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4일 수요일

정체성


교포 2세들에게는 나름의 고충이 있다.

교포 2세를 만나 친하게 지내다보면 가끔씩 "난 교포 2세니까 너랑 좀 달라"라는 표지판의 깜빡이를 킬때가 있다.

같은 타이밍에 "너의 고민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표정으로 대화를 좀 더 나누다보면 들을수 있는 그들의 고민중 하나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다.

나는 한국인인지 독일인인지 잘 모르겠다는 고민을 ch 발음("목끓는 히, 또는 흐로 들리는")이 잔뜩 포함된 독일어로 듣다보면 나 자신도 교포 2세가 아니기 때문에, 그 고충을 제대로 이해할수 있겠다고는 말하지 못하게 된다. (이건 결코 나의 독일어가 짧아서 그런건 아니다.)

세월이 흘러 그렇게 대학 시절 친했던 몇 몇 교포 2세들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 그런 정체성의 고민에 대한 이야기는 내 기억에서 사라지나보다 했다.

그런데 내 자신이 비록 교포 2세는 아닐지언정 독일생활 10여년만에 교포 2세를 직접 생산하고? 보니 이것이 남의 고민이 아니라 내 자식의 고민이 될것이라는 생각에 부모로서 일찍부터 준비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난 이후부터 "난 독일사람인가? 아니면 한국사람? 헷갈리네?" 신호가 아들로부터 오면 지체없이 넌 한국사람인데 독일말을 잘하는 한국사람일 뿐이야 라고 말해준다. 쪼금 정성을 들여서 말이다.

이제 7살된 아들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아, 그렇구나 하고 그때마다 넘어가지만 행여나 맘속에 찝찝함이 남아있을까 "미친듯이 뛰놀기" 모드로 바뀌기 전까지는 은근히 아들의 표정을 주시하게 된다.

이런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아마도 사춘기를 넘길때까지 틈만나면 내 아들의 머리속을 휘저으러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게될 것이다.

집밖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쓰는 언어가 달라지고, 사람들의 모습도 다르고, 인사하는 모양부터 달라진다.

이것은 정말 피할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고, 어릴때부터 불알친구인 눈이 파란 노아라는 이름의 아이와 되너(터키식 햄버거쯤 되는 길거리 음식)를 사먹으면서 오늘은 뭘하고 놀까를 고민하다가 지나가는 동양인을 보면 불쑥불쑥 머리속에 떠올리게 될 내 아들의 운명같은 고민일 것이다.

한편 그럴때마다 난 독일어를 잘하는 한국사람이야 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는 내 마음과는 달리 "그렇지만.." 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이유들에 휩싸이게 될 것이 분명한 내 아들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할것도 아니다.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외양적 모습때문에 일부러 중국식당에 가자고 해놓고는 젓가락질 하는 걸 가르쳐달라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날거고, "Hallo"가 한국말로 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들으며 살아가야 할테니까 말이다.

다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나를 제외한 대부분이 다르면 나에 대한 정체성에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건 자연스런 일이다.

내가 오늘 이렇게 정체성에 관한 글을 쓰는 이유는 크리스천이 세상속에 살아가면서 겪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마치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늘에 본적을 둔 우리 크리스챤들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이 올때마다 난 이 세상에 익숙하게 살고 있지만 사실은 하늘시민이야 라고 곧바로 정리되면 좋겠다.

이 땅에 태어나서 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는 생각을 맨 처음 하셨을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실히 알면 알수록 크리스챤들의 남은 인생에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될지, 떨리는 기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은 "미친듯이 뛰노는" 독일말을 잘하는 7살난 한국사람도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서 정말 좋은 열매들을 맺게되길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