시길...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 / 김문수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

" 성경 해석이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며, 일차적으로는 본문 내에서의 문법적 해석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살펴보며 역사적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먼저 바르게 된  다음에라야 거기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위의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에 저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분들로부터 얻어들은 내용입니다. 당시 그 분들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들(Bible believer)과는 일부 견해가 다를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문맥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데에는 입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저는 한창 Q.T.를 열심히 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주는 개인적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관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경말씀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개인적 의미(사적인 해석)"를 발견하는데에 몰두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신명기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신명기 26:12에서 아주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개 역: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신 26:12)

그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 신명기  26:12에서 말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한 끝에, "객(나그네)은 하늘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두지 못한 자요, 고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요, 과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지 못한 자다."라는 (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적용을 했습니다.

그 리고 이렇게 묵상을 통해 깨달은 바를 함께 성경공부하던 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이 이런 묵상에 대해 칭찬을 하지는  않더라도 동의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성경 말씀을 "영해"하는 것이라고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 분들의 말에  의하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읽지 않고, 자꾸 거기에 무슨 오묘한 뜻이 있지 않나 영적인 의미만을 찾다보면 결국에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지 못하고 말씀을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맨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일차적으로 본문의 문맥 가운데서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문 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법적 해석

이것은 성경 본문의 문맥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말씀하시면(창 1장, 출  20:11), 그것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6일간의 창조"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셧다고 읽고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6일만에  어떻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느냐? 60만년이나, 6억년이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분명히 "six days"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6일"이라고  이해합니다. 만약 그 기간이 60만년이었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데 60만년이  걸렸다"라고 기록하셨을 겁니다.

요한계시록 20:2~7 말씀에는 한 절마다 한 번씩 "천 년"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히 천년왕국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 역시 문자적으로 천 년이지, 막연히 추상적으로 "오랜 기간"이나  "영원토록"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절에서 "천 년 동안", "천 년이 끝날 때", "천 년이 다  차매"라고 기록하여 그 기간이 유한한 기간으로서의 천 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단어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적 해석은 물론, 시제, 태, 단수/복수 등에 대한 문법적인 검토,  수사법(직유/은유/시적표현), 비유 등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문법적 해석이 반드시 글자 그대로의  경직된 문자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신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은 "성경이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위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며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법적 해석에는 이런 수사적 표현에 대한 고려도  포함됩니다. 즉 성경에 나타난 명백한 비유나 수사적인 표현까지 억지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기대면서 "당신의 가슴은 푸른 풀밭이오"라고 말하면, 이것은 그의 품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지  그 사람의 가슴 피부에 진짜로 풀이 자라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어린 양"(요 1:36)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진짜 짐승입니까? 시편 기자가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시 18:2)라고 했는데, 정말로 하나님이 돌덩어리입니까? 이렇게  문장의 수사법을 고려하지 않는 경직된 문자적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문법적 해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문 법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에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시제나 능동태/수동태, 명령문/수사의문문/평서문,  전체 문맥 속에서 문장들간의 관계 등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단수와  복수 문제

성경 말씀은 단수와 복수를 잘 구별해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3:16 말씀을 통해 직접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씨들(seeds)이라고 하지 않고, 씨(see)라고 단수로 표현하셨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us, our)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셨는지,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는 아홉 가지인데 왜 단수로 사용되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죄(sin)/죄들(sins), 하나님(God)/신들(gods), 주(LORD, Lord, lord) 등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 시제의 문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 많이 내고, 종교의식에 잘  참석하면 나중에 구원을 준다는 이야기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혹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끝난 후에야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 5:24).

요 한복음 5:24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현재 영존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죄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미래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되어도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수동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그것이 이미 완료되어 계속적으로 효력을 미침)고 합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교인들을 일평생 카톨릭 교회에 묶어두기 위하여 구원이란 계속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믿는 자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제에 유의하여 성경을 읽으면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의  구원은 확정적이며,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읽다보면  동사의 어미에 -th, -eth가 붙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고어체 스타일의  표현이라고 싫어하는데, 이것은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에  주의하지 않고 대충 읽고 번역하면 개역이나 한글킹제임스성경처럼 스가랴 3:2을 엉터리로 번역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3) 명령문/평서문/의문문

성경을 읽을 때, 그 문장이  명령문인지,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수사의문문인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종종 설교 시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취지는 저도 이해를 하지만, 문제는 성경 말씀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사도행전 1:8은 "너희는 증인이 되어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한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시고, 우리를 그 분의 증인으로 사용하신다는 뜻이지, 우리가 전도 훈련을  받아서 증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3]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 그 뒤에는 그것이 아무 쓸모없으므로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밑에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세운 도시가 숨겨지지 못하리라(마 5:13-14).

마태복음  5:13-14 역시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라!"라는 명령문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소금이라면 자연히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려고 어떤 노력을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면 저절로 그 환한 광채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어둠을 물리치게 됩니다. 빛은 원래 밝고 퍼져나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들로서 빛날 뿐(ye shine as  lights, 빌 2:15), "빛이 되어라!"는 도덕적 훈화 말씀처럼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반 면 고린도전서 16:13이나 에베소서 5:18은 명령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역시 이를 주께서 주신 명령으로 읽고 이해해야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4) 문맥의 중요성

제가 선교단체에서 활동할  때, 매일 아침 선교회 회원들이 모여서 그 날 묵상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시편 5:6을 읽었는데 하나님은 피흘리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어린양의 피를 즐기셨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가나안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는 것도 즐기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형제들은 부분적으로 뭔가 공감하는 듯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개역과 흠정역으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  ...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5:6)

흠정역: ... 주께서는 피 흘리는  자와 속이는 자를 몹시 싫어하시리이다.

그 당시에는 다들 개역을 사용하던 터라 끊어 읽기를 잘못하면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와 같이 읽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그 앞에 나오는 "주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시 5:5)라는 말씀을 함께 읽었더라면 이런 오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 본문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내용만을  추출하여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There is no God."(시 14:1)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성경에서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된다"(마 13:12)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자기 입맛에 맞게  끼워맞추기 식의 해석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 14:1).

있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서 더욱 풍성하게 될 터이나 없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제가 글을 쓰면서 여러 참고 구절을 인용하거나 종종  전후 문장의 흐름과 맥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문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나 마태복음 16:28에 나오는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   역사적 해석

역사적 해석이란 역사적인 시대나 그것이 기록된 배경과 목적, 수신자, 당시의 생활풍습  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문맥에 맞게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취할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는 다 네 사방의 이교도들 중에서 취할지니 너희는 그들에게서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를 살지니라(레 25:44).

레 위기 25:44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는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왕,  귀족, 평민, 제사장, 노예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제도 속에서 살 때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글자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노예로 사고 팔고 하면 안 됩니다.

레 위기 11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말 것에 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레위기 11:7 말씀에 의해 돼지갈비나 삼겹살은 먹으면 안 되고, 레위기 11:12 말씀에 따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 속 생물들(오징어, 굴, 해삼, 전복...)은 가증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어떤 짐승들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들 짐승들이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연관된 것이거나,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거나, 이스라엘의 더운 날씨에서는 쉽게 부패하고 변질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의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저런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적용되지 않으며, 우리는 디모데전서 4:3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음식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딤전 4:3).

성 경에 나오는 할례나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이지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구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 이것은 나와 너희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의 언약 곧 너희가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킹흠정)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출 31:13, 킹흠정)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각 세대별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고 경영하시는  경륜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어느 세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바르게 나누어서 이해해야 합니다(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역 사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은 누구를 위하여, 어느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어떤 목적으로 기록하셨는지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의 왕국과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다른지, 4 복음서는 수신자와 기록 목적, 배경 등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믿음과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지 등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적 해석 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석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 문화, 기후, 풍습, 제도 등에 대해 공부를 해  두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맛잃은 소금(마 5:13),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요 10장), 친족의  상속재산을 대신 물러주는 제도(룻기 4장), 형사취수 제도(창 38장), 이스라엘의 달력과 주요 명절, 지역별 기후와 특산품,  유대인들의 식사예절 등도 알아두시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동물, 식물 등에 대해서  공부해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래에 나오는 신학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찾는 해석이라기보다는, 그 말씀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3. 신학적 해석

신학적 해석이란,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해석은 다소 복잡하고 사람들마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 기록자가 최초로 성경을 기록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차적인 성경의 독자들(수신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생각해보고, 이에 근거하여 그 말씀이 오늘날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묵상하여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명기 17:18-20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주의 말씀을 필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며 그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내용을 발견하고 마음  속에 성경 말씀을 읽어야겠다는 동기력이 솟아나서 성경을 읽기로 결심했다고 합시다.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성경을 다시 필사해야 할까요? 혹은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해당되는 규례이지 나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왕도  아니므로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하시겠습니까?

문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왕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들이 주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라는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토대 위에서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말씀이 직접 우리를 대상으로 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에게 여러가지 본보기와 훈계를 주기 위해 그 말씀들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0:11).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사도 바울 역시 신명기 25:4에  나오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으로부터 영적인 의미를 찾아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적용하여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딤전 5:18).

너는  소가 곡식을 밟을 때에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신 25:4).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또,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느니라(딤전 5:18).

[9]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  [10]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말씀하시느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고전 9:9-10).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문법적 해석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그 말씀이 기록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나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검토하여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신학적 해석은 그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각자가 개인의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서 여러가지 다양한 묵상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주시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저는 이것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잘못된 해석들

몇 가지 잘못된 성경 해석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문맥을 무시한 해석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가라앉기 시작하며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마태복음 14:30에는 바다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후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죄가 아니라 물에 빠진 베드로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문맥 내에서 특정 부분만 도려내어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비유적 해석

성경 100독 세미나로 유명한 조현주 장로나 이만희가 교주로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비유로 풀이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표적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6:35-44에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명석을 교주로 하는 이단 JMS에서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면 크기가 작아지고 가루가 나기 때문에 절대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비유로  해석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불리 먹었다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고 함부로 비유적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절대 변명할 수 없도록 마가복음 6:43에 "남은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었다"고 기록하셨습니다. 이게 말씀 잔치였다면 "남은 빵 조각"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우리는 남은 빵 조각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생각할 때, 정말 그들이 실제로 문자 그대로의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비유적  해석을 할 때에는 주의를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유적 해석이 다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6]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마 10:5-6).

마태복음 10:5-6에  나오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양들(sheep)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53:6 말씀을 읽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은 당연히 비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3)  문법적, 역사적 해석 vs 상징적 해석, 영적 해석

저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언약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과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계 7:4).

그 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더라.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아무도 능히 그 노래를  배우지 못하더라(계 14:3).

요한계시록 7:4에는 이스라엘 자손 중 봉인된 자가 14만  4천명이며, 14:3에는 구속받은 자가 14만 4천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을 들고 와서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14만 4천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네들만 구속받은 무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도 수는 이  숫자를 넘으면 안 되나 봅니다. 이런 이단의 주장에 대해 조언을 구하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  구원받는 사람이 14만 4천이면 그 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00명이라도 그 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명이라고 해도 그 중에 네가 들어가 있다고 믿어라. (성경 말씀에 근거한 답은 안 해주고 구원의 확신으로 밀어부치라는  이야기입니다.)

- 14만 4천은 상징적인 숫자다. 3은 하나님의 수, 4는 세상의 수, 두 수의  곱은 12로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지파, 열두 제자를 나타낸다. 12의 제곱은 144이며 여기에 1,000을 곱한 것이 14만  4천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상징적 해석입니다.)

"그런 데 분명히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14만 4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이는 어거스틴이나 칼빈에게서 나온 언약신학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르우벤, 영적인 유다, 영적인  시므온, 영적인 갓, 영적인 아셀은 누구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구속받은 자를 말한다. (다행히  문자적 해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 말고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 계 7:9에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바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통과하고 나옵니까?(계 7:14) 살전 4:16-17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이미 다 휴거되어서 큰 환난을  겪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요."

(대부분 여기에서 말문이 막힙니다만, 간혹 다음과 같은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며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믿지 말고 열심히 잘 믿어야 하고, 등잔과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하고, 끝까지 견뎌야 하고..."(이하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요 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속받은 이스라엘 자손 144,000명"에 대해서 상징적 해석을 하여, 예수님을 믿는 신약교회 성도들이 곧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라고 주장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기에 거론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들은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믿고, 그 숫자도 실제 숫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방식을 나누지 않고, 믿는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라고 영적 해석을 해 버리면, 우리 성도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 의해 휴거도 되어야 하고, 또한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므로 대환난도 통과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중으로 들림받아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과 휴거된 성도들 머리 위로  대환난이 쏟아진다"라는 새로운 엉터리 주장을 늘어놓거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적용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4)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한 상징적 해석의 실례

아래 인용문은  이전에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이진락 형제님께서 쓰신 내용입니다. 지금은 아마 목사님이 되어서 교회 성도들을 섬기고  있을 겁니다.

"이제 잘못된 성경 해석의 실례를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 번 봅시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고, 여리고는  세상입니다. 교회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강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여리고로 내려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 만약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었다면-죄악에 물들었다면, 포도즙과 기름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피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예수의 피와 성령으로 치료를 받아서 우리 영혼의 상처를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잘 치료 받으려면 데나리온  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입니다. 또 더욱 더 심하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강도 만난 자를 태우고 가는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복음서라는 짐승을 타고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부  단어는 흠정역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알려주시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맥과는 전혀 무관하게 해석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나 그 말씀을 들은 율법사의 반응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비유나 상징으로만 해석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 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우리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기록하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 말씀 속에 무슨 다른 뜻이 있거나, 감추어진 신기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를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다 보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각 시대별로, 각 수신자 집단별로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말씀들에 대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연구해야 하며,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출 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2252&page=3

말할 수 없이 큰 은혜

은혜가 은혜가 되게하시려고,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시려고,

오직 믿음만을 보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주님.

죄 많은 내 몸에 붙어있는 두눈이 악한 나는 보지 못하고
자꾸만 형제를 보며 자매를 보며 그들의 자그마한 실수를 찾는다.

악 한 나를 구해주신 은혜가
행여나 내가 행한 걸레같은 선행으로 더럽혀 지지 않도록
오직 믿음으로 날 받아주셨고

쓰 러졌다 손가락질 하며 비웃던 그 형제도 하나님께선 직접 받아주셨다.

은혜로 살아난 내가 어떻게 살까..

자 꾸만 쓰러지는 나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만 보며,
주님 말씀따라 죽어도 주를 위해 살아도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먹 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 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의 서거나 넘어짐이 자기 주인에게 달려  있은즉 참으로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서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

어떤 사람은 한 날을 다른 날보다 귀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확신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며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때문이요, 먹지 아니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드리나니 이는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기 때문이라.

우 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일어나사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 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임이니 그 까닭은 기록된바,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굴복하겠고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기  때문이니라(로마서 14:3-11)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것들

가끔씩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우 선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옷과  집을 만든다.
이에 딸린 산업들이 꽤 여러가지다. 특히나 옷과 집을 만드는데에는 많은 산업이 맞물려있다.
나사 하나를  만드는것, 못 하나를 만드는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근본적인 의식주에 관련된 산업을 생각해보니 거기에 전기와  수도등의 기반에너지 산업도 맞물려 있다.

또 뭐가 있을까?

물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겠지..

..




이렇든 저렇든...

사람들이 모여서 저마다 인생의  시간들을 쏟아붓는 많은 것들중 의외로 많은 부분은

정말 공허한것에 쏟아붓고 있다는걸 알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 침  e-스포츠 라는 말을 신문에서 읽고 e-스포츠의 행사장에 무려 10여만명이 모였다는 기사에 생각이 더 많아진다. 행사 지역  자치구에서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이는 만큼 잘 육성해서 돈벌이가 되는 행사로 만들예정이라는걸 듣고서는..

사람들 이 모여서 하는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것들중의 반만이라도 좀더 의미있는것들에 사용할수 있다면  좋을텐데.


언젠가 비오는 창밖을 보면서 단 하나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 결국 내 모든 인생의 다른 어떤일들보다  훗날 중요하게 여겨지리라는걸 깨달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담과 이브

우연히 아담과 이브에 관련된 글을 읽으며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볼까합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창조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때
아담에게 이브는 유일한 동료이자 자신을 돕는 이였습니다.

더구나 이브는 하나님이  정하신 베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브는 자신의 갈비뼈에서 나온 그야말로 '뼈중의 뼈' 이기도 했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이브의 존재는 얼마나 큰 선물이자 기쁨이었을까요?
이브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아담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지만 아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어렴풋이나마 아담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것도 같습니다.

아담에게서의 이브라는 존재감 만큼은 아니더라도,
거듭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다보면 반드시 동료가 생깁니다.

때로 그 동료는 하나님이 내게 준 커다란 선물같이 느껴질수도 있겠습니다.
평 생을 같이 할 아내 혹은 남편도 역시 믿음의 동료요 남은 인생의 귀하디 귀한 동역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브를 통해 죄를 선택하였습니다.
사탄은 이브를 통해 아담에게 죄를 제안하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참 많은 것들을 같이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에덴을 같이 거닐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즐거워  했을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여 먹을것으로 주신 과일들과 각종 신선한  야채들을 먹으면서 또 하나님과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까요?


아마 사탄은 하나님과 이미 깊은 교제를  나누는 아담에게 직접 다가가서 유혹하는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잘 알고 있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이브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이브야 말로 쉽게 유혹에 넘어올것 같아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브는 그 애틋한 마음 만큼이나 큰 약점일수도 있다는걸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여전히  있을것이고 이러한 첫번째 성공의 사례에서 사탄은 두번째 세번째
아니, 세대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동일한 전략을 이리 저리  보완하여 결국에는 사람의 약점을 파고드는 속이는 자의 아비로서 그 실력을 갈고 닦았을겁니다.


저와 아내는  가끔씩 이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역자로서 힘이 되기는 커녕 서로를 지치게 만들고 서로를 방해하는 모습일때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한 사람이 말씀을 읽기 귀찮을때 옆 사람도 말씀을 읽지 못하도록 자기도 모르게 방해하고 있는  모습을 깨달을때도 많습니다.

굳이 부부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같은 교회 내에서 혹은 같은 믿음의 모임에서 얼마나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겠습니까?

내가 아담의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 전해듣고서도 아담처럼 스스로 죄를 선택한다면 아담의  이야기는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것이 될것입니다.

또한 그때의 이브처럼 사탄에게 속은채로내 곁에 있는  아담에게  죄를 권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나의 죄가 눈덩이 처럼 불어나도, 주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커져가니

내 존재가 얼마나 염치없으며 주님의 바다같은  은혜는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인내를 보여주시며, 때마다 꼴을 먹이시니

이때가  비로소 회계할 때요, 죄를 끊어버릴 때요, 주님께서 받아주실 때입니다.


아...

바람을 쫓던  모든 일들이..

주님을 높이며 즐거워하는 한 곡의 찬양보다 더 못났었음을 고백합니다.

아담과 이브 (2)

아담과 이브가 처음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 하였을  때를 살펴 보았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죄를 지은 다음 눈이 열려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을 가리기위해 앞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 와 비슷하게 저도 원래의 모습을 가리고 싶고 혹은 숨기고 싶을때를 기억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다음 드러난 벌거벗은 모습을  서로에게 숨기는 모습은 지금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죄는 항상 숨기는걸 동반합니다.

누군가에게 정말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내가 숨는걸 원할때 아담과 이브의 앞치마를 떠올릴것 같습니다.


아담과  이브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을때가 있었습니다.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세기 2장 25절)

내가 죽었고 내 안의 예수님께서 사신다면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을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서로 먼저 드러내는 연습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너 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야고보서 5장 16절)

가을

어느덧 가을입니다.

여름이 왔구나 하고  잠깐 더위를 식힐때쯤 이미 가을이 와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사계절 이 뚜렷하지 않은 나라에서 지낸 시간만큼 오랫동안 쌓은 경험으로,
짧았던 여름을 아쉬워 하기보단 겨울생각을 하게됩니다.

스잔한 바람도 불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을 느끼면서, 처음 도착했던 Augsburg 의 길거리에서 맡았던 겨울 냄새도  생각납니다.

또 한번의 가을속에서 되돌아봅니다. 신앙적으로 난 성장했을까요?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아내가 아플때에서야 기도하는 내 모습이 너무 조그맣게 보입니다.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앞으로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올 겨울에는 내 아내를 더 꽉 안아주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형제님들 자매님들 사랑하는  법도 더 배워야 겠습니다.

전문가

인터넷을 통해 즐겨보는 한 블로그에서 '희떱다' 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옹골지다' 라는 단어의 반대말쯤 되는 말이란다.
겉으로는 화려하면서도 속은 텅 빈 것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블로거는 이 단어를 소개하면서 이런 비판을 한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을 묘사할 단어로 제격이다. 이들은 글을 써도 ‘희떠운’ 용어나 추상어들을 주욱 나열하는 게 잘 쓰는 글인 줄로 착각한다.  어느 이슈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써도 결국에 가서는 무슨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헤지’(주:  헤지(hedge)는 울타리, 장벽, 방지책이란 뜻이 있다)한다. 이 또한 희떱다. 그렇다면, 소위 ‘논객’이라는 인간들은 낫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파티즌(partisan)’이다. 이들의 논리 또한 희떱다. 남 욕을 잘하지만 정작 내놓는  것은 없다. 이런 사람들이 주절거리는 소리에 자주 노출되면 지적 인슐린 저항에 빠지기 십상이다. 일단은 배가 찬 듯한데 금방  꺼진다. 그 후에는 더 강한 뭔가를 원하게 된다. 악순환이고 중독이다'

이 블로거는 소위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과  일반인들의 상식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가 있는 점을 문제로 들면서 또 이런 말을 한다.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가서  특정 분야에 대한 공부를 전문적으로 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 사람은 의무교육만 받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세상 돌아가는  것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내가 왜 이런 내용의 글을 인용하느냐면 이 블로거의 생각에서 이번에 글을 쓸  주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영적인 부분에는 과연 전문가 혹은 지식인이 있는가? 있다면 영적인 일반인의 상식과 영적인  전문가의 지식 사이에 얼마만 한 괴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크리스천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12월의 끝이 다가오면서 점점 더 우리 교회의 회지인  '젊은 청지기들'에 올릴 글에 대한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위에 인용한 글을  읽고서는 이렇게 영적인 부분에 빗대어 생각하게 된다.

영적인 전문가 중의 전문가인 혹은 '였던' 사람이 누가 있던가?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나님이기도 하시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어떻게 영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설명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하면 수많은 비유가 먼저  머리에 스쳐지나간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대부분의 사람은 깊은 학문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수많은 비유가  그렇게 쉬운 비유들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성경을 좀 더 살펴보면 그 쉬운 (비유를 통한) 말씀의 이유가 듣는이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다.

대표적인 영적 지식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을 앞에 두고도 예수님은 소위 말하는 청중의  수준에 맞는 수준 높은 영적 대화를 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이 고차원의 대화를 원했다면 아마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셨던  예수님은 아마 그들이 생각하는 고차원이란 게 얼마나 희떠운 수준인지 아주 알기쉽게 설명해주셨을지도 모르겠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너무 어렵거나 공부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들이란 없다.
때로는 적절한 비유로, 때로는  대놓고 하시는 직접적인 말씀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래서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누구나 영적인 일들을  쉽게 알 수 있게 하셨고 그래서 그토록 많은 무리가 주님을 쫓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이 전한 영적인 지혜들이  그렇다면 원래 너무 쉬웠던 것이었을까. 원래 쉬운 주제여서 쉽게 전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자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어리석어 무시해도 될것처럼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깊이깊이 깃들여있다.

다 만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지나면서 처음에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 그 복음에, 소위 영적 전문가들이라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심 오하고 어렵다는 철학과 과학, 그리고 자신의 얕고 얕은 경험적 지식을 덧씌워 치장하다가
결국 기독교의 진리가 굉장히  어려운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려해도, 그 진리의 복음의 핵심을 먼저  전하기보다는,
적절한  대화술과 상대방의 거부감을 줄이기위한 심리학적인 도구들과 화려한 추상적 미사여구를 먼저 생각하느라고
복음은 어느새 한쪽  귀퉁이에  몰려 들리는듯 마는 듯 언급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다만 복음으로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 땅에서 저마다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 영적인 지식,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으로 자라나게 되는데 이때에도 소위 영적인 전문가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방해받을때가 있다.

참 단순하고 쉬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면 될 것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하다보면 온갖 이유와 핑계와 그럴듯한 논리등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이런 온갖 것들을 말했던 (소위 권위있다는) 선생들이 주변에  쌓여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일부 영적인 전문가들은 권위있는 선생들의 그 높아보이는 위상에 취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런류의  핑계들을 전달하는 또 하나의 선생이 되어버리고 만다.

전문가라면 정말 옹골진 전문가답게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알기쉽게  진리를 전해야 할 것이고,
갓 태어난 아기라면 아기답게 철학같은 어두운 골짜기에서 찾아낸 핑계들을 선생으로 쌓아놓는데  급급하지 말고 오직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으로 아멘할 일이다.

기도와 금식/김문수

이 글은  www.keepbible.com 의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을 옮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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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21, 개역) (없음)
(마 17:21, 킹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마 17:21, KJV) Howbeit this kind 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막  9:29, 개역)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킹흠정)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런  종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KJV) And he said  unto  them, This kind can come forth by nothing, but by prayer and fasting.


이미 앞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는 금식 기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폄하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께서도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는 마 17:21과
막 9:29 말씀을 통해서 악한 영적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금식하며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한 집회  때마다 "금식"을 했으면서도 하나님께 책망을 들은 것은 그들의 마음 자세와 삶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 28:9, 킹흠정) 사람이 자기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식을 하건, 철야를  하건, 금식기도를 하건 새벽기도회를 하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5:7, 킹흠정)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예 수님이 계시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동기로 금식을 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서   책망하셨습니다.

(마 6:16, 킹흠정) 또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금식" 그 자체는 어떤 신비한 힘도, 주술적인 효능도,  영적인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금식 자체에 능력이 있는 거라면, 상황이 어떠하거나 개인의 삶이
어떠 하거나 영적 상태가 어떠하거나 간에 금식은 항상  같은 효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했지만 오히려 책망을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하며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금식 기도를 외면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금식 그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것 다 팽개치고 무조건 머리띠 동여매고
밥 굶으면서 요구조건  들어줄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단식 투쟁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개역성경을 사용하시는 분들은 금식기도의 중요성을 말씀에 근거하여 주장하기가 참 힘듭니다.  마태복음 17:21을

인용하면 좋겠는데, 개역 성경에 그 구절은 "없음"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고 막  9:29을 인용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그들의 성경에 "금식"이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없습니다. 결국  킹제임스성경을 인정하기 싫어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마태복음 17:21의 난하주에 있는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인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용을 할 때에는 제대로 번역해서 인용해야 합니다.

(마   17:21, 바른)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가  있음.
(마   17:21, 개정) (없음) /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
(마   17:21, 개역) (없음) /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
(마 17:21,  공동)  ㉠(없음) / ㉠어떤 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마귀는 기도와 단식을 하지
않고서는 쫓아낼 수 없다."
(마 17:21, 가톨릭)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마 17:21, 현대인) (그러나 이런 귀신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마  17:21,  현대어) ㄷ) (없음) (ㄷ. 어떤 사본에는 21절이 `이런 병을 기도와 금식 외에는 고칠 길이 없다'로 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본에는 21절이 빠져 있다)

"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마귀는 기도와 단식을 하지 않고서는 쫓아낼 수 없다"
" 이런  귀신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이런 병을 기도와 금식 외에는 고칠 길이 없다"

이런 번역은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기도와 금식을 하면, 즉 금식기도를 하면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해서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선 한 가지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금식기도가 마귀를 쫓아낸다면, 기도와 축사가 같은 겁니까?  그러니까 금식을  하면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 앞에서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쫓아내는 행위)하면 마귀가 떠난다는 겁니까?

그런데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는 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라고 하는 겁니까? 이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대학 다닐 때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단체를 두 군데 보았습니다.
하나는  총기독학생회(그 당시에는 종교를  가장한 운동권 단체였음)인데 구국기도회를 한다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OOO 정권은  회개하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아멘" 합니다.
또 한 단체는 CBA(베뢰아아카데미)인데, 중얼중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하다가,
느닷없이 "귀신아  그에게서 썩 나오느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하 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에게 "회개하라"고 하지를 않나, 하나님을 향하여 "귀신아, 나가라"고 하지를 않나,
도대체 이게  무슨  망발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보고 한 말이라구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기도한
내용은 마귀에게 기도한  겁니까?

만약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라는 말이 마귀에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마귀에게  말 걸고 마귀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너무 사소한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금식기도와  축사를
혼동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겁니다.

마 15:22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의 간청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행 16:18에서 바울이 어느 소녀를 사로잡고
있는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나오게 하는 것을 축사라고 합니다.

(마 15:22, 킹흠정) 보라,  어떤 가나안 여자가 바로 그 지방에서 나와 그분께 소리 질러 이르되,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나이다,  하나

(행 16:18,  킹흠정) 여러 날을 이같이 하거늘 바울이 근심하여 몸을 돌이켜 그 영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령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오라, 하매 그가 그 즉시 나오니라.

금식기도와 축사는 다릅니다. 성경에 금식기도로 마귀를 내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게 다 성경이 저렇게 번역되어 있으니, "금식 기도를 해야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성경에는 "금식기도를 해서", "금식기도에 의하여",  "금식기도로" 가 아니라, (사람이나 금식 기도가 주체가 됨)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금식 기도는  수단이 됨)

우리 주님께서는 마 17:21과 막 9:29 말씀에서 악한 영적 존재를  물리치는 것은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1) 와(and, kai)

위의 마 17:21과 막 9:29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도 "와" 금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금식이 단독으로는
의미가  없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I ate bread and butter.

위 문장을  "나는 빵과 버터를 먹었다"로 읽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버터바른 빵"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prayer and   fasting 이란,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귀를 내어쫓는  것은 금식의 힘일까요, 기도의 힘일까요?

금식은 자신의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고, 잡념을 버리고, 기도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줄 뿐, 그 자체로서는
마귀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마귀가 굶주린 사람 앞에서는 약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굶주려 있을 때 시험하려고
했 습니다. 하나님이  밥 굶은 사람의 목소리는 더 잘 들으실까요? 밥을 굶고 자기 몸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중요한 것은 금식이 아니라, 기도, 즉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회자들, 기도원장들 이런 분들이 성도들에게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바르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칠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이 금식을 기뻐하신다느니, 금식하면 마귀가 떠나고, 결박을  풀게  되고,..."
등과 같이 성경에도 없는 금식의 효능에 대해서 소개하거나, "금식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물과 소금을  챙겨라,
기간은 며칠이 적당하고, 변비 문제와 몸에서 냄새나는 것은 이렇게 해결하고, 금식 시작할 때에는 뭘 먹고,
금 식 끝나거든  보식으로는 무슨 죽이 좋다"는 등 금식하는 요령이나 가르치고 있으니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초점은 금식의 효능이 아니라, 기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를 전념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2)  통하여(by, en) - 수단, 도구를 의미함.

금식이 그 자체로는 효험이 없고,  기도와 합쳐져야 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두 가지가 합쳐진 "금식 기도"에는
뭔가 특별한 효험이  있는 것일까요? 즉, 일반  기도 말고 두 가지가 합쳐진 "금식 기도"는 다른 기도들보다 효험이

있는 것일까요?

기도가 효험이 있느냐, 혹은 금식기도가 효험이 있느냐 하는 질문은 그렇다고 해야 할 지, 아니라고 해야 할 지

참 망설여지는 질문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답변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글로 표현하자니 전달에 한계가

있어서 혹시라도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제 가족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화요일(7월 21일)에는 유치원에서 캠프를 가기로 예정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내내 일기예보에서
월, 화 이틀간  많은 비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유치원 선생님들도 다들 걱정했습니다. 아내가 날씨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두 아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일기예보와는 달리 캠프 당일 화창한 날씨가 되어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일기예보만 믿고 다른  유치원들에서 모두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모든 시설물을 전세 낸 것처럼 독점하여
사용하고  여유있게 관람하고 왔다고 하네요.

아내가 고맙다며, "얘들아 이게 다 너희 기도 덕분이야"라고 말했고, 아들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효력을 발휘했다며
좋아했습니다.  아내가 아들들에게 기도의 동기력을 심어주기 위해 한 말이기 때문에 면전에서 틀렸다고  따지지는
않고, 넌지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  덕분이야"라고 말하고 그쳤습니다.

자, 세 남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위해서 "합심 기도"라는 것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세 남자의 합심  기도가 장마전선을  물러가게 하고, 화창한 날씨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기도 덕분입니까, 합심기도 덕분입니까,  새벽기도 덕분입니까?

어떤 분은 "예"라고 하실테고, 어떤 분은 "아니오"라고 하실  건데, 둘 다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정답은  "아니오" 쪽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면, 아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민 20:10,11, 킹흠정) 모세와  아론이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 /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크게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하 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게 말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반석을 쳐서 물이  솟아나게  했습니다. 거기에다 모세는 마치 자기들이 물을 주는 것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을 내세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았지만, 또 잘못된 태도로

능력을 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준 것은 모세일까요, 모세의 지팡이일까요, 반석일까요?

셋 다 아닙니다.
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신 겁니다.

저와  아들들의 합심 기도가 비를 그치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분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금식 기도가 마귀를 쫓아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귀를 쫓아내  주십니다.

일반 기도보다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금식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오른팔을 움직이는 가느다란 신경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 기도가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이런 종류(악한 영적  존재)가 나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능력, 금식기도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그 능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기도는 그 분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관계를 나타내자면 이렇게 되겠네요.

능력의 원천 =  하나님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 = 기도
기도에 전념하도록 도와주는 수단 = 금식


2.   금식의 의미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음으로 금식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밥 굶는 금식, 사람들에게
보 여주기 위한 금식, 금식과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제가  앞의 글을 통해서 "금식"에 대해서 경계하는 글을 쓴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금식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 자체에 효험이 있다거나, "금식을 하면 하나님이 빨리 응답하신다"거나,
금식을 마치 문제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처럼,  혹은 주술  행위처럼 여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만약 금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에는 금식 기도 이외에, 굵은 베옷을 입고 기도하는 것, 옷을 찢고
기도하는 것,  머리에 재를 뿌리고  기도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도 한 번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최근에는 "야베스의 기도", "다니엘 기도"가 유행인  모양인데  누군가가 "베옷 기도", "찢어진 옷 기도",
"재투성이 기도", "눈물병에 눈물 모으기" 등도 만들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그 기도의 본질을 무시하고 외면만 베껴서 따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명령과 인간적 교리를 따르는 것이며,
"의지대로  경배하는" 행위에 속합니다.

실 제로 약 10여년 전, 저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던 목사님네 동네에 이상한 교회가 하나 들어섰답니다.
이름하여 행주치마 교회,  이  교회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갈 때 남자나 여자나 모두 앞치마를 하나씩 두르고 간답니다.
앞치마에는 각각 영력의 정도를  나타내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답니다. 예를 들어, 그 앞치마를 입고 30일 새벽기도회에
하루도 안 빠지고 나오면 교회에서  "30일 새벽기도회 출석" 이라고  써 준다는 겁니다. "100일 작정기도 앞치마",
"3일 금식기도 앞치마"도 있고, 제일  센 건 "40일 금식 기도 앞치마"라고 합니다.  이걸로 뭘 하느냐구요?

(행  19:12, 킹흠정)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질병들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악한 영들도 그들에게서 나가더라.

성경에 사도  바울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대면 낫는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자기들도 말씀대로 따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벼운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3일 금식기도 앞치마"를 던지고, 그걸로 병이 안 나으면 좀 더
레벨이 높은 앞치마를 쓴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유희왕 카드나 슈팅바쿠간 카드로 공격력, 방어력, 마법력을
비교하여 누가 더 센가 시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그  앞치마를 착용하고 금식기도를 했으니까,
철야기도를 했으니까, 100일 작정 기도를 끝냈으니까,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덕을 쌓았고, 그  영적인 파워가
앞치마에 축적되어 있다는 겁니다.

너무 어이가 없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금식 기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런  사람들처럼 "금식 기도"를 주술 행위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일반 기도보다는
"3일 금식기도"가 낫고,  "3일 금식기도"보다는  "40일 금식기도"가 더 영험하고, 그것보다는 "일천번제 기도"가
더욱 큰 능력이 있다고 믿는  자체가 미신적 행위요, 주술적 행위라는  겁니다. 여기서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라는
판단의 기준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한 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일반 기도보다 금식  기도가 낫다고
믿습니까? 왜 3일 금식기도보다 40일 금식기도를 더  높이 쳐 줍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보다 더 지극한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는 겁니다. 내가 "공덕"을 쌓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감동 먹으라고 내가 율법적 행위를
더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자랑스럽고, 당당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도
빨리 주시고, 문제도 잘 해결해 주실  거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금식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셨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금식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경 말씀을 통해서 금식이 기도 생활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은  번역에 일관성이 있어서 특정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쉽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성경에서 KJV 역으로 prayer, fast  두 단어가 동시에 들어가는
구절들을 찾아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  17:21, 막 9:29을 제외하고도 다섯 구절이 더 있습니다.

각각의 말씀에서 금식을  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이 단순히 밥을 굶는 게 아니라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식 기도에는
어떤 것들이  수반되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① 금식을 하면서 주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

(시 35:13, 킹흠정) 나로 말하건대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고 금식하며 내 혼을  겸허히
낮추었더니 내 기도가 바로 내 품에 돌아왔나이다.
(시 35:13, KJV) But as   for me, when they were sick, my clothing was sackcloth: I humbled my  soul  with
fasting; and my prayer returned into mine  own  bosom.

② 죄를 자백하고, 낮아져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약속의 말씀을  주장한다.

(단 9:3, 킹흠정) 또 내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주  하나님을 향하여 내 얼굴을  고정하고
기도와 간구로 구하니라.
(단 9:3, KJV)  And I set my face unto  the Lord God, to seek by prayer and  supplications, with  fasting,
and sackcloth, and ashes:

③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며, 섬긴다.

(눅 2:37,  킹흠정) 과부가 된 지 팔십사 년쯤 되니라.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더라.
(눅 2:37, KJV) And she was a widow  of about  fourscore and four years, which departed not from the  temple,
but served God with fastings and prayers night and  day.

④ 참고 절제하면서 기도에 전념한다.

(고전 7:5, 킹흠정)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그리하는 것은 예외이나 다시 함께하라. 이것은 너희가 참지 못함으로 인해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7:5, KJV) Defraud ye not  one the other,  except it be with consent for a time, that ye may  give
yourselves to fasting and prayer; and come together  again, that Satan  tempt you not
for your incontinency.

성경에서 금식과 기도라는 단어가 같이 사용될 때에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으로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겸손히 주와  함께 동행하며, 자신의 욕심을 제어하는 삶이 수반됩니다.

금식은 그 자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효능이 없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욕심을 절제하고  기도에만 전념하도록 하며,  더욱 주님만을 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생활에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금식을 했기 때문에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의 기도를 보십시오. 다니엘이 굶어가면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낮아진 마음 자세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얼굴을 주께로 향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금식했기 때문에"로 해석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제가 다섯 구절이 더 있다고 했는데, 하나가 빠졌지요?

⑤ 금식기도를  하고서도 하나님께 좋은 말 못 듣는 사람도 있다.

(눅 5:33, 킹흠정)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또한
그리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까? 하매
(눅 5:33, 킹흠정) And  they said unto him, Why  do the disciples of John fast often, and make  prayers,
and likewise the disciples of the Pharisees; but  thine eat and  drink?

여기서 "그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눅 5:30).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투덜댔습니다.

"나는 금식하는데, 너는 왜 하지 않느냐?", "나는 그대보다 거룩해.", "다른 사람들 다 하니까 너도  금식기도해라."

만약 금식기도를 하면서 위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은 태도를 품고  있다면, 금식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금식 기도를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는  것을 보고 다들 놀라고,
주님을 시기했습니다. 자기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능력있게 행하시니까 놀라고 시기하는  겁니다.
금식기도 자체에 능력이 있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께
책 망을 들었을까요?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의 제자들도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십니까?"
그들의 말에 나타나 있듯이,  그들의 금식은 모두 자기 만족과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지, 자기 마음을 낮추고
주님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물을 사랑하고, 외식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했지,
그 마음과 삶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금식기도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한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기도가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나, 자기 만족을   채우고,
자기 의를 쌓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금식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능력이 있으며,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 분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끊고 기도한다고 해서 능력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면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의 욕심을 제어하며, 기도에 전념해야만
그 금식이 기도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낸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그 백성들에게 능력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이었듯이,
우리 능력의 원천은 금식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내가 금식기도를 했더니", "내가 100일 작정기도를  했더니", 이런 간증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 의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주의해야겠습니다.

덧 붙여, 체질적으로 한 끼만 굶어도 힘을 쓰지 못하는 분들은 굳이 금식기도를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금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에 의해서 제한받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 역시 금식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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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www.keepbible.com 의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을 옮긴것입니다.

안한 것과 못한 것/김문수

이 글은  www.keepbible.com  의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을 옮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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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는 오랜 기간 한글개역성경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그 문체와 용어에 길들여져 있어서 다른 번역본들로 성경을 읽으면  그 차이점이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때로는 이런 차이점 때문에 심각한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차이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마치 회색 바탕 위에 있는 검은 점은 눈 에 잘 띄지 않지만
순수한 흰색  바탕에 올려놓고 보면 쉽게 발견되는 것처럼...

오늘은 최근에 사사기를 읽으면서 깨달은 바를 한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그  동안 사사기  1장과 2장을 연이어 읽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기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무능함을 왜 불순종이라고 하실까?'

한글개역성경에 의하면, 사사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고, 이어지는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을 엄히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열심히 가나안  족속과 싸워서 쫓아내려고
했는데 힘이 약하여, 능력이 모자라서 다 쫓아내지  못했다면, 그게 과연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킬만큼 심각한 범죄가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사사기를 읽으면서  여러 역본들을 대조해보니
어떤 성경에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고,
어떤  성경에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다"고 되어 있네요.


쫓 아내지  못했거나, 쫓아내지 아니하였거나, 결론적으로는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서 안 나가고 버텼다는 게 되겠지만, 이들 두 가지   표현 사이의
의미 차이는 제법 큽니다.

아시다시피 "못하였다"는 것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시도하고 노력은  했는데  능력이 부족하여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아니하였다"는 것은 애초부터 순종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제 경우에도,숙제를 안 한 학생과  숙제를  못한 학생,
출석을 안 한 학생과 출석을 할 수 없었던  학생들에 대해서는 각기 다르게 처리합니다.
제 강의에 출석을  "안 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야단을 치고 그만큼 점수를 감점해 버리지만,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출석을 "못 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 사유를 들어보고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그에 대해 처벌을 하지는  않습니다.

정의의 잣대를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과연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열심히 순종했지만 목표한 결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실까요?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중, 이번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이 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는데 능력이 부족하여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는가? 아니면,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가나안 족속과
연합하고,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는가?

이에 대해  흠정역과 한글개역을 대조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처음에 제시하는 구절들은 흠정역, 두번째로 제시하는 구절들은   한글개역임)

19 {주}께서 유다와 함께 하셨으므로 그가 산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주민들은 철 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두 가지 번역 모두 골짜기의 거주민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 지만, 그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는, 흠정역에는 "그들이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는데,
한글개역에는 "그들이   쫓아내지 못하였다"라고 하며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21 베냐민 자손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매...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27 므낫세도 벧스안과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과 다아낙과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과 도르와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과  이블르암과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과 므깃도와 그것의  고을들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그런데, 이제 28절에 와서는 개역성경도 쫓아내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뒤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그들을 철저히 쫓아내지는   아니하였더라.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만약 이스라엘 자손들이 정말로 능력이 모자라서, 하나님이 안 도와주셔서 적들을 쫓아낼 수   없었다면, 한글개역에서는 이 구절도  지금까지의 문맥 흐름과 같이 "다 쫓아낼 수는 없었더라"고 옮겼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전의 구절들처럼 "할 수 없었다"라는 주장을 더 이상 펼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공물을 받은 내용이 드러나 버렸거든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족속들로부터 공물을   받는 조건으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엄히 명하시기를,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셨지,
가나안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일을 시키거나 공물을 바치게 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능력이  있었으면서도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이후에 나오는 구절들에서도 두 번역본은 계속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vs "쫓아내지 못하였다"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30 스불론도 기드론의 거주민들과 나할롤의 거주민들을 쫓 아내지  아니하매...
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31 아셀도 악고의 거주민들과 시돈의 거주민들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의 거주민들을 쫓 아내지  아니하고...
31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런데 32절에 와서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거주민들인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을 쫓아내 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정말로 피흘리기까지 싸웠는데도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면
역 으로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쫓겨났어야  합니다.

34절에 나오는 단 족속처럼 아모리인들에 의해 내쫓기는게  정상입니다.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으로 쫓아내었으니 그들이 단 자손이   골짜기에 내려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정말 가나안 족속을 대적하여 싸웠다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거나
그들에게 역습을 당해서 내쫓기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32절과 같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본문 32절에 의하면, 아셀 족속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였다고 합니다.

도대체 가나안 족속들은 바보들만 모인 민족들일까요?
자기들을 쫓아내려고 덤비는  이스라엘  족속을 그들 가운데 거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을까요?
이건 아무리 봐도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들과 손을 잡고,  그들과 동맹을 맺고,
서로 통혼하고, 어울려 지낸 걸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32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그들과 연합한 것"이지,
한글개역과 같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한 것"이라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는데, 적군을    쫓아내지 못해서 적군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거주했다는 이런 이상한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33 납달리도 벧세메스의 거주민들과 벧아낫의 거주민들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제가   원어성경을 읽을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정말로 "쫓아낼 수 없다"와
"쫓아내지 아니하였다"가 원어로는 같은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사기 2장으로 넘어가니 이제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나옵니다.

2 너희는 이 땅의 거주민들과 동맹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느냐?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하 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나안의 거주민들과 동맹을 맺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과 동맹을 맺었다는 뜻입니다. (위 32절 설명 참고)


하나님은 그들의 제단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순종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의 제단을  헐지  아니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우상숭배를 했을 겁니다.

사사기 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어찌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느냐?
너희가 왜 순종할 수  없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왜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십니다.

사 사기 1장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취한 행위에 대하여 사사기 2장에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내용으로 보건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사기 1장의 한글개역은 19절(철병거를 갖춘 골짜기 거민들)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쫓아내지 않은 거나,  쫓아내지 못한 거나 그게 그거 아니냐 할 지도 모르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자 사이의 의미는  아주 큽니다.
왜냐하 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한(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되겠지만,
만약 "(열심히 순종했지만)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분노하셨다고 하면,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을 냉혹하고, 무자비하고, 원칙도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안한 것과 못한 것... 양자는 확실히 다르지요.

사사기 1장과 2장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먼저 순종하지도 않았으면서도, "할 수  없었다"고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찾아내고, 자신의 죄를 숨기는 자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여   지키는 자가  되고, 세상의 기준이나, 나의 욕심이나, 사탄의 제안과 타협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해 봅니다.
정말로 능력이 부족하여  "할  수 없을 때"에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께 간구하여 그 분의 도움을 받아 그 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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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www.keepbible.com  의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을 옮긴것입니다.

동성애가 죄가 아닐때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동성애는 죄이다.

그러나 동성애자가 목회자로 활동할 수  있게 허용한 교단은 의외로 많다.

그렇게 많은 교단들이 허용한것은 동성애를 죄가  아닌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죄이지만,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인권을 중시하고, 진리처럼 여겨지는 몇가지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면 마치 본인도 어쩔수 없는 선천적인 병의  하나처럼 여겨진다.

과연 이런 이유 뿐일까?

분명 성경내에서 언뜻 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찾아내어서 적절한? 해석과 함께 인용함으로써 그 권위를  더할것이다.

사람들에게  이처럼 동성애가 더이상 죄가 아닐때,

이런 동일한 방법들을  최대한 동원해 변명한다면...

도대체 하나님앞에 무엇이 죄가 될수 있을까?

참 열매를 맺는 삶

독일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깊이 생각하고,
지난날을 회개하며  다시 제 눈이 하나님을 향하였을때,
제게는 다시한번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제껏 제가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서 계획하였었던  모든 삶의 목표가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없는 것이었는지를 알게된 것이지요.

그때서야  정말 의미있는 삶의 목표를 찾고 싶었습니다.
평생 가지게 될 직업도 다시 고민하고 결정해야 했습니다.
직업이란건  제가 평생  시간을 들여 하게될 일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기왕이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직업을 갖고 싶었습니다.
하 나님 앞에서 가장 보기좋은, 또 의미있는 직업이 뭘까? 라는 질문에 목사라는 직업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곰곰히 다른 크리스천들을 둘러볼때, 존경할 만한 많은 크리스천들이 모두 목사라는 직업만 가진게 아닌걸 알게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앞에서 인정받는 직업이 목사라는 직업? 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걸 그때에도 이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역자라는 직업에 대한 부담도 컸습니다. 겁도 났었구요.

지금와서 보면 그때 제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가장 의미 있는  직업은 뭘까? 라는 질문은 사실 좋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남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될 "일"을 선택하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은연중에 내가 해낼수 있는 일, 내가 하게 될 일, 이라는 제목 속에 내가 드러나고 내가 뭔가 할수  있을것이다라는 전제가 되어있는것 같기도 하구요.

그 후에 시간이 얼마 지나서 깨닫게 된 것이지만, 직업 자체만 놓고  볼때 제가 선택할 직업이란 하나님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직업이기만 하면 큰 문제가 될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중요한건 "무엇을 할까?" 보다 "어떻게 할까?"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저는 하나님 앞에서 잘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물론이구요.
내 생애의 남은 시간, 허락한 시간을 잘 사용해서 칭찬받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원하는 일을 내가 했을때 아내는 기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기에 저역시 기쁩니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기뻐하지는 않지요.
이런것을 생각해볼때 역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내가 해야한다는걸 쉽게 알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아니 사람에게 무얼 원하시는 걸까요?

이런 질문에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할때의 결론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거의 항상 자신이 보기에 좋은 답을 찾게됩니다.
겉으로 는 동일한 결론을 찾더라도 그 속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자아가 스스로도 보기에 좋고, 남에게도 보기 좋은 동기를 찾아내는것  같습니다. 시작부터 그 동기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되는 것이어서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를 강탈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지나서야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서는 회개하게 되지요. 그 때까지는 그 답에 대한 확신이 가득할때도 있습니다.

심 지어 그런 마음과 번듯한 모양새를 다른 사람에게까지 자랑하듯 전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기가  보기에는 그럴듯하고 마음에 쏙 드는 답이었을테니까요.

아무튼...
지혜의 보고인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들을 주욱 나열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특정 직업에 대한 권면도 없었고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관련된 것들은 더욱 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은 인생 내가 뭘하고 살던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겠다는것 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여러가지 강력한 명령문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구약의 십계명을 예수님도 다시한번  복습처럼 그대로 명령하십니다.
아니 더 큰 계명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명령들은 직업  선택과는 무관할뿐더러 무엇을 하는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아주 구체적으로 나열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강조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내려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시기까지 합니다.
또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들을  하나하나 곰씹어 보면 볼수록 내가 가져야할 직업이 어떤 것인지, 또 그 직업을 통해서 얼마나 성공해야하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참 궁색한 처지라도 오로지 주님이 원하는 이런 열매맺기에 내 삶을 쓴다면 아마  하늘에서 가장 큰 상급을 얻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유학을 온 많은 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이런 멘트 같은것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유학 잘 하고 한국 가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포부라던지, 박사 같은 학위를 따거나 콩쿨에서 1등을 했을때,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라고 하거나 할때면 그런 사건들을 통해 더욱 영향력있게 복음을 전할수 있거나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미칠수 있을  것이라는 등등의 생각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욱 더 좋은것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직업이나 어떤 지위에도 상관없는, 언제나 어느때나 매일의 삶에서 맺을 수 있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힘쓰는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성경 이슈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눅 16:17)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

하나님께서는 위와 같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야로 묵상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많은 부분이 회손되어 버렸다거나,
하나님이 보존은 하시고 계신데 사람들에게는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이 드러나지 않게 숨겨져 있다는 주장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군데군데 빠지거나 불완전한 부분들이 생기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계셨을까요?
혹은 완전한 성경의 텍스트는 어딘가 숨기시고 아랍의 어느 사막 동굴같은 곳에 고이 보존하시고 계신걸까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과 그 신실하심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것 같은데... 목사를  배출하는 현대의 "신학교 교수"들 대부분은 이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그런 가르침을 받은 많은  목사님들이 역시 그렇게 믿고 있으며 이런 점들은 그러나 놀랍게도 잘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말씀에 대해 여러분들이 짐작하는것 보다 훨씬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무관심한것 처럼 보입니다.

목사 청빙시에 이런 점을 확인하는 교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적이 있나요?
아니.. 이런 점을 따지는 것조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것 같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으로 하여금 주야로 묵상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작 사람들에게는 숨겨진채 어느 사막의 땅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거나,
그 내용이 조금 달라지는 정도는 그대로 보고만 계신다는 생각자체가 말씀에 기록된 내용과 우선 다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편 12:6)

그러나 목사를 가르치는 의외로 많은 "신학교수님"들은 이런 주장이야말로 "과학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결론"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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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들이 성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되면 KJV 성경에 대해 쉽게 듣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KJV성경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일부 단체의 과격한 주장으로 인해 "KJV 성경"을 말하는 이들의 말은 곧 기독교  이단의 한 분파가 주장하는 헛소리라고 생각되어 지고 있는것 처럼 보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이 KJV 성경이라는 사실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알려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국에 KJV성경을 상당히 과격하게 소개했던 그 단체로 인해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엉망으로 전해져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찌되었건 한국의 상황을 떠나서 아직도 1600년대에 번역되어진 KJV 성경을 쓰는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이 주야로 묵상할수 있도록 순수하고 변함없는 보존된 말씀을 주고 계시며,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보존된 완전한 말씀을 가질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다른 이들의 주장은 성경이 현재로서는 어느정도 불완전하며 100퍼센트 보존된 성경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아주 중요한(!) 내용은 사람들에 의해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므로 구원받고 성장하는데에는  이렇게 남겨진 내용으로 충분하며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그래서 현대에 나온 다양한 번역본들, 특히 가장 최신의 고고학적  발견 자료를 바탕으로 번역된 현대의 번역서들을 잘 살펴보고 두루 읽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이 두 주장의 바탕이 되는 믿음을 비교해보면 바로 "말씀의 보존"에 관한 믿음이 서로 다르다는것을 알수있습니다.

먼저 후자의 주장을 보겠습니다..

"불완전한 사람에게 성경을 맡겨두셨으므로 2000년이 지난 지금 현재의 성경이 초기의 원본과 100퍼센트 같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현재의 필사본 자료를 전부 살펴볼때 많은 부분 일치하는 것은 증거가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에 따라 필사본들간의 서로 다른 부분들, 즉 세부적으로 다른 부분들은 더 원문에 가깝게 수정되어 갈 필요가 있다"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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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뉴스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양피지 조각들에 대해,
또 거의 다 낡아버린 채 일부만 남겨진 성경 조각들에 대한 신문기사를 우리는 꽤 자주 접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교수들이 "과학적으로" 제시되는 이런 물적 증거 자료들을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성경이 있다고 믿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동정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나는것이 과학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증거도 없으므로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거나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잠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비 과학적이며 상식에 벗어난 것들을 믿고 있나요?

6일간의 천지창조,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부활, 기적 등등등... 뭐 하나 사실 "과학적인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기사들에 관해서는 - 일부만 남은 양피지 조각들같은 - 소위 물질적 증거 조차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손에 쥐어진 성경에 이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은 오직 성경의 기록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것을 생각해보십시요.

크리스천인 여러분은 오직 성경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이런 비과학적인(!)일들을 믿는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나요?
한번 더 살펴보아도 이런 기록들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증거도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성경의 보존에 관한 믿음에 대해서 만큼은 "성경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오직 과학적인" 증거를 볼때에  성경대로 믿을수 없다고 결론 내리는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믿음의 근거이자 바탕인 성경말씀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라고  적혀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동정녀 탄생의 기사는 과학적이어서 믿지만,
이와 같은 말씀 보존에 대한 기록은  "비 상식적이며 비  과학적이고  게다가 불완전하게 발견되는 (물적 증거!인) 양피지 조각들을 볼때" 도저히 믿을수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이런 주장은 더 모순될 뿐만아니라 더더욱 비과학적인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불완전한 성경에 대한 믿음이 결국은 기독교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부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아주  드뭅니다.

성경기록의 보존에 대한 의심은 성경 기록자체를 신뢰할수 없게 만들어서 그 안의 모든 기록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직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며 기록된 그대로 "영원히 변하지 않고 보존되고 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궁여지책으로 "완전히 보존된 성경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뿐 어딘가에 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주야로 묵상하기 원하는 말씀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왜 숨기고 계신걸까요?
아니면 먼 곳에 계신 하나님은 이런 부분까지는 일일이 역사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주야로 묵상하기 원하는 말씀이 좀 바뀌어도 거의 내용이 같으니까 그냥 두고 보시는 걸까요?

매일 매일의 삶에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중 어느것도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독자 여러분은 세상이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과학에 대해서 한가지 알아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과학은 "관찰"에서 비롯되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관찰" 할수 없거나 "완전한 물적 증거"가 없는 부분은 과학이 다루지 않는,  아니 다룰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객관적일수가 없으니까요.

고고학적으로 발굴되는 양피지 조각들의 증거를 따라가면 크게 두가지 성경기록으로 나뉩니다. 이 양피지 조각에는 적혀있는데 저 양피지  조각에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더 오래된 양피지 조각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데 더 낡아빠진 양피지 조각에는 저렇게 쓰여 있습니다.
할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서는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게다가 그 이유는 이렇게 생각하면 맞지만 저렇게 생각하면 틀릴수도 있는 이유들입니다.
더 오래된 양피지 조각의 기록이 더 정확할 확률이 높다거나, 더 잘 보관된 양피지 조각의 기록이 더 정확할 확율이 높다거나...

여러분의 상식에는 이런 식의 이유들로 선택된 기록이 100퍼센트 객관적으로 믿을 만한 "과학적"인 "믿을만한" 기록으로 받아들여  지십니까?



이쯤에서 참 무식한것 처럼 보이는 너무도 비과학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살펴봅시다.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데 이들은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다. 단지 성경에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6일만에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다는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창세기의 기록을 믿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부활도 믿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신뢰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이들은 "흠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주야로 묵상할수 있는" 성경의 존재도 믿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적혀있으니까요.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이런 저런걸 봤을때 이럴 가능성이 가장높다. 좋은 관찰의 결론입니다만.. 고고학은 100%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수도 없습니다. 이미 지난일이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에 대한 완전한 물증을 누가  남겨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 우스꽝스럽게 비유를 들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요.
오늘날 초등학생이 그냥 낙서한 그림이 몇천년이 지나 발견되면 굉장한 의미를 지닐수도 있다고 말이죠. 오묘한 철학을 기본으로 그린  마치 낙서같은 그림도 몇천년이 지나면 누가 그냥 그렇게 낙서를 한것인지 의미를 담아 그린 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다만 추측할  뿐이겠지요.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필사본들을 바탕으로 완전한 성경을 만들어 나간다는건 한마디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한 무더기의 필사본이 발견되었다고 한들, 만약 기존의 필사본들과 내용이 다르다면 도대체 무슨 "과학적" 기준으로 이것이  맞고 저것이 틀리다 할수 있겠습니까?



고고학은 성경을 완전하게 할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스스로 증거할 뿐입니다.
스스로 계신분의 말씀이 스스로 증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의 이슈는 이처럼 "과학"의 영역에 있지도 않으며 과학이 답을 줄수도 없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서점에는 수많은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 소위 "성경"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라가는 양떼처럼 수많은 "서로 다른 내용"의 "성경"들 속에서 참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려면 우선  비교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비교할때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해 낼수 있을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구별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들 중에 왜 KJV 성경이냐를 누가 "과학적"이며 "객관적"으로 증명하며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읽어보고 비교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알게되어 있습니다.
각 성경들이 맺은 열매를 비교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말씀을 찾아낼수 있습니다.

그래서 KJV 성경입니다.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신앙생활의 여러  행위들을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것으로 나누어 본다면,
해야할 것은  성경의 말씀을 기초하여 찾아야 할 것이고
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둘 모두에 속한 것들이 있을수 있습니다만, 의외로 하고 싶은것에만 속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것은 해야할 것일까요?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일까요?

말씀에 나와있는 만큼 우선은 해야할 것에  속할것이고, 게다가 하고 싶은것이 되는게 자연스러운 크리스천의 모습일것입니다.

둘  모두에 속하되 그러나 우선은 해야할 것에 속하는 신앙행위이지요.

이처럼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것을 말씀을 통해 구분해보는 것은 의외로 많은 생각과 반성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해야할 것일까요? 하고 싶은 일일까요?

크리스천들과 (성경적인) 교제를 나누는 나누는 일은 해야할 것에 속하는지, 아니면 하고 싶은   일에 속하는지요?

말씀속을 찾아보면 우리가 해야할 것들은 뚜렷이 나와있는걸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몸은 하고 싶은것이지만 해야할 것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더욱 더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죄입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옛  본성이 남아있어서 끊임없이 죄를 짓고 싶고 죄의 유혹으로 우리의 마음이 죄를 짓고 싶도록 합니다. 하지만 해야할 것(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에 속하지 않지요.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속합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가운데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것에 속하는 것을 구분하다보면 그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것도 있습니다.

유아세례는 어떤가요?

대부분 개신교에서 행해지는 유아세례는 그 유래가 비록 천주교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새롭게 바뀌어서  꺼리낌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해야할 것인가요?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인가요?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침례 대신 세례가 행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역시  천주교에서 그 전통이 나왔지만 결국 그 의미가 또한 개신교에서는 새롭게 추가되고 바뀌면서 꺼리낌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해야할 것인가요?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인가요?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많은 것들이 머리속을 가득채웁니다.

말씀에 그 사례조차 나와있지 않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 그러나 좋은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들에는 신학이 큰 지지대가 됩니다. 신학을 기본으로 말씀이 광범위하게 해석되고 비록 말씀의 그 어디에도 사례가 없고 그런 모양은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전체적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때, 이런 일들을 하는것이 딱히 나쁜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쪽에 속한  일이 아니냐는 사람들의 의견과 함께 장려할 만한 일로 바뀌는 것이죠.

곰곰히  생각해보면 말씀속의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이 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수많은 종교행위들로 가득차있는 타 종교에서는 이런 행위들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1년을 단위로 각종 반복되는 절기들..  행사들마다 여러가지 의미를 담은 규율과 법칙들 등등.. 또한 세세한 법을 따라 각각의 의미를 담아 행하는 것들을 따라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존의 삶을 벗어난 그런 경험을 하게됩니다.

행위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인간을 직접 지으신  하나님께서 모를리가 없습니다. 신약보다 훨씬 두꺼운 구약의 내용 하나하나가 이런 행위를 추구하다 실패하고마는 유대인들의 역사로  가득합니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 내게되고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새로운 일들, 이방의 신기한 문화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전혀 새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닐겁니다.

이렇게 새로운 일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더하면서 결국 해야할 일들은 하고 싶은 많은 일들  속에 섞이게 되고, 해야할 일은 하고 싶은 많은 일들 중의 하나처럼 여겨지게 되지요.
신학은 계속해서 사람의 생각을 지지해줍니다. 신학은 신앙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할수 있는 학문으로 문을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있는 신학자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술해놓은 수많은 자료들은 깊은 신앙의  토대위에 있는 신학자들의 글과 점점 복잡하게 섞여가고, 어느새 긴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유행과 시대의 지지를 받으면서 어느새  비판하기 힘든 하나의 인정받는 생각으로 여겨집니다.

참으로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면 진실에 거짓을 조금씩 섞어가는 마귀의 일들과 참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하 나님을 섬기는 일들로 바쁘던 유대인들이 눈 깜짝할새에 외국 문화와 종교행위를 받아들인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섞여가는 것이겠지요.

어느새 해야할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하고  싶은 일들이 먼저 선행되는 일도 몇차례 생기게 되고 이 둘의 구분은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뒤면 어느새 누구도 신경쓰지 않게  될것입니다.

해야할 일이건 하고 싶은 일이건간에 어쨋거나 할 일이 많다는건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도 되니까요.. 바쁘게 움직일수록 점점 더 바빠집니다. 생각할 시간도 없어져갑니다. 생각은 내가 하는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님이 하는것이 되어버리지요.

그저 교회에서 하자는 대로, 목사님이  하자는 대로..  말씀과 비교하여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는 절대 알수 없는 잘 섞인 포도주를 함께 마시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곧 우리가 해야할 일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무심해져 버린 우리의  모습을 되돌려 우선 해야할 일에 항상 전력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저 하늘의 푯대를 향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저 제 남은 삶이 모아지길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주여 삼창과 엄마 삼창/김문수

아래의 글은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 write_id=662 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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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항상 엄숙하고 조용하며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에는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다들 마음 뿐만 아니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깨끗한 옷,  단정한  머리 모양, 바른 자세는 기본이었고,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슬리퍼, 초미니스커트, 민소매 옷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 음악을  위해서는 피아노와 오르간만 쓸 수 있었고, 드럼, 기타, 신디싸이저 등은 쓸 수 없었습니다. 회중들이 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시간에는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는 것이나 옆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시절에 새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는데, 그 분과 학생회 수련회에 가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며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목소리를 높여서 통성으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항상 "주여! 주여! 주여~" 라고 주를  크게 세 번  부르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래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 후, 부흥회나 수련회와 같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기도할 때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지,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를 못했고,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선명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의 답변이라는 게 대부분 "크게 외쳐야 하나님이 잘 들어주신다"는  정도였으니까요.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나 그 분의 사도들이 혹은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하기  전에, "주여 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한국 교회에만 있는 이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 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장


" 주여 삼창"이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창(唱)이란   "노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경우 삼창이라고 하기보다는 "연호(連呼): 구호를 연이어 외침" 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용어 그대로 "주여 삼창"이라고 쓰겠습니다.


"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다니엘  9장   19절을 근거로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단 9:19,  킹흠정)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또한 "주여 삼창"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며(렘 33:3),
크게 외쳐서   우리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쏟아놓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기도할 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불러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비주의자,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여~  성령이여~" 하고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요 16:14).  성경 어디에도 성도들이 "성령님께" 기도한 사례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롬 8:26, 킹흠정)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6:6, 킹흠정)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요 15:16, 킹흠정)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남아 있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게 하려 함이라.


(요 16:23, 킹흠정)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님을 가리켜서 주님이라고 부른 예는  없습니다.



둘째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다니엘  9:19을 그  앞에 나오는 17, 18절과 같이  비교해 보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니엘은 "주여"를 세 번 연호한 적이 없습니다.


(단 9:17-19, 킹흠정) [17]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러하온즉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18]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19]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다니엘 9:19에 나오는 "오 주여, 들으소서"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닙니다.

이는 9:17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것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긍휼로 인하여 간구하오니 그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2. "주여 삼창"의 기원


"주 여  삼창"을 외치는 의식은 성경의 가르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는 동양의 제사의식과   무속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여 삼창"의 모태가 되는 것은 "만세  삼창"인데, 이 만세 삼창은 중국에서 한무제가 숭산에서 제사를 지낼때 신하와 백성들이  만세를 삼창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의 황실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거나 은혜에 감사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외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시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이라는 시 중 일부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이란 죽은 이의 혼령(넋)을 불러들이는 의식인데,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망자(亡者)의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동양 문화의 산물이며, 동양의  제사의식,  황제 숭배, 초혼의식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여 삼창"을 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기도를 들으시는가?

(렘 33:3, 개역)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킹흠정)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KJV) Call  unto me, and I will answer  thee, and shew thee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thou knowest not.


개역은 "부르짖으라"라고 번역했지만, 킹제임스성경에 나오는 call 이라는 단어는 목청  터지게  외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사 59:1, 킹흠정)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주의 공로를 힘입어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 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  크기가 기도 응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2) "주여 삼창"으로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가?

피난처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필요합니다.

(시 62:8, 킹흠정)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닙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여"라는 구호를 세 번 크게 외쳐서 얻는 감정의 발산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크신  위로입니다.


(요 14:26, 킹흠정)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3) "주여 삼창"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는가?

주께서 내 행동과 생각과 말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 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주여"를 외칠 필요가  있을까요?


(시 139:1-4, 킹흠정) [1]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손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자고  있다면 크게 소리 질러서 깨우시기 바랍니다.


(왕상 18:27-28, 킹흠정) [27] 정오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이므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혹은 자고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 하리라, 하매  [28]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


바알 숭배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그렇게 목 놓아 외쳐 부른 것이 아니라 보통 때와 같이 주께 말했습니다.

왕상 18:36에는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거나, 제단 주변에서 날뛰거나 하면서 주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주께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4)   "주여, 주여" 연호한 사례


성경에는 "주여, 주여"라고 주를 연이어 부른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연이어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구절들은 아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에 의하면, 주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주여,  주여"하고 외칩니다.


(마 7:21, 킹흠정)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킹흠정)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 킹흠정)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나

(눅 6:46,  킹흠정)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 글의 취지는, 기도할 때 주님께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주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저는 그런  분들을 향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거도 알 수 없는  "주여 삼창"이라는 종교 의식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교회 예배에 들어와 있고,  또 그 의미도 모른 채 목회자들이  가르치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의미없는 외침이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성경적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이 통성기도 시작할 때마다 습관을 따라 혹은 기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주여 삼창"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부르짖음이 될 뿐입니다.


이제는 주여 삼창이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외국으로 "주여 삼창"이라는 문화를 전파하여 외국에서도  "주여 삼창"을 외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http://www.okmedia.or.kr/news.php?code=&mode=view&num=5303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3784


참고로, 로마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믿고 숭배하는 마리아에게 "엄마  삼창"을 바친다고 합니다.


천주교 미사의 마리아에게 바치는 "엄마  삼창"  (아래 링크 클릭)

친구

친구야..

요즘 애기낳고 바쁘게 지내고 있을 네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모든것이 새롭겠구나.

아버지가 된다는 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것이겠지?

힘든 나그네의 삶이 더 힘들어지기도 하겠지만 더 풍성해지기도 하겠다.

사랑은 아무리 줘도 끝없이 샘솟는 것이라 배운것처럼 결혼을 통해 직접 겪어보니 참으로 그렇다.

넘치는 사랑으로 남은 삶을 열심히 살자.



날씨가 점점 쌀쌀해져가는 가을이다.

창밖을 바라볼때 뭔가 스잔한게 느껴진다.

아직도 이 마음속에는 이런 여린 면이 남아있구나.

내가 또 가을을 타나보다.

은혜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음속의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보통은 일어날때 몸의 상태가 느껴지고, 하루동안 주어진 일이 생각나고, 주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오늘처럼 웬지모를 공허함이 제일먼저 제 머리속을 채웁니다.

맞지않는 옷을 입은듯한, 마치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채 할일들이 생각나는듯한 그런 마음...

눈을 뜨자마자 드는 이런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요.

가만히 기억해보면 이런 기분은 지금껏 몇번 경험해 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집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할때 풀리는 문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의외로 답이 쉬운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배 시에 어느 정도까지의 음악이 적절한가?

가끔씩 담배는 피워도 상관없지 않나?

적당히 술을 마시는 건 어떤가?

등등의 문제들을 고민할 때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사실 그 답은 쉽게 나옵니다. 다만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위 “시대의 상식”에 맞는 옳고 그름의 입장에 서면 답이 모호해지기 시작합니다.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생각해서라도 어느 정도 선까지는 나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할 것 같고 그러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관용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적절함은 때로 경계선 가까이에 있는 “악”을 “선”으로  바꾸기도 합니다.  옛 사람 안에 있는 “적절하다”는 기준이 점점 모든 신앙행위의 기준으로 자리잡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친구처럼 친근하게만 느껴지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자리잡기 시작하면 점점 더 “적절한 관용”과 스스로 정의하는  “사랑”의 마음이 작동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알려지지 않은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도, 그저 매우 특별한 친구와의 관계에서 오는 기준이기에 결국 자신의 생각이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 됩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렇지만  철자하나 다르지 않는 같은 단어로 사용되면서 그 구분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어느새 모호해져 버렸습니다.

시간이 될  때 성경이 정의하는 “사랑"과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차이를 구분 지어보면 아마 커다란 차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그렇게 자주 나오는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이유로 이렇게 저렇게 행했던 많은 것들이 회개할 제목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는 것.
하나님이 가르쳐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 하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옛 사람이 가진  버릇 위에 세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서둘러야 할 우선적인 일입니다.

성경 문제

아래의 글은 www.keepbible.com 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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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5일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 왔다. 한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역사상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참되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큰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조선  왕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선포하며 선한 싸움을 싸웠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필요하므로 1877년부터 로스 등을 필두로 하여 여러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11년에는  신구약성경인 성경전서가 출간되었고 그 뒤 1938년에 성경전서의 개정판인 성경개역이 출간되었으며 1961년도에는 성경개역의  개정판인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하 개역성경)이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는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노력으로  장로교회가 가장 큰 그룹을 형성하였는데 장로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주일을 안식일로 여기면서 주일 성수나 금연/금주 같은 규칙을 강하게  주장해 왔고 특히 성경에 관한 한 아주 보수적인 믿음을 고수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은 개역성경에 단 한 점의 실수도 없음을  성도들에게 주지시켜 왔고 따라서 어떤 이가 행8:37 같이 전체 구절이 삭제된 사례를 들며 그 이유를 묻거나 혹은 너무나 명백하게  번역이 잘못된 부분(1)을 지적하면 그 일을 형제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한 마디로  지난 수십 년 동안 개역성경에 대해서는 누구하나 제대로 입을 열어 그 문제점을 지적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성도들의 믿음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성경의 보존과 번역에 대한 성도들의 이해가 부족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나 교단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개역성경이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 권위로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에서 나와 프로테스탄트들의 교리와 실행에 문제를 안겨 준  성경, 많은 삭제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훼손된 성경, 문법 등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실한 성경을 최종  권위라고 주장하며 100여 년을 버텨 왔으므로 이것으로 인해 신학, 교리, 실행 등의 문제가 매우 컸음도 부인할 수 없다.

킹제임스 성경 이슈

국내에서는 1611년에 영국에서 출간되어 영어의 발흥과 함께 전 세계적인 성경이 되고  모든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며 수많은 신학 교재 및 일반 크리스천 교양서적의 근간이 되고 300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권위를 자랑하는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 KJB)이 단지 문헌을 통해 ‘제임스 왕이 제정한  성경’ 즉 ‘흠정역 성경’으로 알려져 왔다. 그것은 영미 문학에 가장 큰 공헌을 끼치고(2) 문장이 수려하며  보수적인 성경 정도로만 인식되었고 그것을 소장하여 공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까지는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성경 사이에 큰 차이점이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로 그때에 성경대로 믿기를 원하는 성도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주로 미국에서 출간된 문헌들을 통해서 킹제임스 성경과 신국제역(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신미국표준역(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같은 현대 역본들 사이에  엄청난 교리적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개역성경이나 공동번역 그리고 표준새번역 등의 한글 성경들을 비교한 결과 대부분의 한글  성경들도 다른 현대 영어 역본들과 내용 면에서 거의 동일함을 알게 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학계나 관련 출판계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미국 등의 영어권 국가에서 성경 논쟁이 일어난  것도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1969-78년에 NIV가 출간되기 전까지 전 세계 영어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1611년 이후로 약 400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은 전 세계의 유일무이한 ‘거룩한 성경’(Holy  Bible)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60-70년대 이후에 NIV, NASB, NKJV, Living Bible 등의  현대 역본들이 광고의 홍수 속에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면서 한결같이 킹제임스 성경을 공격하였고 이것들의 맹공에 맞서기 위해 급기야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NIV 등의 현대 역본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1881년 영국에서  웨스트코트(B. F. Westcott)와 호르트(F. J. A. Hort)(3)가 전통적인 프로테스탄트  공인본문(Textus Receptus, TR)을 대적하며 로마 카톨릭 천주교 사본에 근거한 영국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ERV)을 들고 나온 이래로 성경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 본문 논쟁이 늘 있어 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일반 성도들에게까지 성경 본문 논쟁이 확산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한 마디로 미국의 성경 논쟁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공격과 변호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킹제임스 성경 논쟁은 마치 진화론 논쟁과 비슷하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했을 때 보수주의 학자들이나 성도들은 이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가  인본주의자들에 의한 맹공으로 인해 성경의 토대인 하나님의 특별 창조가 거의 무너질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경 신자들이 창조과학회  등의 사역을 통해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진화론은 이미 온 세상에 마치 과학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NIV 등의 현대 역본들이 나올 때에 미국에서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은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 문제로 인해 교회가 갈리고 교리의 문제가 발생하자 적극적으로 이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은 미국의 웬만한 크리스천  독자라면 성경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에 가서 신학 공부를 했지만  이 같은 성경 본문 문제를 접할 기회는 거의 갖지 못하였다. 그들 역시 필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역본을 대하면서 본문은 같은데  단지 번역이 다를 뿐이라고 피상적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한국 교회의 특성상 유학생이라면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주로 장로교와  감리교 신학교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지하는 대로 미국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가장 인본적이므로 이런 신학교에서는 이미  현대 역본만을 사용하거나 혹은 현대 역본의 기초가 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그리스어 본문을 귀중히 여기므로 이런 데서 공부하는  경우 성경 문제 자체를 살펴볼 기회를 갖기 어렵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국에서는 침례교회가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이런 교회들에서는 어김없이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해 왔다. 따라서 성경 본문 논쟁도 실제로 침례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침례교회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등은 성경 본문 문제 등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이 침례교 신학교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런 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므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왔어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한국에서도 뜻있는 성도들이 개역성경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차에 미국의  자료를 통해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마귀의 계략에 넘어간  극단주의자들이 등장하여 “개역성경은 사탄 성경이다.”, “개역성경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야말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신약교회이다.” 등과 같은 비상식적이고도 비논리적인 발언을 하며 안하무인 격의 행동을 함으로써 킹제임스 성경의 명성과  권위는 하루아침에 땅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옮긴이 주: 현재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 을 출판하고 있는 “말씀보존학회” 와  “킹제임스 흠정역” 을 출판하고 있는 출판사 “그리스도 예수안에” 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초기에 “말씀보존학회” 의 극단적인  주장 때문에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만 유독 킹제임스역 성경이 마치 이단이 사용하는 성경처럼 취급되어버리게 되었다.)

한 편 이런 현실과 성경 문제의 핵심이 성경 본문에 있음을 인식한 성경 신자들이 1990년대 초반부터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경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의 모든 단어를 보존해 주심을 확고히 믿는 가운데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바르게 번역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과 부담을 갖고 차근차근 일을 수행하여 2000년 8월에 ‘킹제임스 흠정역’이라는  우리말 성경을 펴냈다.

성경 문제의 핵심

어떤 제품을 만들 때 그것을 만드는 사람과 원료에 의해  최종 산물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이 같은 원리는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이 경우에는 번역의 대본으로 쓰인  신구약 본문과 성경 번역자들의 사상 및 문화적 배경이 최종 산물 즉 번역된 성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그리고 표준새번역 등 대한성서공회에서 출간한 성경들 밖에 없었으므로 과연 그런 역본들이 바른지 그른지 또  그르다면 어느 부분이 그른지 비교/검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역본들과 뿌리가 다른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그리스도  예수안에, www.keepbible.com)이  출간되었으므로  문제가 되는 점들을 하나 하나 비교하고 그 결과와 원인을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옮긴이 주: 비교를 쉽게 할수 있도록  “박사성경” 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른 부분이 뚜렷이 표기된 성경이 나와 있으며 현재 www.keepbible.com 에서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번역의 핵심 요소들이 한국의 독보적 성경으로 자리를 굳힌 개역성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을 비교/분석하려 한다. 이번의 분석을 통해서 한국의 성도들이 개역성경을 비롯한 기존의 한글  성경들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간에 본문 및 교리적 차이가 심각함을 발견하고 과감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서 나온 성경들을 버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해 준 성경, 로마 카톨릭 교회의 허구와 미신을 와해시킨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우리는 개역성경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위로를 주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본 사이트에서 개역성경을 분석하는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개역성경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바른 것을 제시해야 하므로 그것의 좋지 않은 면을 많이 부각시킨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부디  양식 있는 독자께서 이 점을 양해해 주길 바란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달고 선한 말씀들로 은혜 가운데  빛을 주실 줄 확신하다.

각주

(1) 이것에 대한 예로는 창1:2의 ‘하나님의 신’(the God  of God)을 들 수 있으며 이것은 원래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 되어야 한다.

(2)   킹제임스 성경이 영어와 영미 문학에 미친 공헌은 말로 표한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나온 두 개의 문헌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것은 Benson Bobrick의 ?Wide As the Waters : The Story of the  English Bible and the Revolution It Inspired’?(Simon & Schuster,  April 11, 2001)이다. 이 책은 위클리프로부터 시작되는 영어 성경의 역사를 잘 보여 주며 특히 킹제임스 성경의 영향에  대해 잘 설명한다. 두 번째 것은 Alister Mcgrath의 ?In the Beginning : The Story of the  King James Bible and How It Changed a Nation, a Language, and a  Culture?(Anchor, February 19, 2002)이다. 흥미 있는 것은 이 책의 저자가 NIV의 편집자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킹제임스 성경이 미국과 미국말과 문화에 미친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책 모두 세속 출판사가  출간한 것이므로 읽을 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제공하므로 가치가 있다. 이 두 책은 모두  www.amazon.com에서 구할 수 있다.

(3) 영국 성공회 학자들인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킹제임스 성경을  대적하는 영국개역성경을 처음으로 출간한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었으며 이들이 로마 카톨릭 소수 사본을  근거로 만든 ‘수정 그리스어 본문’(Revised Greek text) 혹은 ‘비평본문’(Critical text)은 1881년  이후로 출간된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의 본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음악을 위한 몇가지 원칙들.

- Foundation 紙에서 발췌/  구정민(복된소망침례교회 목양자) 역

세상은 지금 교회의 음악을 위한  표준들을 세속화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음악의 형태는 점차로 믿는 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왔으며 수 천  개의 교회들 안으로 몰래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되물어야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불신자의 옛 습성의 육적인 욕구를 움직이고 활력을 불어 넣으며 격정을 부추기는 바로 그 음악이 “새로운 사람”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 거주하시는 성도”를 교화 시킬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속적인  음악가들 둘 다 오늘날의 크리스천 록, 크리스천 힙합, 크리스천 메탈 그리고 CCM(동시대의 크리스천음악) 이 그 다양한 형태들  속에서 세속 록 음악과 거의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유명한 크리스천 록 밴드인 오디오 오드레날라인은 세속 록  음악과 크리스천 록 음악 사이의 차이점을 규정해보라고 질문 받았을 때, “유일한 차이점은 그 가사인데, 그럴 지라도 그  차이점조차도 때때로 명확하지 않다”라고 대답했습니다. CCM 음악가인 마이클 카드는 “크리스천 록의 가사들은 유일하게 독특하며  명확한 특징적 모습을 띤다”고 인정했으나, 덧붙이기를 “형태적으로는 세속적 록 음악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내에서 그렇게 유행하고 있는 음악에 대하여 어떻게 신실하고 순종적인 신자들이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음악에 관한 몇 가지 성경적인 원리들을 옹호해야 합니다.

1.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며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와 연관된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임을 밝히  드러내줍니다(역대기상 16:1-43, 시 95:1).

2.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히 “음악의 역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음악은 그것으로써 성도들이 하나님 과 교통하고, 그분을 경배하며(엡  5:19), 심지어 가르치고 서로서로 훈계함을 의미합니다(골 3:16).
이렇게 음악은 모든 개별적인 신자의  개인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교회의 생활 속에서도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이 선하다(시 147:1)”라고 기록했습니다. 사실, 시편 전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과 교통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노래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듣고 동참하는 음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교훈과 훈계로써 다른  신자들을 감화시키는 음악이어야 합니다.

3.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며(고전 14:33)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신자들이 지배를 받는 음악은 질서 있고 적합해야 합니다.
멜 로디는 즐거우며 쉽게 알 수 있어야 하며, 화음은 긴장감과 불협화음이 없는 소리를 만들어내야 하고, 리듬은 일반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음악은 언제나 창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4.성도들이 듣는 음악은  멜로디, 화음, 리듬이 질서 있고 감화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그 음악의 단어들 또는 가사들은 신학적으로 정확해야 하고 창조주께서  사람들을 위해 하신 일들에 집중되어져야 합니다.
개인 자신에게 집중된 것 또는 성경의 교리적인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가사는 어떤 것이든지 유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신자의 영적 생활과 성장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써 배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경건에 관한 교리” (딤전 6:3)로 성경에 묘사된 “건전한 말씀들”에  동의해야 합니다.

5.성도들이 듣는 모든 음악은 단어와 형태 둘 다 경건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경의의 정중한 자세가 결여된 어떤 음악도 배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음악은 주님께 영광 돌리며  영화롭게 하는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그분만이 모 든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시 18:3, 계 4:11). 음악은 그것으로써 우리가 그분께 영광 돌리며 영화롭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음악은 경건하고 정중해야 합니다.

6.그리스도인 음악의 목적은 그 청취자를 즐기게 하거나 음악  사역에 참여하는 개인에게 영광이 돌아와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음악이 만들어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와 지역교회 안에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목적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음악의 결과로 세상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메시지에 의해 변화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