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6일 수요일

가나안의 도덕적 상대주의

 

신명기 12:8

또한 너희는 우리가 이 날 여기에서 행하는 모든 것 즉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본받아 행하지 말지니라.


근래에 들어 도덕적 상대주의라는 개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온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다. 아니, 이미 널리 퍼져서 젊은 세대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각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를 다룰때에는 이 사상이 절대 진리인것처럼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듯 하다.

또한, 도덕적 상대주의는 오랜 기간동안 역사를 통해 발전해온 인류의 철학적 금자탑인것 마냥 가장 최신의 도덕적 판단 기준처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알수 있듯이, 이런 사상은 이미 수 천년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탈출했던 당시에 가나안 민족들이 가졌던 사상이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전혀 현대적인 것도 아니고, 오랜시간 철학적 윤리관이 발전을 거듭해서 생겨난 최신의 도덕 윤리관도 아니다. 오히려 수 천년전의, 죄로 충만했던 가나안 족속들의 아주 오래된 윤리관일 뿐이다.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옮은 대로 행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도덕적 상대주의의 끝판왕이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들의 이런 사상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수천년전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본받아 행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시는 사상이며, 크리스찬이라면 절대 본받아서는 안되는 사상이다.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사기 17: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가나안을 정복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이스라엘 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던 저 도덕적 상대주의를 그대로 본받아 행하고 말았다.

이러한 도덕적 상대주의가 충만한 사회는 결국 인간의 죄성에 날개를 달아주어 온갖 죄들로 가득하게 될 뿐이다.

성경에는 이런 죄들이 가득했던 사회마다 어김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고, 그래서 도덕적 상대주의가 가득했던 가나안의 족속들 역시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레위기 18:24-25

너희는 이것들 중의 어느 하나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이 모든 민족들이 이 모든 것들로 더럽게 되었고 그 땅도 더럽게 되었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땅의 불법을 그 땅에게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자기 거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세상의 끝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이 주위에서 이러한 도덕적 상대주의를 목격하는 것은 결코 놀랄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상을 매우 주의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가랑비에 속옷이 젖듯 어느새 크리스찬들도 이를 본받아 행하게 될 것이다.


2022년 3월 12일 토요일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노라

 

누가복음 9장 51-53절

¶ 그분께서 위로 올려져서 영접 받으실 때가 이르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자기 얼굴을 고정하시고 사자들을 자기 얼굴 앞에 보내시니 그들이 가서 그분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니라.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듯한 얼굴이므로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위해서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관통해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 간에는 역사적으로 깊은 갈등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과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혼인으로 생겨난 혼혈족속인 사마리아인들을 유대인의 정통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로 생각해 완전한 이방인 취급을 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유대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이방인보다 오히려 더 미움받으며 천대받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과 자신들을 배제하는 태도로 인해서 그들 역시 크게 유대인을 미워하고 있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었기에,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갈때 중간의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짧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크게 베레아지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이방인들과 다름이 없는 사마리아의 지역을 통과하면서 이방인인 그들과 교류가 일어날수 밖에 없는 상황 자체를 극히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마리아인들도 자신들 주변에 유대인들이 있는 것 자체를 매우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므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꽤 난감한 상황을 여러번 넘겨야만 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인들을 전혀 차이를 두지않고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사마리아 인들에게도 자신들이 사는 지역내에 하나님을 섬기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며, 예수님 같은 분이 자신들이 마련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간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마리아 인들의 태도를 보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다음과 같은 말을한다.

누가복음 9장 54절

그분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


한마디로 야고보와 요한은 이런 사마리아 인들의 행태를 괘씸하게 보았다.

감히 자신들이 모시는 예수님께 정통성 문제를 따지면서 예수님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자신들이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신앙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던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이 천벌을 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9장 55-56절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 하시니라.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가니라.


비록 사마리아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오해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가지,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문제에 모든 촛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계신다.

오히려 오래 참으시는 길을 택하시고, 그들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들을 미워하며 차라리 그들이 죽어버리기를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영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아닌, 악한 영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을 주고 계신다. 즉 사마리아 인들이 잘못하고 있으므로, 당장 죽어버리기를 원하는 마음은 악에 속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이 분명 잘못하고 있는게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꽤 오래전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사실인지 확인은 할수 없지만, 구원파 교회에 다니다가 다른 기성 교회를 나가게 되어서 그들의 모임을 떠나게 되면, 그들 내부에서는 그렇게 떠난 이들을 향해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 취급을 하고, 온갖 부정적인 말로 그들을 모함하기도 하며, 심지어 처음부터 사탄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식의 저주 같은 말들을 쏟아 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내부 단속에 더 힘을 쏟는것처럼 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만약 정말 그런 일들이 그 안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 더 하나님의 영에 속한, 더 올바르고 더 정통적인 교회라고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에서 살펴본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해볼때, 그들 스스로가 오히려 악한 영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임을 알수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계속해서 오랫동안 인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떠난 사람들을 오히려 더욱 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떠난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더 잘 믿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울수 있었던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마음, 그 영에 속한 마음임을 알수있다.

어떤 교회를 다니던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지, 또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말들을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남아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교회가 진정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를 판단할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22년 3월 7일 월요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민수기 27장 8절-11절.

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너희는 그의 상속 재산이 그의 딸에게 돌아가게 할 것이요, 그에게 딸도 없거든 너희는 그의 상속 재산을 그의 형제에게 줄 것이며 그에게 형제도 없거든 너희는 그의 상속 재산을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그의 아버지도 형제가 없거든 너희는 그의 상속 재산을 그의 가족 중에서 그에게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그가 그것을 소유하게 할지니라, 하라. 주가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법규가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었나?

이스라엘의 번성이었다. 셀수없이 많은 자손들을 낳게 될거라고 하셨다.

셀수없이 많은 자손을 낳게될 것이라고 했으니, 이스라엘에게는 이제부터 상속 문제가 복잡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상속문제를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고 계신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상속의 순서를 정하고 계신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때, 상속을 받을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딸도 없으면 죽은 사람의 형제에게, 형제도 없으면 죽은 사람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그도 없으면 가까운 친척에게 주라는 것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나름 순서를 정해주셨구나 라고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 축복으로 인구가 늘어나는 중이다.

하나님께서 그 어느때보다 직접 역사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때가 바로 출애굽과 가나안의 정복이 있던 이 때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보다 많아질 것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대를 잇지 못하고 상속을 줄 사람이 없는 상황까지 와서 심지어 가까운 친척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생길수 있다는 걸 알려주시는 셈이다.

하나님의 저 약속을 신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자손이 많아지게 하신다고 했으니, 결혼만 하면, 아들을 얻지 못하는 집이 없을 것이고, 적어도 둘 이상은 낳게 될 것이며, 이렇게 자손이 많아지는 일이 매우 순조로울 것이라고...

그러나 위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길수 있다는 걸 볼수있다. 심지어 한 집안의 대가 끊겨서 가까운 친척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수 있다는걸 알려주신다.

이런 상황이 비단 저때의 이스라엘에게만 그런걸까?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라 하셨고, 심지어 교회는 지옥의 문들도 이기지 못할거라고 하셨다.

그러니 교회는 무조건 잘 되고, 망하는 일도 없고, 다 번창하는게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하면, 길도 열리고, 외국어도 술술 배우고,

막힘없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할수 있을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똑같다. 세상일을 하는 것과 다른게 없이 모든 일이 일어날수 있다.

일이 꼬이고, 사람이 꼬이고, 계획이 틀어지고, 자연 재해마저 일어날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


2022년 3월 5일 토요일

발람의 교리

 

성경을 읽다보면 발람의 교리, 발람의 교훈이라는 말을 몇 번 접하게 된다.

언뜻 이게 뭐지? 싶은데, 답은 물론 성경내에 있다.


민수기 25장 1절.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무르며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행음하기 시작하니라.


위의 사건은 발락왕이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쏟으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하나님이 시키신대로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축복만 하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발람은 하나님이 시킨일만 했으니까, 좋은 사람 같지만 성경을 좀 더 읽어보면 그가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타락시킬 한가지 계략을 전하고 떠난 것을 알아차릴수 있다.

요한 계시록 2장 14절.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몇 가지 있나니 이는 거기에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네게 있기 때문이로다. 그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게 하고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며 또 음행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발락이 원하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멸망을 가져올 한가지 계략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이 계략은 무조건 당하기만 할수밖에 없는 계략은 아니었다. 요한 계시록의 저 말씀은 하나님께서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시는 부분이다. 다시말해서 발람의 교리를 붙잡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발람의 교리, 즉 성적인 유혹을 통해 결국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상황에 이르게까지 하는 이 타락의 길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에게 역시 이 발람의 교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인터넷만 켜도 수없이 쏟아지는 선정적인 글과 사진과 동영상들.

때로는 한 순간의 재미로 포장되고, 누구나 다 하는 유행아닌 유행처럼, 피할수 없는 본능의 영역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발람의 교리를 붙잡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나갈 자유의지가 있다. 이 발람의 교리를 붙잡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2022년 3월 4일 금요일

다시 임하지 않을 진노

매일 매일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늘 한 두 구절이 머리에 남아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게 할때도 있고, 또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머리속에 떠오를때가 많다. 

오늘은 민수기 18장 5절의 말씀이 크게 마음에 다가와 잠시 기록을 남긴다.

민수기 18장 5절. 너희는 성소의 책무와 제단의 책무를 맡으라. 그리하면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의 앞뒤 상황은 이렇다.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오신 하나님께서 이들의 온갖 불만들을 인내하시면서 목적지인 가나안 땅 근처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셨다. 

이제 정탐꾼 12명을 택해서 목적지인 가나안 땅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살수 있을 만한 곳인지 알아보게 했는데, 이 정탐꾼중 단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나안 땅에서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길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부터 이곳까지 이를때에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이스라엘백성이 반복해서 목격한 것이 무엇인가?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들이었다. 심지어 그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 또한 낮의 구름 기둥과 밤의 불기둥을 통해서 늘 인식할수 있게 하셨는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한 그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믿고 의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 생각에 도저히 이길수 없을 것 같기에 온갖 불평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그렇게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불신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광야생활 40년을 결정하신다. 

반역하던 그 세대 모두는 광야생활 40년간 죽을 것이며 그들의 아래 세대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갈 것을 미리 알려주시기도 하셨다. 

어쨋거나 이스라엘은 이제 광야 생활 40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죄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와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수 있는지 등에 대해 율법을 주시면서 가르쳐 주신다. 

이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나아올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만나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가운데에 제사장 직을 두고, 또 제사장직을 돕는 자들을 함께 두어 이들이 무슨일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앞에서 해야 하는지 알려주신다. 그리고 오늘 같이 볼 구절의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이 구절을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제사장 직과 그 제사장 도우미 역할을 맡은 사람들만이라도 주어진 책무를 잘 맡아서 하면, 전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는 진노를 쏟아붓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아무리, 무슨 잘못을 하던 간에 만약 제사장 직과 그 제사장 도우미 역할을 맡은 사람들만이라도 할 일을 잘 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엄청난 혜택이자 긍휼이며 이스라엘에게는 대단히 유리한 계약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들의 일을 하는 것에서 게으르고,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을 등한시하고, 제사장이라는 거룩한 직책에 맞지 않게 오히려 그 직책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나쁜 짓들을 하거나, 대부분의 기간동안 그 제사장직 자체를 아예 하지도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로 나라까지 잃고 온 세계로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민수기 18장 5절. 너희는 성소의 책무와 제단의 책무를 맡으라. 그리하면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 약속은 예수님의 약속을 그대로 생각나게 해주는 약속이다.
요한복음 3장 36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1장 10절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지 보여주사니 이분은 곧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신 예수님이시니라 데

 

살로니가 전서 5장 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느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직접 대제사장 직을 맡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면서 계속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우리의 모든 잘못에 대해 예수님의 피를 그 댓가로 제시하시면서 실수하거나 게으르거나 하지 않고 완벽하게 그 역할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찬에게는 더이상 하나님의 진노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약속했던 그 약속과 동일한 약속을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챙기시고 계신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3월 1일 화요일

또 하나의 성경. 새한글 성경

 

또 하나의 성경이 나왔다고 한다.

이름하여 새한글 성경.

이 성경은 특별히 다음세대라는 독자층을 타겟으로 하여 번역한 성경이란다.

주요 독자층을 타겟으로 한 성경번역이 시대의 흐름 같은 걸까?

영어권 성경에서 이런 식으로 나온 성경이 꽤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그렇게 세대별 독자 타겟층을 나눠가며 말씀을 세대별로 나눠서 표현해 주시지 않으신 걸까?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말 제대로 된 번역 성경을 하나 만드는 것에 모든 역량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걸까?

지금도 엉망으로 번역된 곳을 다 알면서도 그대로 둔채, 자꾸 이런식으로 새로운 타겟층 운운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다른 번역 성경들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뭘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성경이 오히려 단 하나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혼돈스럽게 만든다고 생각해본적은 없을까?

대한 성서 공회는 아마도 역량만 된다면

노인층을 위한 성경,

중.고등 학생들을 위한 성경,

한인 교포들을 위한 성경, 등등 수많은 성경번역을 할 모양새다.

차마 역량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연히 많고 다양한 성경 번역을 내놓을수록 수입은 늘어난다.

더불어 더 많은 타겟층을 대상으로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수 있도록 만든다는 나름의 사명의식? 도 만족시킬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은 애초에 단 하나로 주어졌다.

개역성경에서 개역개정 성경이 나오기까지 무려 50여년이 걸린 것으로 안다.

그럼 그 기간동안 충분히 노력해서 바로잡은 성경을 출판하였나?

전혀 그렇지 않아보인다.

조금만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면 정말 오랜 시간만에 나온 개역개정 성경에서 수도없이 잘못된 번역들을 찾아낼수 있다.

때마침 개역 성경의 저작권이 만료되는 시점 바로 전에 개역개정 성경을 출판한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런 상태로 개역개정 성경을 내어 놓고는 이제 다음세대를 위한 새로운 번역 성경을 내놓았단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대한 성서 공회의 믿음과 행동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의 성경을 주시고,

영원히 보존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세대가 바뀌고 새로운 젊은 세대가 등장하는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새로운 세대가 나올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바꾸어서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적이 없다.

이에 관해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이 제발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