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27일 월요일

술 / 김재욱

** 아래의 글은 keepbible.com 자유게시판에 있는 김재욱 형제님의 글을 옮겨놓은 것입니다.


술, 성경에도 많이 나오잖아~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대개 술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여전히 술을 마시는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통해 음주를 정당화하곤 하는데, 그들이 성경을 인용해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술도 그 재료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


"술은 조금씩 마시면 건강에 도움을 주는 약이 된다. 바울도 디모데의 위장병에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하지 않았나."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랬지, 술 마시지 말라고 했나. 취하지 않으면 괜찮다."


"예수님도 만찬 때와 십자가상에서 포도주를 마셨다. 가나 혼인잔치 때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도 보이셨다."


이 변명들은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하나씩 짚어 보자.

술/ 알코올/ 포도주/ 포도즙?

안 그래도 요즘 와인 열풍으로 포도주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는데, 포도주란 포도당이 껍질에 붙어 있는 효모 박테리아에 의해 발효, 즉 부패되는 과정을 통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탕 분자들은 단순한 알코올 분자들로 분해되는데, 설탕의 당분은 신체활동 에너지의 첫째 근원이 되지만 알코올은 신체 부패의 원인이 되어 소화되지 않은 채 혈류로 들어가 신경계와 신체조직을 공격하고 손상을 준다.


구 약에서는 히브리 단어 '티로쉬'와 '야인'이 쓰였는데, 티로쉬는 신선한 포도즙이며 야인은 발효된 포도즙, 즉 포도주를 뜻한다. 그런데 헬라어(그리스어)로 씌어진 신약성경에서는 구분이 없이 '오이노스'라는 한 단어만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문맥상의 뜻을 잘 파악하여 번역하고 해석해야 한다. 사이다(cider)라는 말도 원래 사과즙이라는 뜻과 발효된 알코올성 사과주를 동시에 이르는 말인 것처럼 말이다(우리나라의 사이다는 탄산수라는 뜻으로 전혀 다르게 쓰임).

술은 하나님의 창조물?

그 렇다면 술은 하나님의 창조물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에서 많은 악한 것을 만들어 냈는데, 마치 원자폭탄이나 핵무기처럼 술도 2차 제조물이자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포도나 과일즙이 무조건 오래된다고 술이 되지는 않기 때문. 물과 온도·설탕 등의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술이 된다. 그러므로 술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취하는 것은 어느 시점부터?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병을 위해 포도주를 권했다고 하는데(딤전 5:23), 이것은 헬라어 '오이노스', 즉 영어의 와인(wine)을 모두 '포도주'로만 번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바 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취하다'로 쓰인 '메쑤스코'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그저 '취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취하기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술은 열 잔째부터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부터 취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술을 전혀 금하라는 메시지다. 따라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한 오이노스, 즉 와인은 순수한 포도즙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

포 도주에 대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새롭게 마시는 그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물론 포도주와 포도즙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 런데 개역성경의 복음서를 계속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에게 해융(스펀지 같은 것)에 적신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나온다. 어떤 해설성경에서는 이것을 신 포도주와 계란과 물을 섞은 로마병정의 음료라고도 했고,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값싼 포도주'로도 번역하고 있는데, NIV(신국제역)에서는 wine vinegar, 즉 '포도 식초'나 '신 포도주'로 번역할 수 있는 말로 표현했다.


그 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어기고 돌아가시기 전에 포도주 종류를 마셨다는 말씀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신구약 합본 영어성경인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신 것을 그냥 '식초(vinegar)'로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예수님 은 최후의 만찬 때도 포도주를 드신 것이 아니라 포도즙을 드신 것이다. 그래서 만찬의 법을 제정하시면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포도나무에서는 포도즙이 나는 것이고, 시간이 경과하여 만들어지는 술이 나오지 않는다. 술이 되는 효모와 곡식에 쓰이는 누룩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인데,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유월절에 술을 마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흠없이 완전한 희생양이 되셨다. 민수기 9장 12절에서는 "그것(어린양)을 아침까지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것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고 유월절의 모든 규례에 따라 그것을 지킬 것이니라."라고 했다. 원래 십자가형이 끝나면 다리뼈를 꺾어 확실히 죽음을 확인하고 마무리한다고 하는데,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옆구리를 찔러 심장에 남은 물과 피를 흐르게만 했다. 요한은 "이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라."고 했다(요 19:36).
이 처럼 뼈를 꺾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임을 의미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급히 탈출하느라 미처 빵을 발효시키지 못해 누룩 없는 빵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유월절 양은 자유를 위한 희생 제물이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1주일 동안 집에서 모든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다(출 12:15). 그러므로 효모가 든 술이나 누룩이 든 빵은 적절치 않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고전 5:7)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책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두루뭉술하게 믿거나 마음대로 해석하여 술을 마시는 일에 악용할 수 없다.

예수님이 술을 만들어 제공하셨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도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에 어울리지 않는다. 항아리에 담긴 '물'은 그 잔치에 쓸모 없는 존재를 뜻한다. 혼인잔치에 필요한 포도음료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성도들은 그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이 없이는 우리가 예복을 준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의 '오이노스'도 포도즙이 되어야 한다. 이미 취한 잔치의 손님들을 더욱 인사불성으로 만들 포도주를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 공급하셨다는 것은 율법과 구약의 말씀을 하나도 거스르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다(요 2:10).


영 어로도 '와인'은 포도주와 포도즙을 동시에 뜻한다. 현대에 와서 '와인'은 주로 포도주에만 쓰이는 말이 되었는데, 오래전에 쓰여진 이 단어를 모두 현대의 용례로 '포도주'로 번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이 술을 금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문맥별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바울이 권한 것도 자동으로 포도즙이 되는 것이다. 환자에게 술을 권하는 것도 비상식적이다.


술, 이제는 마시지 맙시다

술 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든지, '모든 것이 가하나...' 등의 성경을 이용한 궤변은 용납될 수 없다. 성경에서 술은 각종 죄의 도구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드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아들 함에게 죄를 짓게 한 사건이 술에 대한 성경의 첫번째 기록이다(창 9장). 롯의 딸들은 아버지의 씨를 보존하자며 술에 취하게 하고 범죄하였다(창 19장). 또한 성경은 잠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술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이사야서 5장에서는 술이 지옥을 확장시킨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자들로 인해 지옥의 인구가 더해질 것이라는 대언이다.

" 화 있을진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되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따라가 포도주로 붉게 된 자들이여!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와 기뻐하는 자가 다 거기로 내려가리로다. (사 5:11, 14)

술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메시지를 볼 때, 주의 만찬 때도 순수한 포도즙이나 주스를 써야 함이 어느 모로 보나 옳다. 누군가가 변질시킨 전통을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적은 양이지만 술을 마시면서 유월절 어린양이신 흠없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생활에서 술을 완전히 멀리하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우리 모두 갖추어야 할 것이다.


** 원본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5087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주(여호와)의 아들, 하나님(엘로힘)의 아들들 (출4:22) / 김문수

원문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5066&page=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니라(출4:22)
And thou shalt say unto Pharaoh, Thus saith the LORD, Israel is my son, even my firstborn:

1.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것이 천사들이 아니라 "경건한 셋의 후손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성경 구절을 찾다가 출애굽기 4장 22절을 만나면 대단히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의 논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끼워 맞추는 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4장 2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주(LORD, 여호와)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래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여호와가 아니라 모두 히브리어 엘로힘(스트롱코드 430)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창6:2).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창6:4).
이제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오니라(욥1:6).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와서 주 앞에 자기를 보이니라(욥2:1).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38:7)
위 구절들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조주이신 엘로힘의 아들들, 곧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존재를 말합니다. 이는 곧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결코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셋의 후손들은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물려받은 자들이지 결코 경건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창5:3).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며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5:3).
셋의 후손들 중에서 방주로 들어와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노아네 여덟 식구 외에는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의미한다면, 그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아무도 방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셋이나 그의 후손들이 결코 하나님(엘로힘)의 아들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엘로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셋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아담의 아들이라고 합니다(눅3:38).
게난은 에노스의 아들이요, 에노스는 셋의 아들이요, 셋은 아담의 아들이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느니라(눅3:38).
Which was the son of Enos, which was the son of Seth, which was the son of Adam, which was the son of God.
출애굽기 4장 22절에 나오는 "내 아들"은 하나님(엘로힘)의 아들이 아니라, 주(LORD, 여호와)의 아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결코 엘로힘과 여호와가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동일한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은 엘로힘이라는 표현을 쓸 때도 있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쓸 때도 있는데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과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엘로힘)의 아들"이라는 표현과 출애굽기 4장 22절에 나오는 "주(여호와)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주께서 "내 아들"이라고 칭하신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팔레스틴 땅에 살고 있는 실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한국인 크리스천이나 미국인 크리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자리에 무작정 신약 교회를 대입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2. 신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합니다(요1:12).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the sons of God)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요1:12)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아담처럼 흙에서부터 다시 창조된다는 뜻도 아니고, 크리스천은 천사가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전에는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3)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엡2:4,5)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adoption)되었다고 합니다(롬8:15, 갈4:5).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롬8:15).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4: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된 그리스도인들(요1:12)과 하나님(엘로힘)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들(창6:2)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3.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
성경은 하나님께는 여러 아들들(the sons of God) 중 한 명이 아닌 한 분 아들(the Son of God)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녀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하오이다, 주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하니라(요11:27).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요일5:11).
성경 말씀을 변개한 오리겐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서열 2위의 열등한 신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변개된 성경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번역본들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흠정역: 어느 때나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NASB: No man has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God,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s explained [Him.]
KJV: No man hath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개역이나 NASB와 같이 변개된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이 낳은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 번역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성부 하나님이 먼저 있었고 그 후에 성자 예수님이 창조되었다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을 지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은 성부 하나님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독생하신 하나님(the only begotten God)이 아니라 그분의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기 때문에(히1:3) 그분은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영광과 권능과 속성을 갖추신 하나님이십니다(빌2:6-7).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믿지 않는 자들은 마침내 다음 성경 구절도 그들이 믿고 싶은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흠정역: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NIV: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NASB: who, although He existed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 thing to be grasped,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bond-servant, [and] 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
KJV: Who, being in the form of God, thought it not robbery to be equal with God:But made himself of no reputation, and took upon him the form of a servant, and was made in the likeness of men:
개역이나 NIV, NASB 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자기가 감히 해서는 안 되는 교만한 일이라고 여기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 순순히 복종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를 기특하게 여겨서 나중에 그를 크게 높여주었다고 합니다(빌2:6-11).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님께서 원래부터 하나님이시고, 그분과 똑같은 영광과 권능을 갖추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다(동등하게 되는 것이 아님)는 사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강탈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의 모습이 되셨다고 합니다(빌2:6-11).
이처럼 얼핏 보기에는 두 번역이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엄청난 입장 차이를 보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독생하신 하나님"(the only begotten God)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진리의 성경 말씀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시며, 완전한 신성을 갖추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교과서가 바뀌면 배우는 내용이 달라지듯, 우리 믿음의 근본이 되는 성경이 달라지면 우리의 믿음과 교리도 달라지게 됩니다. 올바른 성경만이 우리를 바른 믿음 위에 세워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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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성경이슈로 어떤 목사님과 대화하던 중 빌2:6-7 절에 대해 언급하시던 목사님이 기억납니다.
개역 성경의 번역과 해석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오히려 흠정역의 "강탈"로 번역된 부분을 이상하게 여기시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 분께 이 글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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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4일 화요일

부전자전 (父傳子傳)

아기가 태어나니 정~~말 바쁘네요..
첫 아이라 더 여유를 찾기 힘들고, 아내는 아내대로 저는 저대로 최대한 버티고 있습니다.

가끔은 자꾸 울기만 하는 아기를 달래느라 제풀에 지쳐 화가 날때도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갓 태어난
아기에게 내 의지대로 내 뜻대로 해주기만 원하는 제 모습에 스스로 뉘우칠때도 있습니다.
이런건... 사랑이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서 자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생각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말도 할 줄 몰라 울기만 하는 아기처럼 그저 필요한게 있으면 하나님앞에서 울어대기만 하니까요.
무럭무럭 크라고 항상 넘치게 준비되어 있는 말씀의 젖도 잘 안먹고,
그렇다고 포근히 감싸고 계신 주님 품안에서 평안을 찾을 줄도 모릅니다.
트림을 시키려고 등을 두드리는 것인데도 등이 아프다며 당장 그만둬 주기를 바라고,
잠이 오면 자면 될텐데도 당장 잠들지 못한다고 찡얼거리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깨끗하게 기저귀를 갈기위해 배설물로 가득한 세상의 것들을 빼앗으면 곧바로 발을 동동거리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똥 오줌으로 가득찬 기저귀가 깨끗한 기저귀보다 더 좋다고 말이지요.
심지어 잠이 들어서도 혹시나 하나님이 어디 다른 곳에 가신건 아닌지 자주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확인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 앞의 제 모습과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