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인가? / 김문수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8807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 사람의 구원 문제가 결정되며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죄인들은 복음을 듣고 그에 대해 반응(믿거나 거부하거나)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들만 먼저 거듭나게 한 다음에,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선택(elect)은 하나님께서 섬김, 특별한 사역, 축복 등을 위하여 사람을 세우시는 것을 말하지, 누구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하고 누구는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미리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칼빈의 신학 사상은 거의 대부분 로마 카톨릭 신학자인 어거스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글에서 어거스틴의 글을 자주 인용합니다. 칼빈은 예정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논증합니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게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선명한 거울이 되는 예가 교회의 머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become) 것은 그가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위대한 영예는 그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선물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거저 주어졌다(freely presented). 여기서 누군가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분이 받은 것을 누릴 수 없느냐고 묻는다면,... (중략)... 만약 그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누군가를 구원에 이르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정죄에 이르도록 예정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빼앗게 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II:xxii, 1.)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누군가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만 구원하신다는 예정 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느냐 영원히 버리느냐를 결정할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보듯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Christ's eternal Sonship)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믿는 오리겐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것이 어거스틴, 칼빈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그분의 아들이 되었다(become)고 주장하며, 자신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시편 2편 7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하거나 출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무궁토록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며, 그 분은 신성과 영광과 권능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름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존재도 이런 영광을 누린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되신 것은 상속을 통해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4-5)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 시편 2편 7절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칙령을 밝히 보이리라.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시편 2편 7절에 기록된 이 날(this day)이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출산한 날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바로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그들의 자손인 우리에게 성취하셨다는 것이라. 그것은 또 시편 둘째 편에 기록된바,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함과 같도다(행13:33).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영원무궁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declared)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made) 준 것이 아닙니다. 개역의 번역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부활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흠정역: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1:4).

개역: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오리겐, 어거스틴, 칼빈, 여호와의 증인들이 뭐라고 주장하건 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무궁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eternal Sonship)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개역이나 NIV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은 먼 옛날의 어느 때였다고 주장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그분께서 영원부터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개역: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흠정역: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NIV: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KJV: But thou, Bethlehem Ephratah, though thou be little among the thousands of Judah, yet out of thee shall he come forth unto me that is to be ruler in Israel; whose goings forth have been from of old, from everlasting.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origin)이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조언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사9:6).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 칼빈이 잘못 이해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지, 그의 인격에 대해서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이루어놓은 업적 중 긍정적인 부분들도 있겠지만, 다만 그가 로마 카톨릭의 종교적 관습과 어거스틴의 교리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것이 개혁(reformation)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개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new creature)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1년 11월 9일 수요일

오늘 아침에...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더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이것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언하도록 보내어진 자더라.

그 빛은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느니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되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고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14)



----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 이 말씀을 들으며 얼마나 은혜로왔는지 모릅니다.


큰 감사의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힘차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과

그 커다란 감동에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걷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이렇게 말씀이 너무 달고 좋을때의 그 기분은 말로 다 표현 못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이런 경험들은 해보신적이 있겠지요?

이럴때는 참 힘이 납니다.


왜 이 구절에 이런 갑작스런 감동을 받은걸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주님을 볼때에는 얼마나 더 기쁠까요?


주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요 !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새로운 시작

벌써 세번째 가정예배를 경험했습니다.

오랫동안 다니던 교회를 조용히 나와서, 제가 설교를 하고 제 아내 홀로 제가 준비한 설교를 듣는 가정예배입니다.
이제 1년 6개월이 된 제 어린 아들을 위해서 짧은 어린이 예배도 드립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저나, 제 설교를 진지하게 경청해주는 제 아내나,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채 "하나님"을 겨우 따라하는 제 아들에게 이 곳 독일 생활에서의 가정 예배가 얼마나 지속될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좀 더 바른 신앙 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과, 교회를 다니면서 생겨나던 내적인 갈등을 더 이상 두고 볼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된 가정예배였고, 이제 이렇게 새롭게 내 딛는 발자국에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간절함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교할 자격이라고는 한 가정의 가장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신학교육은 근처도 가보지 못하였기에,
저를 따라 진지하게 저와 동행하고 있는 제 아내가 너무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 많은 교회가 넘쳐난다지만 흠정역 성경을 들고 성경의 가르침을 간구하며 한 걸음씩 걷는 교회가 주변에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주님께서 이곳 독일땅에서도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는 형제 자매님들을 만날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믿음 vs. 신념 / 김재욱

요즘 인터넷 한 구석에서 논쟁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종교에 대해 넓은 길을 제시하는 신학자가 쏟아내는 망언에 갑론을박하기 위해서다. 그 신학자는 대략 이런 주장을 한다.

"특정한 종교로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편협한 것."

"하나님은 기독교인도 불자도 아니다."

이런 식의, 이젠 새롭지도 않은 역겨운 말들로 줄줄이 달라붙는 댓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신학자를 자처하는 그들의 믿음이란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될 때가 있다. 바로 요즘 같은 때다.

오래전부터 교인들이 잘 하는 얘기 중에 "믿음이 좋다", "예수 잘 믿는다" 등의 말들이 있다. 일단 그들의 속은 몰라도 흔들림 없이 종교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크리스천들 중에 열심을 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 좋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 글은 순전히 내 생각임을 밝혀 둔다.


1

'믿음'으로 걷는 사람이 있고 '신념'으로 걷는 사람이 있다. 두 단어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그 말맛은 좀 다르다. 사전에서는 어떻게 정의하든 나는, 최소한 이 글에서는 두 단어의 뜻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고자 한다.
' 믿음'은 믿음이다. 믿는 것이다. 그것은 확인과 다르고 검증과도 다르며 이해와도 다른 것이다. '신념'은 한자의 단어 그대로 '믿는 생각'이다. 이것도 믿는 것이지만 믿고 있는 생각, 그것이 자기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확고히 어떤 것에 뿌리를 두고 신봉하는 것이다.


글로는 표현이 참 어렵다. 아무튼 모두가 믿음이라는 재료로 자기 세계를 만들고 그것으로 생각을 지탱해나가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믿음을, 어떤 경우에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어떤 일을 두고 흔들림 없다는 것은 참 좋아 보이고, 생각이 유연하다는 것은 좀 안 좋게 보인다. 특히 어리석은 신학자가 존경받는 이 시대에는 참으로 흔들림 없는 것이 좋은 덕목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많은 정보와 생각 가운데서 늘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것을 부정하고, 어떻게 일말의 의심이나 나약함을 가질 수 있느냐는 식으로 몰아붙이면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는 척하고 아무런 검증 없이 그냥 무작정 믿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단과 괴상한 집단일수록 그처럼 미동도 않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복음이나 믿음의 교리 이외의 것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충돌이나 이견은 오히려 건강한 것이다.


2

오래전 20대 초반에, 한 친구가 자기 여고 동창들의 속임수로 다단계 강연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강연을 들어 보니 옥장판을 팔면서 밑에 판매원을 거느리면 금세 부자가 될 수 있고,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 파는 것까지 자기 수익이 돼서 금방 떼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고.
그런데 처음엔 누구나 거부하지만 몇 시간만 들으면 정말 그럴 것 같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질긴 사람도 이틀만 들으면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하루 종일 듣게 하는 것도 모자라 한 친구 집에 데리고 가서 합숙을 하며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 출근도 못하게 하고 전화도 못 걸게 했다고 한다.


당시는 삐삐도 없던 시기였는데, 동화되고 설득되는 척하며 다음날 겨우 거짓말로 잠시 시간을 내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그녀는 몇몇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잡지사에 다니던 나는 강남의 모처에 있는 그곳에 혼자 찾아갔다. 사전에 그 친구에게는 일행에게 말을 전하라고 했다. 계열사인 OO신문사의 기자와 함께 내가 간다고 말이다. 무모한 시도였지만, 그토록 질기게 놓아주지 않던 친구들이 기자라는 말에 인근 다방으로 나왔다.
그녀들을 만나 보니 좀 억세긴 했지만 보통 사람들이었다. 주변을 살피며 기자를 경계했는데, 거기엔 그 조직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도 혼자였기 때문에 두려웠지만 철판을 깔고 강력하게 말했다. 이 친구를 지금 놓아주면 문제 삼지 않겠지만 계속 귀찮게 하면 인근에 대기 중인 기자에게 취재를 의뢰해서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처음엔 '당신이 보호자도 아닌데 왜 나서느냐'며 따졌지만, 결국 신문사라는 말에 사람을 놔줬는데, 신기한 것은 그들이 친구를 자기 밑 판매원으로 넣기 위한 것도 있었겠지만 정말로 팔자를 고쳐주려는 진심이 엿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래, 미련한 것아, 이렇게 좋은 기회를 네 발로 차냐... 너네집 어려운 거 알고 우리가 알아서 도와주려는 건데... 평생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라... 이런 악담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는 물론 그들에게 세뇌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들의 머리에는 옥장판과 백만장자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둘째 믿음, 즉 신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 '나'는 없다. 오직 팔자를 고친 옥장판 갑부만이 그들의 신념이다.

이런 것은 말 그대로 무아지경, 무념무상과 비슷하다. 요 즘 '생각 버리기'를 주제로 책을 내는 일본 중이 있는데, 그는 너무 많은 생각이 사람을 그르친다고 생각한다. 극도로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니(렘 17:9)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이 때문에 그는 생각을 아예 안 하는 연습을 하며 산다고 한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걸을 때도 생각을 없애기 위해 무작정 달리기도 한다. 뛰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

이것이야말로 마귀가 가장 원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나한테 오라는 것 아닌가. 마귀 입장에서는 손도 안 대고 코푸는 가장 효율적인(?) 아이디어 중 하나다.


3

이단의 형태가 사이비 다단계와 비슷하다. 자기를 찾지 못하게 하고, 다른 책이나 다른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늘 무아지경 속에서 산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신념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 같은 우리 목사님 말씀, 칼빈주의, 십일조와 록펠러, 은사와 간증, 성 어거스틴과 모니카 모자,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힌 베드로 등은 부동의 지식이다. 성경 이상의 신념을 갖게 하는 이런 지식들을 평생 반복학습하면서 신념으로 삼는다.

목사들은 그들에게 늘 성령의 새 술에 취하라고 하면서 무작정 따라오게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기뻐해야 하니 늘 이를 드러내고 웃으라고 한다. 안 그러면 믿음이 약한 거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 겉으로 희희낙락하라는 것인가? 성도의 삶에 감당할 만한 시험과 고난이 와서 그것을 넘으며 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며 오히려 영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믿는 사람의 삶에도 예외 없이 져야 할 십자가와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면 자기를 잊고 성령의 새술에 취했다는 최면을 거는 수밖에 없다.

믿음이란 각자 정의하기에 따라 다른 것이겠지만, 나는 믿음이 일말의 궁금증이나 석연치 않는 구석도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르는 것도 많고 때로는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고, 이해도 안 가고, 좀 안 그러면 안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의미가 명백하면 확인할 수 없고 내 바람과 달라도 믿는 것이다. 어떤 계산이나 생각도 없이 믿고 끝내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오류가 없는 성경을 믿는 것도 배우고 읽고 연구하여 믿음의 증거와 개수를 늘려가는 것이지, 당연히 오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상상'을 악하다고 하시지만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라는 말씀은 참 많다.

그런즉 이 날 너는 위로 하늘에서와 밑으로 땅에서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그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신 4:39)

옛날을 기억하라. 많은 세대의 햇수를 깊이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보여 줄 것이요, 네 장로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해 주리라. (신 32:7)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 3:1)

분별이 너를 보존하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잠 2:11)

물론 믿음은 바른 성경을 통한 것만이 온전하다. 자기 생각을 믿으면 아무리 생각하고 분별해도 종교다원주의자가 되거나 옥장판 전도사가 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바른 성경을 믿을 때도 깊은 생각과 분별이 필요하다. 진리가 부족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믿을 의지가 없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베레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행 17:11)


4

내 경우에 킹제임스 성경이나 바른 믿음의 이야기들도, 이게 진리니 입 닫고 무조건 믿으라거나 딴 얘기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방식이었다면 아마 크게 관심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바른 성경과 진리를 알게 된 사람들은, 강요를 통해 이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을 보고 스스로 판단하고 깊이 생각한 뒤에 믿어져서 자기 발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오만한 사람들은 심지어 진리를 가졌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의 외면을 당한다. 그들은 진리를 잘못 간수하고 잘못 표현하기 때문에 부실한 진리를 가진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아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들의 믿음이 신념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한 믿음은 아무리 귀하고 확고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타인에 대한 정죄와 심판의 도구로 삼을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할지 결정하는 것이고, 남의 믿음까지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로 악한 것을 분별하고 멀리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의 길이 험하고 자기와 동일하지 않아도 화평을 유지하며 설득하고 권면하고, 안 되면 각자의 길을 가든지 하는 것이다.

구원은 단번에 받는 것이지만 믿음의 경험은 축적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서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라(딤후 3:14)'고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
믿 음은 귀를 막고 무작정 신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를 가지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나를 바꿔가는 것이며 덮어놓고 믿는 게 아니다. 눈 딱 감고 무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과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에 비추어 성경 기록을 비교 연구하면서 믿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과 내 신념을 내려놓고 마음을 늘 겸허하고 부드럽게 가지고 오류가 없는 말씀에 정상적으로 비추어 아집을 버리며 인정하고 것이다.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지만, 신념은 내가 확실히 보았다는 생각이나 볼 줄 안다는 자세와 비슷하다. 그래서 신념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 생각을 선택한 '나'를 믿는 것인 경우가 많다. 그것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주변에 많은 잡동사니를 새로 창조하고 겹겹이 없던 벽을 만들어놓고도 자기는 그것을 지킨다고만 알고 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온전한 말씀과 율법을 가지고도 최악의 위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념은 위험하다.

믿음으로 걷는 것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믿는 것이다. 그 줄은 바른 성경에 묶어 고정시켜야 한다. 오늘도 저들은 세상의 철학과 고상해 보이는 정신적 산물에 줄을 대놓고 그곳을 향해 겸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보내며 성경을 그 잣대로 재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유치한' 반론을 내려다보는 신학자 행세를 하고 있다.
다단계의 어리석은 감언이설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불법과 신용불량의 굴레에 들어가 있고, 무용지물인 옥장판만 산더미처럼 남는 법이다. 신념을 신봉하는 이들도 육신의 장막을 벗는 그날이나 되면, 자신들이 산더미처럼 쌓아올렸던 '신념의 장막'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음도 깨달을 것이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7688

2011년 7월 6일 수요일

빗나간 "예수님 따라잡기" / 김재욱

1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당연히 예수님의 삶의 태도를 본받는 것이 성도의 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본받으면 곤란하다. 그러나 개념 없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예수님을 따라한다. 오죽하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겠는가.

성경을 바르게 나누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대략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크고 작은 오해가 많이 생긴다. 이런 이들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좋은 말은 다 끌어다 삶에 대입시키고 마구잡이로 해석하며 적용하는 일에도 익숙하다.

성경을 안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겠으나 이런 태도로는 평생 발전이 없다. 그들은 자기 방식의 큐티와 묵상에서 얻는 깨달음에 스스로 감탄하여 그 생각, 자기 아이디어를 평생 신봉하며 끌어안고 살기도 한다. 또한 그런 어설픈 깨달음을 남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강단에 서는 이들도 저지르기 쉬운 실수이다.

조금 열심 있는 사람이 더 큰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다른 역본들을 통해 성경이 이상한 것을 발견한 어떤 사람이, 천국이 침노하는 자의 것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천국'을 여전히 '왕국'이 아닌 죽어서 가는 곳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그곳을 '폭력으로 빼앗으려는 자'가 마귀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열심은 있고 남도 가르쳐주고 싶은데 모르니 이렇게 엇나가는 것이다.

누구라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고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있는 부분도 간과한다면 성경을 배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2

이런 CCM이 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생명을 건지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표현한 노래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필요하다면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 희생의 제물 필요하시다면

내 생명 제단 위에 드리니 주영광 위해 사용하소서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죽어야 다시 사는 주의 말씀 믿으며

한 알의 밀알되어 썩어지리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의 마음은 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사람은 죄인을 위해 희생하고 싶어도 부패한 피를 지닌 자기 생명으로는 죄인을 위한 제물이 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복음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알면서도 방치한다면 더욱 심각한 일이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이런 노랫말을 만든 모양이다. 죄인을 위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마쳐 놓으셨다. 더 할 일이 없고 다른 제물이 필요가 없으며, 주님이 죄를 제거하신 사실을 믿고 인정하면 된다. 장엄하고 숙연하며 희생과 아픔을 말한다고 해서 다 좋은 노래는 아니다.

3

사람들이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 하는 큰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능력이다. 그분의 능력을 열렬히 사모하는 이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 같은 것은 생각 못해도 마귀를 쫓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앉은뱅이는 못 일으키면서 위장병과 갖가지 속병을 고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보여 줄 수 없는 것들', 서로 확인할 수 없는 일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고, 직분이나 체험 경력에 따라 받거나 타인에게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성도 개인의 자격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마치 장풍을 쏘듯이 자기에게 언제든 그런 능력이 있기를 늘 바라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크리스천 엑스맨(?)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면 곤란한 말씀도 많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 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로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5~18)

이런 말씀을 그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믿는 자들이 다 이런 능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닌가. 이것에 대해 무어라 말하겠는가? 이 말씀을 보고 뱀을 집어들거나 치명적인 독이라도 마신다면 그것은 마치 <슈퍼맨>을 시청한 뒤 빨간 보자기를 두르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어린아이와 비슷한 결과를 맞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런 무모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럼 성경이 틀렸는가? 그렇게 말할 순 없고... 이럴 때 사람들이 피해가는 방법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만큼 능력이 생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한다.

이럴 때 그들은 극보수주의와 문자주의의 극단적 신앙이 문제라며 말씀을 유연하게 해석하고 거기 담긴 뜻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영해하고 어느 부분을 문자 그대로 믿을 건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표현이지만) 극보수주의나 문자주의적 신앙이 아니면 존립할 수도 없는 것이 기독교이며 그것이 아니면 믿을 필요도 없는 것이 또한 기독교이다. 결국 그들은 창세기 1장 1절도 믿지 않는 것이며, 천지창조가 사실이 아닌 사람에게는 궁극적으로 아무 교리나 신앙적 논리도 전혀 쓸데없는 것이다.

위의 말씀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 확증해 주시니라. 아멘. (막 16:20)

그런데 왜 지금 시대에는 그런 일을 볼 수 없을까. 심지어 능력의 사도 바울조차도 없어왜 그런 신기한 능력들을 잃고 아픈 제자 디모데에게 민간요법 수준의 처방만을 내리거나 자신의 질병도 해결하지 못했을까.

우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병이 낫는 것, 방언하는 것,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각자의 희망사항인 것도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사람이 더 많이 원하거나 오히려 그릇된 것을 구하면 이루어질 리가 없고 잘못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약의 성도에게 적용할 수 없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가지고 자꾸만 우리에게 맞추려다 보면 말씀이 틀려 보이고 궤변이 도입된다. 예수님께서 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구속이 완성되고 엄밀한 의미에서 신약이 시작됐지만 아직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거의 전부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되어야 할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행전의 시작 부분을 보면 땅에서 주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인 위의 상황에 이어지는 내용이 나온다.

또 그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느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내게서 들었나니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그런 구역을 지정하시지 않는다 해도 제자들에게는 이방인이나 교회, 신약 성도 등은 개념조차 없었다. 또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마가복음 마지막 부분의 말씀처럼 표적이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 (고전 1:22)

이런 혼란을 분별하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사도행전은, 그래서 시간에 따라 차례대로 기록돼 있다. 기록자인 누가는 첫머리에서 그분이 승천하신 후 그곳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또 그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느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내게서 들었나니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 (행 1:4~5)

기다리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이 유명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예루살렘(유대인) - 사마리아(반쪽 유대인) - 땅의 맨 끝 지역(이방인)의 순서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 된다는 것이다. "임하시면"의 조건부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들은 눈 감고도 이 구절을 외우면서,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이 의미를 알고자 하지도 않은 채 "성령이 임해야" 증인이 된다며 "성령을 받으라"고, 그것도 못 받느냐고 성도들을 쥐어짜고 있다.

4

예수님의 행동이 성도의 표준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성전 상인들에게 분노하신 예수님처럼 한바탕 둘러엎으려 하면서 이것은 거룩한 분노라고 합리화한다. 이를 막으려는 목사는 부흥사를 데려다, 목사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날벼락 맞은, 혈기 부리는 집사 이야기로 입을 막는다. 참 성도라면 하나님을 팔아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일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메시아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지창조의 주로서 능력을 보여 주셨으며, 많은 가르침과 본을 보여 주셨다. 이 중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르게 성경을 분별할 줄 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해 주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마 11:29)

우리는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도 엄청난 능력이나 신기한 은사만을 쫓기 때문에 혼의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성품을 닮아야 한다. 바로 성령의 진짜 열매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섬기고, 감사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전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성경을 보고 행하려는 자세는 좋다고 할 수 있지만 바른 지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작정 예수님을 따르려 하다 보니 제자를 삼는 제자훈련과 신사도 운동 등 열매가 부실한 각종 시스템이 유행하는 것이다. 신약성도라면 각 교회들에 주는 서신서가 지침에 돼야 하며 성령님을 따라 그분의 열매들을 맺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야 한다.

더이상 변천기를 다룬 책들에서 아무 구절이나 뽑아 행하지 말고 시대를 잘 구분해야 한다. 또한 문자 그대로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되돌려놓아야만 바른 분별을 할 수 있는 진리가 맑게 떠오를 것이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7639

2011년 6월 15일 수요일

참된 경배자들이란? / 홍성률

출처 : http://kjv1611.kr/bbs/zboard.php?id=colum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5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오전 11시에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예배당에 갑니다. 그리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를 합니다. 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죄송하고 경배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합니다.
과연 교회(예배당)에 가야만 하나님께 참된 경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4장 20-24절 말씀에는 참된 경배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해 주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이르느니라.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now is).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요4:20-24)

예수님께서는 참된 경배에 대해서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이르느니라.(21)” 고 말씀하십니다.
또“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now is)(23)라고 말씀하십니다.

경배에 대해서 이런 순서가 옳다, 저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연구도 하고 발표도 하고 강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단순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믿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경배할 때가 오는데 그 때는 바로 지금(now is)’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참된 경배는 설교자도 없고, 인도자도 없습니다.
참된 경배는 항상 지금(now is) 경배합니다.
참된 경배는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합니다.

진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람들이 정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정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정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정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일 뿐 참된 경배는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도 필요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지금 아버지께 경배하는 것이 옳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필요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되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4-25)

히브리서 10장 24-2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서로 권면하여 더욱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모이는 일은 경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모이는 목적은 서로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서로를 살펴보고 서로 권면하고 서로 격려하여 사랑과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야만 서로 세워주고 서로의 필요를 알게 되고 서로의 필요를 서로 공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자주 모여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경배란 교회에서 일요일 11시에 경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다면 지금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하시면 됩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참된 경배의 핵심은 “주를 두려워함”입니다.(잠1:7. 9:10)
'주를 두려워함'을 쉽게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경배자들(true worshippers)로 하나님께 발견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5월 31일 화요일

사단의 전략 회의

사단의 전략 회의

역사 속에서의 사단의 전략

“친애하는 마귀 여러분,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하나님과 커다란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였고, 가인을 통하여 아벨을 죽임으로써 첫 번째 순교자를 만들어 내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우리는 유대 교인들의 신앙을 하나의 형식과 의식으로 변질시키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썼는데, 그 결과 유대 교회의 신앙은 바짝 메마른 율법주의로 전락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참 사랑과 진리를 가리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한 후, 열 두 제자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참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자 잠시 우리가 구석에 몰리는 듯 했지만, 우리는 거기에 굴하지 않는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 제국의 사자 굴과 원형 극장에서 한 사람을 순교시켰을 때에 열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급히 우리의 전략을 수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즉시로 핍박을 중단하는 대신, 교회 안에 돈과 세속을 넣어 주었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교회가 재물과 탐욕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인간 대리자들을 통하여 교회 안의 진리를 제거하고 오류를 퍼트리는 데에도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가 기독교회 안에 슬며시 넣은 가짜 복음과 거짓 교리들은 지금까지 남아서 현대 기독교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중세기는 정말 우리 마귀들의 전성 시대였습니다.

일천여 년의 긴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갈 무렵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개혁자들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면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으려고 하였고, 하나님의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중세기 동안에 교회 안에 침투시켰던 거짓 복음과 가짜 교리들의 실체가 혹시라도 드러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조였는지 모릅니다. 16세기에 일어난 마틴 루터의 개혁 운동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자,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후예들은 개혁자의 정신을 잃어버렸고 뜨겁게 불타올랐던 개혁 운동의 불길은 꺼져갔습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반격을 가했습니다.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사랑하는 대신에 자신이 속한 교파를 사랑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의도한 바대로 교단 제일주의에 빠진 개혁자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대신 교단과 교단 사이에 높은 벽을 세우고 서로 자신의 교세를 크게 확장시키는 일에 골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로서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여 중세기에 무너진 진리를 회복시키는 일에 매진하는 대신에 개혁자들의 실수와 미처 깨닫지 못한 오류들의 구덩이에 앉아서 교파와 교회의 성장을 즐겼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과학과 공업이 크게 발전되면서, 교통이 발전되면서 한동안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듯 보여서 우리가 긴장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은 그리스도인들을 물질만능주의의 파도에 휩쓸려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유사 이래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와 함께 그리스도 교회도 부와 힘을 상징하는 거대 교단 속에서 풍요로움을 즐겼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사단의 전략

사랑하는 마귀 형제 여러분들이시여,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시대에 돌입하였습니다. 이제부터의 전쟁의 승패야말로 우리 모두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이 마지막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을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세속적 정신과 오류로 인하여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기도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세속에 깊이 몰입되어 있는 심령과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그 방향과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허공에 던져지는 그들의 기도는 단지 물질과 복에 매달린 어리석은 요구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의 설교를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설교는 지금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와 정치와 사회 문제로 채워져 있고, 의와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성경의 복음 그대로를 정확하게 강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마지막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중요한 예언서를 강론할 것에 대해서는 아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류와 무지로 혼탁해진 그들의 설교가 아무리 크게 외쳐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의 생애와 마음을 하늘로 이끌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내가 이 마지막 시대에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관건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비록 그들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매 주일마다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믿도록 해놓고, 그들의 시간을 우리가 장악하기만 하면 그들의 마음과 생애는 불신자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들을 사소한 일로 바쁘게 만들면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 버는 일로 바쁘게 만드십시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좇는 일에 모든 시간을 소비하도록 유도하십시오. 사람들의 지출을 가능한 한 늘리게 만들고, 그 빚을 갚기 위하여 불철주야로 일하게 만드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 호기심을 일으킬만한 물건이나 제품을 광고하는 전단물을 정기적으로 배포하고, 신용카드를 많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여신 한도를 크게 올려 주십시오.

행복은 물질에서 온다는 허상을 믿도록 가르치고, 아내들의 사치심을 부추겨서 남편들로 하여금 하루에 적어도 10시간 이상 일하도록 만들고 일주일에 7일을 일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도록 만드십시오. 필요하다면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도록 유도하고, 가정을 지켜야 되는 어머니도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직업 전선으로 내몰아 가십시오.
가족의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계속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도록 설득하십시오. 일단 여인들로 하여금 밖에 나가 일한 후에 파김치가 되어 저녁에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들면, 그들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하여 정성 어린 식사와 환한 미소를 제공할 여력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짜증과 신경질과 투정이 자주 새어 나오게 될 것이며,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가정에는 조그만 일로도 다툼과 투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고, 결국에는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끌려가는 케이스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돈과 이기심을 채우는 일로 인하여 극도로 지쳐있습니다. 하루 종일 과로한 일을 한 후에 그들이 귀가하는 저녁 시간에는 자극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뉴스와 드라마를 보도록 환경을 조성하여 그들의 양심에 속삭이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만한 여유를 도무지 가질 수 없도록 몰아가십시오.

모든 가정과 상점과 직장마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음악을 무차별하게 퍼부으십시오. 어디를 가든지 신문과 잡지와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도록 현대 사회를 만드십시오. 대형 광고판과 연예 뉴스와 비디오와 영화를 통하여 불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그림과 말들이 계속해서 튀어 나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선정적 그림과 영화를 다량으로 공중에 살포하고, 결혼에 대한 가치를 혼돈케 하여 청년들의 도덕과 윤리와 신앙을 완전하게 무너뜨려야 합니다. 각종 토크 쇼에 나오는 말 잘하는 사회자와 출연자들을 통하여 이 사회의 가치관과 풍조를 부도덕과 불법으로 망가뜨리십시오. 그리하면 남자가 남자와 연애하고, 여자가 여자와 결혼하는 동성 연애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이 지성인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선은 실현 불가능한 특별한 것이고, 악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의 일면인 것으로 부각시키십시오.

일주일 내내 사람들의 마음을 항상 바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전략입니다.
사람들이 헛된 것에 소모하는 시간이 많을 수록 그들이 하나님께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가정마다 컴퓨터를 살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각 컴퓨터마다 초고속 통신망을 연결시키십시오. 날마다 그들에게 흥미로운 광고 이 메일을 무수히 보내고, 각종 정보와 스팸 메일을 다량으로 퍼부어 그들의 머리를 혼미하게 만드십시오.
또한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휴대폰을 갖고 다니는 풍조를 유행시켜서 마음과 정신이 조용한 가운데 거룩한 하늘의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전혀 주지 마십시오. 아이들도 각종 시험 공부와 스포츠와 음악 레슨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만들고, 어려서부터 이기적이고 경쟁에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상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어야 합니다.

어린 나이부터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에 보내게 하여 부모와 격리하여 살도록 유도하면, 그들이 나이가 들어 사춘기가 되어 부모와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어린 나이부터 성과 마약과 노름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 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단의 전략

만일 사람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이 다니는 교회를 이용해야 합니다. 교인들 사이에 불화와 경쟁이 멈추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각종 영성 훈련이나 제자 훈련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맺어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목사들과 교회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수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에 골몰하게 만들면, 그들은 진리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채 교인들에게 숫자와 크기를 강조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의 원칙들은 점점 더 내려가게 될 것이며, 교회는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들만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보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예배 방식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모으게 될 것이며, 성경의 진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은사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기적들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내줌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훔칠 수 있는데, 그것으로 그들은 우리의 완전한 대리인들이 될 것입니다. 만일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 일과 교회 안에 각종 기적과 은사를 넣어주는 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교회는 우리의 가장 효과적인 서포터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결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무당이 귀신을 모시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이슈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하는 설교를 하도록 만드는 것도 매우 효과적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교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과 사회적 이슈를 주장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서게 될 것이며, 급기야는 데모와 무력 투쟁도 불사하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마귀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는 일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시간을 빼앗아 낼 수만 있다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한 채 세상과 교회 안을 방황하다가 그들의 삶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내가 여러 마귀 형제들에게 꼭 드리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 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

온 세상 사람들은 지금 사단이 운전하는 급행 열차에 타고 있다.
열차의 종착역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 열차는 가득 차 있다.

그 급행 열차는 너무나 빨리 달리고 있기 때문에 열차에서 뛰어 내리고 싶어도 온 몸을 던지는 위험을 각오하고 뛰어 내리지 않는 한 내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은 채 급행 열차에 몸을 맡긴 채 무작정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는 결정을 하기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런 결정이나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이런 저런 행로에서 기회들을 주실 때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서 인생은 사단이 인도하는 급행 열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인생 최후의 날에 마지막 호흡을 하면서 후회의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게 된다. 이렇게 끝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단순한 마음과 단순한 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순한 환경이 필요하다. 조용하고 소박한 환경 속에서 하루를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를 만나서 대화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와 시간이 허락되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
그분의 진리와 의와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연구하고 명상할 수 있는 환경과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는 항상 단순한 것에 있다. 복잡한 도시 속에서 사단이 던진 그물에 잡힌 꽁치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인생은 짧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속에서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경건하고 단순한 삶을 위해서는 뼈를 깎아내는 듯한 결정과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한 삶을 위해서는 단순한 가정 경제가 필수이다. 빚과 지출을 줄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의복과 차와 집이 지금보다 더 소박해져야만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해질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의 탐욕과 욕심을 버려야만 단순한 삶이 실현될 수 있다.

2011년 5월 24일 화요일

성령의 열매는 누가 맺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



만약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노력으로 맺혀진다면,

누더기 같은 우리의 의를 우리 마음대로 성령의 열매로 탈바꿈시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성령님의 충만함을 이 땅의 삶 속에서 직접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사람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겁니다.

2011년 3월 17일 목요일

2천 바스인가, 3천 바스인가? (왕상7:26, 대하4:5) / 김문수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6719


개역: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넓이만하고 그 가는 백합화의 식양으로 잔가와 같이 만들었으니 그 바다에는 이천 밧을 담겠더라(왕상7:26)

개역: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넓이만 하고 그 가는 백합화의 식양으로 잔 가와 같이 만들었으니 그 바다에는 삼천 밧을 담겠으며(대하4:5)

솔로몬이 만든 바다(molten sea)에 대하여 열왕기상과 역대하가 소개하는 정보가 서로 다릅니다. 열왕기상에는 그 바다에 2천 바스를 담을 수 있다고 했는데, 역대하에는 3천 바스를 담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도라에몽의 4차원 주머니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그릇이길래 용량이 2,000 바스가 되었다가 3,000 바스가 되었다가 할까요?

그래서 기독교 안티 사이트에서는 이런 자료를 가지고 성경 말씀에 오류가 있다고 공격합니다. 기독교 안티 사이트의 열성 멤버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대부분 신학교 공부를 마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신학교에 다니면서 발견한 각종 오류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잘못된 내용을 배웠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이런 문제는 현대 영어 역본들을 읽어보아도 마찬가집니다.

NIV: It was a handbreadth in thickness, and its rim was like the rim of a cup, like a lily blossom. It held two thousand baths(왕상7:26).

NIV: It was a handbreadth in thickness, and its rim was like the rim of a cup, like a lily blossom. It held three thousand baths(대하4:5).

NIV에는 서로 다른 정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It held two thousand baths", "It held three thousand baths" 도대체 어느 것이 맞습니까?

NASB: And it was a handbreadth thick, and its brim was made like the brim of a cup, [as] a lily blossom; it could hold two thousand baths(왕상7:26).

NASB: And it was a handbreadth thick, and its brim was made like the brim of a cup, [like] a lily blossom; it could hold 30000 baths(대하4:5).

NASB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it could hold two thousand baths", "it could hold 30000 baths" 이 두 문장은 완전히 동일한 형식의 문장이고, 같은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바다의 용량만 각각 2천과 3천으로 서로 다릅니다.

NKJV: It was a handbreadth thick; and its brim was shaped like the brim of a cup, like a lily blossom. It contained two thousand baths(왕상7:26).

NKJV: It was a handbreadth thick; and its brim was shaped like the brim of a cup, like a lily blossom. It contained three thousand baths(대하4:5).

NKJV(not King James Version)가 킹제임스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되 고어 표현만 현대어로 바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위 두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It contained two thousand baths", "It contained three thousand baths"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열왕기상이 맞다면 역대하는 거짓이 되고, 역대하가 맞다면 열왕기상이 거짓이 됩니다. 이 부분이 오류이건, 저 부분이 오류이건 간에 어쨌든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비판론자들의 주장이 대단히 설득력있게 들립니다.

개역이나 NIV, NASB, NKJV 등을 기초로 하여 집필한 수많은 훌륭한 신학자들의 주석이나 유명한 설교자들의 글 역시 이런 오류를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손에 있는 성경 본문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주석에서 "이 부분은 필사자들이 실수로 잘못 기록한 부분이다.", "사본이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에 누군가가 실수로 숫자를 잘못 적었다." 혹은 "성경은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 중에 정말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이런 오류들을 볼 때, 나는 성경 말씀이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으며, 또한 그렇게 성도들을 속일 수 없다."고 하며 목회를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그렇게 자세히 안 읽으니까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신학자나 목회자일수록 저런 역본들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기 때문에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성경 말씀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 이런 오류가 있을까요?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이 순수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하여 변개된 성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고로 역대하 4장 5절을 히브리어 성경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 그리고 개역으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역대하 4장 5절에서 바다의 용량을 나타낼 때 사용한 히브리어 동사는 두 개가 있습니다.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쿨(스트롱 코드 3557)과 하자크(스트롱 코드 2388)라는 두 개의 동사가 있는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receive와 hold 라는 두 개의 동사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을 열왕기상 7장 26절과 마찬가지로 쿨(3557) 하나만 번역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위 그림에서 한글 개역을 보면 <2388>은 "담"이고, <3557>은 "겠으며"로 번역했는데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어를 이렇게 하나의 단어로 바꾸어 번역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현대 영어 역본들 역시 이런 식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열왕기상 7장 26절의 동사도 hold(contain)이고 역대하 4장 5절의 동사도 hold(contain)인데, 용량 표기만 2,000과 3,000으로 서로 다르니 그들의 번역으로 읽으면 성경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진리의 성경 말씀에 있는 오류가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변개함에 따라 나타나는 오류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KJV: And it was an hand breadth thick, and the brim thereof was wrought like the brim of a cup, with flowers of lilies: it contained two thousand baths(왕상7:26).

KJV: And the thickness of it was an handbreadth, and the brim of it like the work of the brim of a cup, with flowers of lilies; and it received and held three thousand baths(대하4:5).

킹 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열왕기상의 동사는 contain이고 역대하의 동사는 receive and hold 입니다. 즉 이 두 말씀은 동일한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정보를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My car has a gas tank which holds 30 gallons; it contains 20 gallons of gas now."
(내 차의 연료 탱크 용량은 30 갤런인데, 지금은 20 갤런의 연료가 들어 있다.)

위 문장이 모순되는 내용입니까? 최대 저장 가능한 연료 용량이 30 갤런이라는 것과 현재 연료통에 남아 있는 연료량이 20 갤런이라는 것은 상충되는 정보가 아닙니다. hold는 총 수용할 수 있는 용량(capacity)을 말하고, contain은 현재 저장하고 있는 양을 말합니다.

열왕기상은 "바다에 물을 2000 바스 담았다"(It contained)라고 기록하였고, 역대하에서는 "그 바다는 3000 바스의 물을 받아서 저장한다"(received and held)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대하 4장 5절은 최대 저장 가능한 물의 양이 3천 바스라는 뜻이고, 열왕기상 7장 26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물을 3분의 2까지 채워서 사용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개역이나 현대 영어 역본들은 부실한 번역을 통해서 성경에 없는 오류를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 넣었지만, 원래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오류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흠없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말씀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흠정역 성경은 이 영어 성경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흠정역 성경으로 이 두 구절을 비교하며 읽어도 우리는 이 말씀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흠정역: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 하였고 그것의 가장자리는 잔의 가장자리같이 백합의 꽃들과 함께 만들었으며 그것은 이천 바스를 담았더라(왕상7:26).

흠정역: 바다의 두께는 한 손 너비만 하며 그것의 가장자리를 잔의 가장자리를 만들 듯이 백합의 꽃들과 함께 만들고 바다에 삼천 바스를 받아 둘 수 있게 하니라(대하4:5).

이처럼 사소한 부분 하나에도 오류가 없는 정확한 번역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이 탁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역본들을 사용하는 성도들은 성경을 대충 읽고 적당히 넘어가야 은혜가 되지, 자세하게 읽고 철저하게 공부하면 수두룩하게 발견되는 오류들 때문에 읽을수록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고 의심만 생기게 됩니다. 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따지지 말고 무조건 아멘 하고 받아들여야 은혜가 된다고 하는지 이해가 됩니까? 성경 말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면 그들의 역본에서는 오류들이 계속 발견되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목사님들도 설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성경 말씀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직접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11년 3월 3일 목요일

기원과학은 증명될수 있는가? / 김재욱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6540


가정에 의한 가설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살았던 많은 이들이 인류의 기원과 지구의 기원, 나아가서 우주의 기원과 모든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며 살다가 죽어갔다. 지금 세상을 채우고 사는 이들에게도 '기원'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숙제이며 누구도 풀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졌다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적인 경로로, 과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또 철학적으로 나름의 해답을 지니고 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가장 타당하고 신빙성이 있을까? 대개의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과 과학 중에서 과학만이 믿을 만하고 검증된 것이라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어떤 진보된 과학적 연구 방법도 지구와 우주의 나이, 또 기원이 된 사건이나 물질의 생성과 변화를 증명할 수 없다. 아무리 신빙성 있는 설이라 해도 증명되는 것은 아니며, 믿든지 안 믿든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기원에 관한 모든 연구 결과는 과거에 대한 어떤 '가정(假定)' 하에 산출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물이 교과서에 실리면 신빙성이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밝혀낸 것들에는 한계가 있으며, 사람들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셀 수 없이 많은 의문이 우리에게 남아 있으며, 그저 '자연의 신비' 또는 '경이'로 표현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일이 많다.

과학자들은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탐구심으로 무언가 결론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다양한 실험과 계산과 추측을 통한 가설을 제시해 왔다. 예컨대 '빅뱅' 이론 같은 것이다. 주먹만 한 우주의 알이 폭발하고 팽창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최근 이 이론은 거의 폐기되고 있다.

2011 년 초에 방영된 BBC의 다큐멘터리(Horizon : What happened before the Big Bang, 오른쪽)에서는 빅뱅 이론에 변화와 대안이 필요하다는 데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음을 인정했고, 그 대안이 되는 인플레이션 이론과 그에 대한 또 다른 반론 등 다양한 것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등장한 과학자들은 이론 발명가와 같았고, 그것을 유추해내서 특허라도 얻으려는 사람들 같다. 그들은 서로의 이론에서 모순점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유통기한이 1년 미만인 이론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이미 국내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중에 인플레이션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있다(사진). 이는 진화적 방법의 자연발생설 외에 다른 것은 도무지 알려고 하지도 않겠다는 의도이며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강요하겠다는 의도 아닌가.
그런 이론들 중에는 많고 적게 우주의 비밀을 밝혀낸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하나의 추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를 그 기원의 시간대로 데려다 주거나 그 시간을 끌어와서 재현해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만들어진 컴퓨터 그래픽과 장엄한 음악,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타이틀이 마치 그런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만일 누군가 세계적인 과학자의 이론을 믿는다면, 그는 자기가 과학적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고 설명자는 자기가 설명을 잘했거나 굉장한 이론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듣는 사람의 세계관이 그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 사람의 결정은 대부분 그의 세계관이 좌우했다는 의미이다.
과학자라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기원과학에 있어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연구와 발표만이 과학이 아니며,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주와 생물은 진화되었다는 굳은 믿음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는 각종 종교와 생물의 종교적 기원에 관한 혐오자이며 신 다윈주의의 수호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지적 설계론 등 다른 것으로 세상의 기원과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것을 극도로 거부한다.

그럼에도 다큐멘터리 영화 <추방 : 허용되지 않는 지성(Expelled : No Intelligence Allowed)>에서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인 벤 스타인(B. Stein, 유대인이지만 크리스천은 아님)이 '지적 설계론'이 생명의 기원에 대해 해답을 줄 가능성에 대해 묻자, "다윈 과정에 의해 진화된 고도의 생명체가 지구에 씨를 뿌렸을 수도 있으며, 혹시 그 증거로 생화학이나 분자생물학에서 설계자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다. 그 존재도 설명 가능한 과정을 거친 존재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벤스타인은 독백으로 반문한다.

"잠깐, 도킨스가 지적 설계론을 인정한다고?"

그는 이어서 말한다.
"도킨스는 지적 설계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형태의 창조주를 거부한 것이었다."

도킨스는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생물의 구조들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것을 '강력한 환상’이라고 표현했다.(1) 그렇게 보이지만 환상으로 취급하고 믿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생각은 프랜시스 크릭(F. H. Crick)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생물학자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들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진화한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꾸준히 지켜보아야 한다." (2)

대개 과학자에게는 편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편견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것이 사고와 결정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기원과학을 가르칠 때는 어떤 사람이 어떤 편견과 신념을 가지고 가르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특정한 신념과 세계관에서 탄생한 학문이나 이론만을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양한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 먼저 그것이 실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현행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기원과학에 관한 이론들은 마치 가능한 사실인 양 교과서에 수록된 것은 물론, 다른 학설들은 발붙일 여지조차 주지 않고 있다.


기원과학에 대해 명확한 기준과 관점을 지닌 교사가 교과서를 집필하고, 가능한 한 편견 없이 이론들을 제시하여 학생들에게 각자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 과학적 사고 함양의 기본적 자세가 아닐까. 과학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언제든 새로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가능성은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하나의 시각에 가두고 그것이 그저 한 분야의 가설에 의한 과학임을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획일적인 사고로 몰아가는 것은 교사와 교육계의 직무유기이며 이에 관심조차 없는 부모들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열린 마음으로 과학적 사고를 크게 열어줄 포용적인 교육정책과 자유로운 연구 및 토론 분위기를 촉구한다.

(1) R. Dawkins, Zoololist and Professor for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Oxford University "Darwin Triumphant:: Darwinism as a Universal Truth," in Robinson M. H. & Tiger L., eds., Man & Beast Revisited, Washington DC: mithonian Institution Press, 1991, p. 24.

(2) F. H. C. Crick, What Mad Persuit(열광의 탐구): A Personal View of Scientific Discovery 1988, London: Penguin Books, 1990, Reprint, p. 138.

2011년 2월 18일 금요일

사랑이란...

사랑이란 ... 이라는 질문에 가끔씩 답을 고민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이란...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던 어느 외국 만화가의 단편 만화 시리즈도 생각나고,
TV에서, 혹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밤을 새며 들었던 사랑이란... 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지했던 대답들도 생각이 납니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왔고, 소설로, 때로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사랑이란... 이라는 질문에 그때 그때마다 다른 대답들을 고민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어릴때에는 가슴이 터질듯이 두근거리는 그런 느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대학생 시절 결혼한 선배들에게 들어왔던, 사랑은 의리라는 식의 메말라버린 감정을 감싸않는 듯한 대답에 그건 사랑이 아닐거라고 대답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항상 사랑이란... 이라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은 찾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 저는 고3때에 예수님을 알게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성경에 대해 배운적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더 알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수험생 동안의 많은 시간동안 쌓였던 것들을 털어내느라 방황하며 지내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구원받은 이후에도 사랑이란... 이라는 질문에 고민하며 청년의 시절을 보낸것 같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이곳 독일땅에서 15년이라는 시간동안 머무르면서 결혼도 가고, 아이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비로소 사랑이란... 이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사랑이란 배우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제가 대학시절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그런 대답들이나 제가 말한 대답이나 별반 차이가 없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는 가장 확신있는 대답입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성경이 가르쳐주는 사랑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고민했었습니다. 저는 제 아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성경이 가르쳐주는 사랑의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에 역시 또 고민했었습니다.

제가 아직 세상속에 살면서 육신을 벗지 못한 탓일까요?
아직 성화가 되지 않아서 일까요?
죄 많은 사람이라 천성적으로 어쩔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식으로 제 자신에게 대답하며 넘어가는 것을 과연 언제까지 해야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사랑에 대한 답을 얻은 제게 이제는 할 일이 생겼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히 사랑을 배울것입니다.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참 사랑을 가르쳐주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배울것입니다.

성경속에 기록해 두신 많은 기사들과 편지들을 읽어가며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을 더 알아가며 바른 사랑을 배워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사랑을 배워나갈 때에 제 안에 계신 주님께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주실것이라 믿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이 더이상 낮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장 19절.

2011년 2월 17일 목요일

모세의 빛나는 얼굴 (출34:35) / 김문수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을 보고 모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나는 것을 보았으므로 모세가 그분과 말씀을 나누러 들어갈 때까지 다시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34:35).

And the children of Israel saw the face of Moses, that the skin of Moses' face shone: and Moses put the vail upon his face again, until he went in to speak with him.


출애굽기 34장에는 모세가 하나님과 말하는 동안 그 얼굴의 피부가 빛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경 이야기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는 설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그런데 가끔 모세의 빛나는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성경의 기록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때도 있습니다.

이 성경 기록의 핵심은 "하나님과 교제하면 얼굴에 빛이 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을 두려워하자 모세가 베일을 썼다", "모세는 자기 얼굴의 광채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베일을 썼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왜 자기 얼굴을 가렸을까요? 출애굽기 34장과 함께 고린도후서 3장을 대조하면서 이 문제를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 백성들이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두려워하여

소 설이나 영화에서는 도둑이나 자객이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해 복면을 쓰기도 하고,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베일을 쓰기도 하고, 얼굴이 보기 흉한 사람이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기 위해 면사로 얼굴을 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자기 얼굴을 가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당시 용모가 준수한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고, 감추어야할만한 흠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항상 백성들과 대면하여 소통을 해야 하는 지도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얼굴을 가린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면 그런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보니, 보라, 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나므로 그들이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였더라(출34:30)

그러나 돌에 써서 새긴 사망의 직무에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영광 곧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거든(고후3:7)

성 경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세가 베일을 써야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조폭의 흉악한 얼굴이 무서우면 멀리 도망을 치거나 경찰과 동행해야지, 그가 복면을 쓴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베일을 쓰거나 벗거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모세일 뿐입니다. 성경은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기록할 뿐, 모세가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얼굴을 가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즉 모세가 쓴 베일은 백성들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처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 모세가 사라져가는 영광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두 번째로 거론되는 것은 "모세가 자기 얼굴의 광채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백성들이 볼까봐" 두려워해서였다는 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모세는 자기 얼굴에서 빛이 나게 되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백성들 앞에서 그 자랑스러운 영광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는데 그 빛이 점점 사라져가자 자기의 그런 모습을 백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베일로 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제일 처음 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제법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Q.T.나 명상 등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깊이 교제할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나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 영성을 계발할 수 있다고 하는 은사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성경적 근거로 고린도후서 3장 7절을 제시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성경적 근거가 아니라, NIV적 근거라고 해야 합니다.

사라져 가고 있는 영광인가, 없어질 영광인가?

NIV: Now if the ministry that brought death, which was engraved in letters on stone, came with glory, so that the Israelites could not look steadily at the face of Moses because of its glory, fading though it was,(고후3:7)

NKJV: But if the ministry of death, written and engraved on stones, was glorious, so that the children of Israel could not look steadily at the face of Moses because of the glory of his countenance, which glory was passing away,

흠정역: 그러나 돌에 써서 새긴 사망의 직무에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영광 곧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거든

KJV: But if the ministration of death, written and engraven in stones, was glorious, so that the children of Israel could not stedfastly behold the face of Moses for the glory of his countenance; which glory was to be done away:

현 대역본들 중에서 NIV, NASB, NKJV 등은 "was fading", "was passing away" 라는 과거진행형 표현을 사용하여 모세의 얼굴에 있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그것을 "없어질 (was to be done away) 영광"이라고 했지 그 영광이 점차로 사라져가고 있었다고 진행형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지만 그것은 곧 없어질 영광이었고, 잠시 후에는 사라진 것이 되었습니다(고후3:13).

그러므로 모세가 점점 희미해져가는 영광을 안타깝게 여기고, 지도자로서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기 얼굴에서 그 영광이 사라져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적합한 해석이 아닙니다. 영성 훈련 지도자들은 종종 하나님과의 교제의 유익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야광 물체를 빛에 쪼였다가 어두운 곳에 가져가면 빛을 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빛이 희미해진다. 휴대폰 배터리도 쓰다보면 전기를 소모하여 다시 충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도 영성 운동을 통해서 계속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소멸되거나 닳아 없어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백성들이 영원하지 못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세 번째 견해는, 모세가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하지 못한 것에 주목하지 말고,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3장 13절과 출애굽기 34장 32, 35절 말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고후3:13)

한글킹: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이 없어질 것의 종말을 지켜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얼굴에 수건을 가리는 것같이는 아니하노라.

흠정역: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세가 자기 얼굴을 베일로 가린 것 같이 하지 아니하노라.

KJV: And not as Moses, which put a vail over his face, that the children of Israel could not stedfastly look to the end of that which is abolished:

고 린도후서 3장 13절에서 한글킹제임스역은 개역의 번역을 따라 "없어질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which is abolished"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동 완료형"입니다. 따라서 "없어질 것"이 아니라, 흠정역과 같이 "사라진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라진 것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도록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여기에서 "사라진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잠깐 있다가 없어진 그 광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을 보고 모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나는 것을 보았으므로 모세가 그분과 말씀을 나누러 들어갈 때까지 다시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34:35).

그 뒤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므로 그가 주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령으로 주니라(출34:32).

오 늘날 한국 교회의 부흥사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교인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자기의 존재감과 가치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공중에서 금가루가 떨어진다거나 사람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나게 할 수만 있다면 대규모 집회를 열어서 말씀은 뒷전으로 하고 사람들에게 그 빛나는 얼굴을 보여주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아왔을 때, 그들은 그로부터 두 가지 정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의 얼굴에서 밝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광채였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눈에 보이는 시각적 정보는 차단해버리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청각 정보만 남겨두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 보이다가 없어질 영광을 보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를 원했습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눈에 보이는 신비주의적 체험을 쫓아다니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고후4:18).

2011년 2월 10일 목요일

KJV 성경의 400 주년의 기념으로 NIV 성경을 가지라고?

개인적으로 아이패드를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프로그램도 이것 저것 다운받아서 써보기도 했었는데, 그 프로그램들 중의 하나가 YouVersion 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래의 메일은 YouVersion 이라는 회사로부터 조금 전에 받은 메일입니다..

---
Limited Time: NIV Available Offline on YouVersion

2011 marks the 400th anniversary of the publication of the King James Version (KJV) of the Bible.
To celebrate this milestone of making God’s Word available in the common language of the people, all throughout this year, YouVersion will be highlighting several special events and opportunities that will make it easier than ever to access, engage and share the Bible.


The first event we’re excited to tell you about is a special 400-hour promotion made possible
through a partnership with Biblica and Zondervan. Exclusively through the Bible App™ you’ll be able to download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using an iPhone, iPad, iPod touch or Android device…absolutely free. Downloading the NIV means you’ll be able to read it anytime, anywhere—even when you can’t connect to your service provider or the Internet, and after the 400 hour promotion is over. This special offer only lasts for a limited time, starting THIS SATURDAY, February 12, at 8:00 PM U.S. Eastern Time (GMT-5) and ending at 12:00 p.m. EST on Tuesday, March 1, marking the first availability of the NIV update in print. For more details about the availability of the NIV offline on your mobile device, follow http://blog.youversion.com.


And even if you don’t have an iPhone or Android device to take advantage of this first offer, we have something for you, too. We continue adding new reading plans to help you connect with God’s Word, with more than 60 available now! One seasonal example is the 5-day “Love and Marriage” plan. If you and your special someone start reading it together now, you can wrap it up just in time for Valentine’s Day! You’ll find it under “Topical” in the Bible App’s Plans, or at http://www.youversion.com/reading-plans/love-and-marriage.

YouVersion
would like to thank Biblica and Zondervan for making the NIV available
offline. You can learn more about both of these organizations at their
web addresses below.


God has already done so much in 2011. We’re looking forward to seeing where
---


He takes us as we continue to celebrate and share His Word.


Sincerely,
Your Friends at YouVersion

--------------

짧게 요약하면 KJV 400주년 기념으로 NIV 성경을 짧은 시간동안만 공짜로 나눠준다는 겁니다.
KJV 성경이던 NIV 성경이던 뭐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좋아할만한 뉴스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답답하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KJV 와 NIV 성경이 왜 구별되는지,
왜 KJV 가 40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읽히는지,
왜 NIV는 YouVersion 이라는 회사가 KJV 처럼 애초부터 공짜로 나눠주지 못하는지..
이런 등등의 질문에는 아마 생각해본적도 없을겁니다.


KJV 성경의 400 주년 기념으로 NIV 성경을 나눠준다구요?

도대체 한번이라도 두 성경을 비교하며 읽어보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겁니까?

역사 교과서로 이사해 온 공상과학 소설? / 김재욱



위 사진은 뗀석기(타제석기)와 간석기(마제석기)의 모습이다. 뗀석기란 돌에서 깨뜨려서 나온 형태 자체의 돌을 그대로 사냥이나 취사, 벌목 등에 활용한 것이고, 간석기란 돌을 필요한 형태에 맞게 돌도끼와 칼, 망치 등으로 갈고 제작한 도구라고 한다.

이 내용들은 인류 화석, 즉 단 한 건도 진화의 증거로 활용되지 못하고 허위나 오판으로 속속 드러난 네안데르탈인이니, 오스트랄로피테쿠스(루시), 크로마뇽인, 자바원인 등등 무수히 많은 화석들에 의한 허구적 상상을 바탕으로 수집된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다.

인류 화석의 오류들이 너무 많아지자 최근에는 역사 교과서에 이런 내용들이 실려서, 국사만 해도 고조선까지 오려면 반드시 이런 원시시대 인류의 생활상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그 내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굴 속 모계사회에서 아버지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들에 관한 것부터 시작해서 사냥과 수렵 등으로 동물가죽 옷 하나씩 걸치고 날고기를 먹다가 불을 발견하고 익혀 먹으며 살아온 판에 박힌 이야기들이다.

그렇다 쳐도, 우선 협동하여 사냥을 하려면 서로 의사소통이 돼야 하고, 아무리 간단한 언어라도 그것이 통하기 위해서는 단어에 얽힌 기본 지식들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며 언어학자들의 주장이다.

예 컨대 "멧돼지를 잡자"고 한다면 그 말에 멧돼지의 생김새와 포획 후 용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멧돼지가 아닌 다른 동물들에 대한 개념들이 포함돼 있으며 그것을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야 한다. 또한 '잡자'라는 말에는 그저 잡는다는 의미 외에도 제안하는 의미가 담겨 있고, 함께하는 행동이 내포되어 있으며 '잡다'라는 기본형은 물론 '잡지 않다'라는 부정형을 비롯, 잡는다는 말의 다른 활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잡는 방법과 도구 등에 대한 이해와 과거의 경험 등도 포함된다. 이것이 만일 "우리 산으로 멧돼지를 잡으러 가자."고 한다면 엄청난 개념들이 그 속에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최초의 언어는 서서히 발달할 수 없는 것이며 어느 집단에 동시에 주어져야 하고, 표기법이 아닌 언어 자체의 발명자가 없는 것이다.

간단한 뗀석기를 인류는 얼마 동안이나 사용했을까?

진화론자들에 의하면 원 시 야만인은 그저 뾰족하거나 손에 잡을 만한 돌(뗀석기)을 70만 년 가량이나 도구로 쓰고 나서야 BC 8,000년경에 도구다운 도구(간석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매우 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받아들이고 있는데, 70만년이라고 하면 단군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를 150번 정도 해야 하는 무지막지하게 긴 시간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원숭이 상태로 과일이나 따먹으며 살았다면 모를까, 사냥과 수렵을 하며 몸에 뭐라도 걸치고 간소하나마 문화를 지니고 살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 대인이 원시인이 아니라는 근거 자료는 너무나 많다. 이런 자료들은 너무 심각한 미스터리라서 무신론자들은 외계인 등의 이유를 생각하지만 성경을 믿는 이들이 볼 때는 간단하고 명백한 문제이다. 과학의 원리가 진화가 아니고 퇴화이므로 인간의 지혜도 퇴화되고 있고, 최초의 인간이 가장 지혜로웠음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과 학의 진보로 현대인이 첨단 기기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기술의 축적과 기록의 발달, 정보 저장과 전달 방법의 발달 때문이다. 기록문화의 발달이나 정보 저장의 확대는 발달이 아니라 퇴보를 입증하는 것이다. 점점 더 사람들은 기록과 저장에 의존하고 있는데, 900살 정도를 살던 초창기 사람들은 다양한 지식을 지녔음에도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겨우 수백 년 전의 도자기인 고려청자의 제작 기법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기술로도 청자를 재현할 수 없는 것처럼, 기록과 전수의 축적을 지혜의 증가로 보아서는 안 되며, 다양한 분야가 생겨나고 지식이 증가하는 것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단 12:4).

고작 석기를 만드는 원시인들이 라스코 동굴의 그림을?

고대인의 놀라운 지혜에 대한 많은 증거 중에서 라스코 동굴 그림은 단연 압권이다. 외계에서 떨어졌거나(?) 조작 의혹을 받을 수 있는 별도의 독립적 물건이 아닌 동굴 유적이라 빼도 박도 못할 놀라운 증거가 된다.

프랑스의 베제르 계곡에서는 선사시대의 흔적이 147곳이나 남아 있는 동굴이 25개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이 계곡이 빙하기 말기에 석기시대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의 몽티냐크 마을에서 발견된 라스코 동굴에서는 벽화가 800여 점이나 발견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들소, 말, 사슴, 염소 등 100여 마리의 동물들을 사냥하는 그림이다.

마 치 샤갈이나 이중섭을 떠올릴 만큼 꼼꼼한 표현과 멋진 색으로 화려하게 색이 칠해져 있는데,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대단히 인상적이다. 낙서가 아닌 굉장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의식주 문화를 넘어선 예술에 관련된 것이므로 매우 수준 높은 문화의 발달이 있기 전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재료와 도구에 관한 것은 물론 여러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냥꾼이 활을 사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연대를 훨씬 단축시키는 요소일 것이다.

미 흡하나마 미술을 전공하며 다양한 그림을 그려보고, 20여 년째 그림과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라스코 동굴의 이 그림들은 10년, 20년 연마해서 나오거나 우연히 끄적거릴 수 있는 수준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물 등 피사체의 약화(축약)된 형태라든지 색채감, 역동적 구도, 원근감 등 매우 높은 수준의 그림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도 이곳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여, "인류는 발전한 것이 없다."고 했을 정도이다.

이 그림들의 연대는 17,000년 전으로 추정되었다. 요즘 사람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이 그림은 뭉툭한 돌을 갈아 돌도끼를 만들기도 전, 거의 만 년 전에 해당되는 원시시대이다.




이 그림들을 정말 원시인들이 그렸을까? 물론 아니다. 사람들의 충격은 미술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학설 때문에 더욱 컸다. 인류 초기에는 단순하고 추상적인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다가 점점 사실적인 것을 그리는 방식으로 발달했다는 것이 미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랬듯이 모든 미술은 모방으로 시작해 사실적 묘사를 넘어가야 해체와 추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이지 처음부터 추상의 개념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그림이 아닌 어린아이나 문외한의 낙서에 불과한 것이다.

진화론에 머리를 고정시켜 놓고 거기에 다른 지식들을 꿰어 맞추다 보니, 늘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어리석은 것에서 지혜로운 것으로 나아간다고, 거꾸로 이해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순한 도구들은 누구의 흔적일까?

뗀석기와 간석기처럼 단순한 도구들과 놀라운 회화적 표현 방식의 벽화와의 상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진화론적 연대 개념으로는 도무지 풀 방법이 없다. 외계인이 와서 그리고 갔다는 식의 이야기 외에는 말이다.

이 도구들은 인류 초창기의 흔적이거나 노아의 홍수 직후, 그리고 바벨탑 분리 직후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아담이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잠시 이런 도구들을 사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농업 등 다양한 일이 생기고, 철을 제련하거나 악기를 만드는 등 고도의 문명이 발달했다. 노아의 홍수 당시에도 20~30억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미시간 인디언 석판에 나오는 것처럼) 고층 건물을 짓고 살았으며 고도의 문명을 지녔으므로 대형 배를 건조할 정도의 놀라운 토목기술을 갖춘 노아 가족도 방주에 도구들을 실었을 것이고, 저렇게 단순한 도구들은 사람이 늘어나는 새로운 인류의 초창기에만 잠시 사용됐을 수 있다.

그러나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는 매우 급격히 분산되었고, 그나마 소통이 나은 가족 단위로 뿔뿔이 황무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일부 정착하고 나머지는 지속적으로 이동하여 전 대륙을 채웠다. 그러는 동안 철을 제련하거나 복잡한 도구를 만들기보다 임시 방편으로 간단한 도구들을 만들어 썼을 것이다. 그런 흔적들이 바로 이런 단순한 석기들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편 뗀석기들에는 무언가에 이용한 흔적도 남았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그냥 돌일 수도 있다고 본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처럼 황당함 속에서 용감하게 상식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잘 모르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이용하는 한 포털에 있는, 어떤 학생의 질문이 흥미롭다.

"옛날에 뗀석기와 간석기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책에서 보니까 그냥 돌과 비슷하게 생긴 것두 있더라고요... 혹 그냥 돌을 뗀석기와 간석기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을 보면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기존의 지식을 바꾸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에 억지로 끼워 넣거나 미스터리로 간주해 버린다. 그러므로 미술의 거장이라는 피카소도 그리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역시 진화론적 철학의 희생자이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라스코 동굴의 그림들에 대해 "인류는 발전한 것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석기시대는 없었다."고 했어야 한다.

2011년 1월 7일 금요일

누구 맘대로 기독교 대표 행세인가? / 김재욱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6054&page=


왼쪽부터 김경재 목사, 길희성 교수, 폴니터 교수, 수불 효담 미산(승려들), 이정배 교수, 정현경 교수.

2011년 1월 5일 저녁 서울 양천구 조계종 국제선센터에서 종교 간 토론회가 열렸다. 달라이 라마에게 법명까지 받았다는 뉴욕 유니언신학대 석좌교수 폴 니터의 방한 기념으로 개최된 것으로, 최근 불거지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였다. 불교 쪽은 모르겠지만 기독교 쪽은 거의 구원받지 못한 신학자들이 참석한 것 같다.

누 가 그들에게 기독교의 대표라는 권한을 주었는가. 거의 모든 종교간 대화가 이런 자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지만 대중들이나 크리스천들은 뭔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려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변방에도 끼워줄 수 없는 사람들이고, 참된 그리스도인들 중 어느 누구도 인정한 바 없으며, 단지 논란 없이 신문 지면을 장식할 이야기들을 잘 골라서 해줄 수 있는 종교꾼이기 때문에 종교 담당 기자들만이 환영할 뿐이다.

"한국인의 문자와 책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이 성경무오설이라는 절대적 믿음으로 이어진 것 같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이 올가미에서 극보수 기독교인들이 벗어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이 어렵다."

김 경재 목사의 주장이다. 그는 '길은 여러 개지만 하나로 통한다'는 식의 이른바 등정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의 저서 '이름 없는 하느님'은 종파적 유일 신앙에서 우주적 생명, 즉 모든 종교를 통해 이를 수 있는 최종 목적지로 가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예수나 부처는 당시 관습과 권위, 전통에서 자유로웠는데, 이는 사실상 죽음을 의미했다. 이들은 사즉생(死則生), 죽음을 통해 살았고, 무한한 자유를 바탕으로 헌신과 사랑, 자비의 길로 나아갔다. 불교의 공(空)과 기독교의 사랑은 둘이 아니라고 본다. 이제 창조적으로 서로 만나야 한다."

'보살 예수'라는 책의 저자이며, 예수와 부처는 '천하의 자유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하는 서강대 길희성 교수의 말이다.

참 석자들 중 정현경 유니언신학대 종신교수라는 여성 신학자는 1991년 호주 WCC에서 흑인, 무당, 토착민, 순교 당한 영들을 부르며 초혼제를 지내기도 했던 사람이다. 한편 1993년의 한 여성 회의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불교, 힌두교, 그리고 필리핀 여신들로 구성된 '새로운 삼위일체'의 채택을 역설하기도 했다.

폴 니터는 기독교가 종교 간의 대화에 나서기 전에 보수적 기독인들과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식민주의, 제국주의 등 여러 폭력의 역사도 기독교만이 참된 믿음이라는 데서 촉발됐다며 "자신의 종교가 최고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물 론 이런 식의 이야기는 신물나게 들어온 것들이다.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조금씩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의 대립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결국 한국도 종교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기독교가 사수해야 할 가치들은 사회법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될 것이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준법적인 품위 있는 종교인들이 되어갈 것이다.

이 토론회를 경청한 한 유럽인은, 왜 한국 사회에서 종교 간의 갈등이 일어나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렵다는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한국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한국의 교회들의 미래도 유럽처럼 공허해 질 것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교회의 월간지에 싣기 위해 연령별 청년들을 모아 토론회를 실시했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중 20대 중반의 한 청년이 한 이야기는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다.

" 한국 교회가 늘 교파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 '하나 되는 게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언젠가 한국의 모든 교회가 하나로 모여서 무언가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 아니에요. 하지만 각 교파가 따로 행하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한국 교회를 대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천주교 같은 경우는 교황이 있잖아요. 그러면 모든 천주교인들이 듣는다고 해요. 그걸 들은 모든 교인이 들은 대로 행하니까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어요. 기독교도 하나로 모인 선한 영향력을 하나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얘기를 다 싣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싣는다 해도 아무도 문제를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토록 열성이라는 한국 교회의 열매이다. 이 젊은이들은 또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

"긍정적인 마인드로 진리만 빼고 다 바꾼다."

변 화하는 시대에 발맞추고, 하나로 힘을 모아 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교회에서는 다른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심장만 빼고 다 바꾸면 그것은 이미 다른 것이거나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생각으로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연합하고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교회들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 경을 그대로 믿지 않겠다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러면 무엇으로 행동과 정의와 옳고 그름을 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해답이 100%이고, 어떤 말에 거짓이 없으며, 어떤 생각이 완전한가? 물론 그런 것은 없다. 이런 해답을 성경에까지 적용한 것이 그들의 실수이다.

결 국 그들은 좁은 머릿속에서 넓은 우주적 생명을 꿈꾸며, 등잔불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여러 개지만 결국 등잔은 하나라는 큰 깨우침에 기대어, 표류하는 진리와 결론 없는 지식을 붙잡고 멸망의 길로 달려갈 뿐이다. 그들의 헛된 생각은 마귀의 교리가 되어 우매한 종교인들을 지배하고, 끝내 그 큰 무리가 불의 호수를 향해 달음질하는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신, 당신들의 아비는 누구인가? 왜 우리는 이토록 다른 말을 하고 있는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너 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8:43~45)

2011년 1월 5일 수요일

지구 중심설과 성경문제 / 김학준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6001

요즘 keepbible에 지구중심설/지동설에 대해서 많이 논의가 되고 있는데요, 성경을 보는 관점에 일부 혼동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점심시간을 통해 저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원래는 김재욱 형제의 글에 댓글로 달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길어져서 여기로 옮겼습니다 ^^)
일단 지구중심설/지동설은 상대운동 관점에서 보면 다 설명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구중심설도 5-6가지나 되고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도 있고 우리 태양계에서는 태양과 달만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다른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이론도 있고 이 역시 설명이 된다고 하고 증명을 위해서 직접 보일수는 없으니까 천체 해석 결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잡한 물리법칙등을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요, 저 역시 이런 천체 분야의 지식은 없습니다.
또한,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천체 물리 지식을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지식을 검증하겠다고 나서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 분야가 생업인 과학자들도 갑론을박하며 서로 물러서질 않는데 전공도 아닌 우리가 어디 명함을 내밀겠습니까 ?
우리는 큰 그림만 분별하고 볼 수 있는 능력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상대운동의 개념과 지식의 한계를 같이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우선, 이런 간단한 상황을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여러분이 조수석에 타고 있고 아내가 운전석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120kph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의 차선 뒤에 멀리 떨어져 있던 자동차가 갑자기 우리차를 향해서 빠르게 달려오는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것은 아마 2가지 일 것입니다.

1) 아내가 차속을 줄였거나

2) 우리가 120kph정속인데, 상대차가 차속을 올린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운동의 물체에 속해 있고 조수석에만 있는 우리는 어느 것이 맞다고 결론 지어야만 할까요?
없습니다. 현상학적으로 위의 2가지 모두 정답입니다.
하지만, 아내에게 물어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아내가 차속을 줄였다고 하면 이 이유로 인해 차의 간격이 좁아진 것이고 아내가 정속에 있었다고 하면 상대차가 차속을 올린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답은 1가지로 결정이 됩니다. 즉, 우리가 reference를 알고 있으면 진리는 반드시 하나입니다.
상대 운동의 관점에서 정확한 운동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준점이 받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주의 기준점, 인간이 아는가요?,
시작도 끝도 모르는 우주의 팽창속도 인간이 정확히 아는가요 ?

우주 탐사 프로그램이 인간의 역사에서 시작된 시점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지 금의 인류는 지구상에서 한 나무의 입사귀를 오르는 개미정도에 지나지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미가 느끼는 중력/자기장/표면장력이 이 지구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을까요? 전혀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제한된 과학 지식을 가지고 우주의 운동을 논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학을 절대적인 가치로 둡니다. 하지만 과학에도 맹점이 있습니다. 복잡한 수식들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주눅드실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과학은 How와 Why의 엄청나게 큰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Why가 과학의 시작점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으나 이는 관찰되는 현상학적 문제에 국한될 뿐이고, 보통 우리의 과학은 How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한된 범주내에서 말이지요.
왜 존재하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넘어가면 과학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것임을 스스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철학/형이상학에서 찾아 보라고 하지요.
모든 과학이 터무니 없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 하나의 케익이 있습니다. 관련된 식품영양학자/화학자/물리학자/수학자들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무엇입니까?
칼로리의 수, 칼로리의 효과, 단백질의 구조, 화학적 결합구조, 구성입자, 입자들과 관계된 수십만 가지의 복잡한 방정식들뿐입니다.
우리는 이런것들을 정립하는 그들에게 끝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과학은 "왜" 만들어져 있는지는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합니까 ? 간단합니다. 당연히 만든 아줌마에게 물어보아야지요.
케익에게 "왜"하고 물어보는 것이 정신나간 행위이듯이 우주도 마찬가지로 창조주에게 물어보아야지 과학지식으로 우주를 쥐어짠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해답은 없습니다.
케익에 물어보는 것은 정신나간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주에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접근해서 근원을 찾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겠지라고 수긍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상하지요 ?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완벽하지 않은 과학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한계 역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하는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현재 과학의 한계를 벗어나는 근원적인 why에 대해서 유명 과학자의 입을 보고, 얼마나 천재인데 맞겠지 하면서 막연히 그의 주장을 지지하고 따릅니다.
앞의 예와 같이 "아내"의 역할을 하는 Reference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다수를 형성하고 있으며, 진화론를 지지하는 천체 과학자들의 입을 Referecnce로 삼고 있지만,
우리는 성경대로 믿는 자들입니다. 절대 기준점을 모르는 상대운동에 속해 있는 우리는 Reference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따라 해석한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들이 주장한다 하더라도 겁내실 필요없습니다.
그들 역시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일 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주장만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셋째날:넷째날 창조 / 여호수아 / 히스기야등의 사건 기록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구상의 대기류가 자전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아 생긴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고 계신데, 대기학자들도 이것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지구의 대기류는 태양의 복사열로 인한 열/물질의 이동(밀도변화)에 의해서 주로 결정되지 자전은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속도가 1600kph인데 우리가 그 소리를 못듣는 것은 우리의 가청 주파수를 넘어서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맞는 것같으면서도 틀린 말입니다. 우주에는 매질이 없으므로 우리의 대기와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SF영화에서 우주선이 광속이상으로 이동할때 굉음이 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역시 허구입니다. 매질이 없기때문에 소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주장들을 보면 세상 지식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지요.
그들의 주장대로 지구가 자전을 한다고 하고, 성경기록대로 멈추게되면 이는 이미 검증된 관성에 의해서 엄청난 재앙이 지구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는 멈추어져 있고 우주가 움직이다가 멈추게 되면 우주와 지구의 대기간에 마찰이 없기 때문에 지구에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히스기야 사건후에 지구에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은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 기록이 없으니까요. 따라서 지구는 안 움직인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지구밖의 멈추어진 행성에는 관성의 법칙이 유효하다면 아마 엄청난 격변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구밖에 하나님은 생명체를 놓아두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저함 없이 생명체가 없는 행성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수백~수십억년의 우주 역사를 통해 적어도 하나의 외계생명체 존재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화론적 근거에 의해서 "무"에서 다시 새 생명체가 탄생할려면 수억년이 걸린텐데 그럼 히스기야 시대 이후로, 이들의 계산상으로, 아직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사견이지만, 지구중심설을 따른다면 말이지요.
하나님의 존재와 주님의 부활과 휴거, 공중 재림은 믿어도 이것을 믿지 못하다면 안타깝게도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우기는 하지만 성경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불신하는 믿음이 절대로 바른 믿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휴거, 공중재림보다 이것이 더 믿기 쉽지 않나요 ?
크리스찬이 어려운 것은 믿겠는데, 이 보다 더 쉬운 것을 불신하는 것은 세상의 지식에 가리워진 부분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은 진화론이든,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사람은 자기가 그 동안에 취해온 지식을 기준으로, 자신이 믿고 싶으대로, 자신의 믿음을 정립합니다. 말씀을 따르자니, 너무 불편한 것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한된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무한성과 작품에 대해서 평가하려고 하는 우리의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가 혼동에 빠질 것을 아시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또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 (딤전 6:20, 킹흠정)
[참고 : 영어 킹제임스 성경외에 다른 모든 영어성경에서는 "과학(Science)"이 단순히 "지식(Knowledge)"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은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지는 명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