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바른 길로 걸어가기.

어느새 흠정역 성경을 알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지 10여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에도 흠정역 성경은 한국 사람들에게 그리 잘 알져지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여전히 흠정역과 다른 성경들과의 비교를 주제로 한 글들이나 토론들을 여러 사이트들이나 온라인 포럼등에서 아직도 심심치 않게 볼수 있습니다.

바른 것을 알기위한,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역시 비교입니다만..

가끔은 바른 것을 알기보다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아는 만큼 그 길로 걸어나가고 있는걸까?

아마 평생동안 늘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갈테지만,
또 이 질문만큼 스스로에게 고통스런 질문도 없을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중년에 접어드는, 아직은 경험이 미천한 사람으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지혜를
얻을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제 가슴 한 구석에는 고통스러울수록 그 열매가 달다는 교훈이 제 짧은 경험을 통해서도 생겨나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른 길을 확인하고 알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기에 앞서 그에 대한 노력 역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바른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비교할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길을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내딛는 한 발 한 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그 길을 함께 걸을 때, 오히려 고통을 넘어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의 찬송이 넘치겠지요.


잠시 눈을 들어 멀리 놓인 길의 끝자락을 보는 일도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이며,
다른 길과 비교하며 기쁨과 안도를 누리는 일도 저에게 큰 힘을 주는 일이지만.
그 모든 것을 둘러본 다음에는 반드시 뒤에 놓인 발을 띄어 앞에 놓인 발 앞으로 한 걸음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걸음씩 그렇게 걸어가는 모습을 너무나도 기쁘게 지켜보실 것이라는 것을
늦은 나이에 아기를 낳고 나서야 깊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2010년 9월 27일 월요일

술 / 김재욱

** 아래의 글은 keepbible.com 자유게시판에 있는 김재욱 형제님의 글을 옮겨놓은 것입니다.


술, 성경에도 많이 나오잖아~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대개 술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여전히 술을 마시는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통해 음주를 정당화하곤 하는데, 그들이 성경을 인용해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술도 그 재료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


"술은 조금씩 마시면 건강에 도움을 주는 약이 된다. 바울도 디모데의 위장병에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하지 않았나."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랬지, 술 마시지 말라고 했나. 취하지 않으면 괜찮다."


"예수님도 만찬 때와 십자가상에서 포도주를 마셨다. 가나 혼인잔치 때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도 보이셨다."


이 변명들은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하나씩 짚어 보자.

술/ 알코올/ 포도주/ 포도즙?

안 그래도 요즘 와인 열풍으로 포도주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는데, 포도주란 포도당이 껍질에 붙어 있는 효모 박테리아에 의해 발효, 즉 부패되는 과정을 통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탕 분자들은 단순한 알코올 분자들로 분해되는데, 설탕의 당분은 신체활동 에너지의 첫째 근원이 되지만 알코올은 신체 부패의 원인이 되어 소화되지 않은 채 혈류로 들어가 신경계와 신체조직을 공격하고 손상을 준다.


구 약에서는 히브리 단어 '티로쉬'와 '야인'이 쓰였는데, 티로쉬는 신선한 포도즙이며 야인은 발효된 포도즙, 즉 포도주를 뜻한다. 그런데 헬라어(그리스어)로 씌어진 신약성경에서는 구분이 없이 '오이노스'라는 한 단어만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문맥상의 뜻을 잘 파악하여 번역하고 해석해야 한다. 사이다(cider)라는 말도 원래 사과즙이라는 뜻과 발효된 알코올성 사과주를 동시에 이르는 말인 것처럼 말이다(우리나라의 사이다는 탄산수라는 뜻으로 전혀 다르게 쓰임).

술은 하나님의 창조물?

그 렇다면 술은 하나님의 창조물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에서 많은 악한 것을 만들어 냈는데, 마치 원자폭탄이나 핵무기처럼 술도 2차 제조물이자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포도나 과일즙이 무조건 오래된다고 술이 되지는 않기 때문. 물과 온도·설탕 등의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술이 된다. 그러므로 술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취하는 것은 어느 시점부터?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병을 위해 포도주를 권했다고 하는데(딤전 5:23), 이것은 헬라어 '오이노스', 즉 영어의 와인(wine)을 모두 '포도주'로만 번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바 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취하다'로 쓰인 '메쑤스코'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그저 '취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취하기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술은 열 잔째부터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부터 취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술을 전혀 금하라는 메시지다. 따라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한 오이노스, 즉 와인은 순수한 포도즙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

포 도주에 대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내가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새롭게 마시는 그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물론 포도주와 포도즙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 런데 개역성경의 복음서를 계속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에게 해융(스펀지 같은 것)에 적신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나온다. 어떤 해설성경에서는 이것을 신 포도주와 계란과 물을 섞은 로마병정의 음료라고도 했고,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값싼 포도주'로도 번역하고 있는데, NIV(신국제역)에서는 wine vinegar, 즉 '포도 식초'나 '신 포도주'로 번역할 수 있는 말로 표현했다.


그 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어기고 돌아가시기 전에 포도주 종류를 마셨다는 말씀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신구약 합본 영어성경인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신 것을 그냥 '식초(vinegar)'로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예수님 은 최후의 만찬 때도 포도주를 드신 것이 아니라 포도즙을 드신 것이다. 그래서 만찬의 법을 제정하시면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포도나무에서는 포도즙이 나는 것이고, 시간이 경과하여 만들어지는 술이 나오지 않는다. 술이 되는 효모와 곡식에 쓰이는 누룩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인데,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유월절에 술을 마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흠없이 완전한 희생양이 되셨다. 민수기 9장 12절에서는 "그것(어린양)을 아침까지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것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고 유월절의 모든 규례에 따라 그것을 지킬 것이니라."라고 했다. 원래 십자가형이 끝나면 다리뼈를 꺾어 확실히 죽음을 확인하고 마무리한다고 하는데,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옆구리를 찔러 심장에 남은 물과 피를 흐르게만 했다. 요한은 "이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라."고 했다(요 19:36).
이 처럼 뼈를 꺾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임을 의미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급히 탈출하느라 미처 빵을 발효시키지 못해 누룩 없는 빵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유월절 양은 자유를 위한 희생 제물이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1주일 동안 집에서 모든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다(출 12:15). 그러므로 효모가 든 술이나 누룩이 든 빵은 적절치 않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고전 5:7)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책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두루뭉술하게 믿거나 마음대로 해석하여 술을 마시는 일에 악용할 수 없다.

예수님이 술을 만들어 제공하셨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도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에 어울리지 않는다. 항아리에 담긴 '물'은 그 잔치에 쓸모 없는 존재를 뜻한다. 혼인잔치에 필요한 포도음료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성도들은 그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이 없이는 우리가 예복을 준비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의 '오이노스'도 포도즙이 되어야 한다. 이미 취한 잔치의 손님들을 더욱 인사불성으로 만들 포도주를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 공급하셨다는 것은 율법과 구약의 말씀을 하나도 거스르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다(요 2:10).


영 어로도 '와인'은 포도주와 포도즙을 동시에 뜻한다. 현대에 와서 '와인'은 주로 포도주에만 쓰이는 말이 되었는데, 오래전에 쓰여진 이 단어를 모두 현대의 용례로 '포도주'로 번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이 술을 금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문맥별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바울이 권한 것도 자동으로 포도즙이 되는 것이다. 환자에게 술을 권하는 것도 비상식적이다.


술, 이제는 마시지 맙시다

술 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든지, '모든 것이 가하나...' 등의 성경을 이용한 궤변은 용납될 수 없다. 성경에서 술은 각종 죄의 도구가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드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아들 함에게 죄를 짓게 한 사건이 술에 대한 성경의 첫번째 기록이다(창 9장). 롯의 딸들은 아버지의 씨를 보존하자며 술에 취하게 하고 범죄하였다(창 19장). 또한 성경은 잠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술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이사야서 5장에서는 술이 지옥을 확장시킨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자들로 인해 지옥의 인구가 더해질 것이라는 대언이다.

" 화 있을진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되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따라가 포도주로 붉게 된 자들이여!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와 기뻐하는 자가 다 거기로 내려가리로다. (사 5:11, 14)

술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메시지를 볼 때, 주의 만찬 때도 순수한 포도즙이나 주스를 써야 함이 어느 모로 보나 옳다. 누군가가 변질시킨 전통을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적은 양이지만 술을 마시면서 유월절 어린양이신 흠없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생활에서 술을 완전히 멀리하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우리 모두 갖추어야 할 것이다.


** 원본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5087

2010년 9월 24일 금요일

주(여호와)의 아들, 하나님(엘로힘)의 아들들 (출4:22) / 김문수

원문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5066&page=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 곧 나의 처음 난 자니라(출4:22)
And thou shalt say unto Pharaoh, Thus saith the LORD, Israel is my son, even my firstborn:

1.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것이 천사들이 아니라 "경건한 셋의 후손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성경 구절을 찾다가 출애굽기 4장 22절을 만나면 대단히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의 논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끼워 맞추는 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4장 2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주(LORD, 여호와)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래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여호와가 아니라 모두 히브리어 엘로힘(스트롱코드 430)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창6:2).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창6:4).
이제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오니라(욥1:6).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주 앞에 보이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와서 주 앞에 자기를 보이니라(욥2:1).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38:7)
위 구절들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조주이신 엘로힘의 아들들, 곧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존재를 말합니다. 이는 곧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결코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셋의 후손들은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물려받은 자들이지 결코 경건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창5:3).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며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5:3).
셋의 후손들 중에서 방주로 들어와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노아네 여덟 식구 외에는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의미한다면, 그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아무도 방주로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셋이나 그의 후손들이 결코 하나님(엘로힘)의 아들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엘로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셋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아담의 아들이라고 합니다(눅3:38).
게난은 에노스의 아들이요, 에노스는 셋의 아들이요, 셋은 아담의 아들이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느니라(눅3:38).
Which was the son of Enos, which was the son of Seth, which was the son of Adam, which was the son of God.
출애굽기 4장 22절에 나오는 "내 아들"은 하나님(엘로힘)의 아들이 아니라, 주(LORD, 여호와)의 아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결코 엘로힘과 여호와가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동일한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은 엘로힘이라는 표현을 쓸 때도 있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쓸 때도 있는데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6장과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엘로힘)의 아들"이라는 표현과 출애굽기 4장 22절에 나오는 "주(여호와)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주께서 "내 아들"이라고 칭하신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팔레스틴 땅에 살고 있는 실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한국인 크리스천이나 미국인 크리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자리에 무작정 신약 교회를 대입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2. 신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합니다(요1:12).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the sons of God)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요1:12)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아담처럼 흙에서부터 다시 창조된다는 뜻도 아니고, 크리스천은 천사가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전에는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3)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엡2:4,5)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adoption)되었다고 합니다(롬8:15, 갈4:5).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롬8:15).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4: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된 그리스도인들(요1:12)과 하나님(엘로힘)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들(창6:2)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3.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
성경은 하나님께는 여러 아들들(the sons of God) 중 한 명이 아닌 한 분 아들(the Son of God)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녀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하오이다, 주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하니라(요11:27).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요일5:11).
성경 말씀을 변개한 오리겐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서열 2위의 열등한 신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변개된 성경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번역본들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흠정역: 어느 때나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NASB: No man has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God,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s explained [Him.]
KJV: No man hath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개역이나 NASB와 같이 변개된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이 낳은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 번역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성부 하나님이 먼저 있었고 그 후에 성자 예수님이 창조되었다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을 지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은 성부 하나님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독생하신 하나님(the only begotten God)이 아니라 그분의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기 때문에(히1:3) 그분은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영광과 권능과 속성을 갖추신 하나님이십니다(빌2:6-7).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믿지 않는 자들은 마침내 다음 성경 구절도 그들이 믿고 싶은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흠정역: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NIV: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NASB: who, although He existed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 thing to be grasped,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bond-servant, [and] 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
KJV: Who, being in the form of God, thought it not robbery to be equal with God:But made himself of no reputation, and took upon him the form of a servant, and was made in the likeness of men:
개역이나 NIV, NASB 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자기가 감히 해서는 안 되는 교만한 일이라고 여기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 순순히 복종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를 기특하게 여겨서 나중에 그를 크게 높여주었다고 합니다(빌2:6-11).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예수님께서 원래부터 하나님이시고, 그분과 똑같은 영광과 권능을 갖추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다(동등하게 되는 것이 아님)는 사실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강탈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의 모습이 되셨다고 합니다(빌2:6-11).
이처럼 얼핏 보기에는 두 번역이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엄청난 입장 차이를 보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독생하신 하나님"(the only begotten God)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진리의 성경 말씀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시며, 완전한 신성을 갖추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교과서가 바뀌면 배우는 내용이 달라지듯, 우리 믿음의 근본이 되는 성경이 달라지면 우리의 믿음과 교리도 달라지게 됩니다. 올바른 성경만이 우리를 바른 믿음 위에 세워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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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성경이슈로 어떤 목사님과 대화하던 중 빌2:6-7 절에 대해 언급하시던 목사님이 기억납니다.
개역 성경의 번역과 해석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오히려 흠정역의 "강탈"로 번역된 부분을 이상하게 여기시는 듯한 인상을 받았었는데 그 분께 이 글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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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4일 화요일

부전자전 (父傳子傳)

아기가 태어나니 정~~말 바쁘네요..
첫 아이라 더 여유를 찾기 힘들고, 아내는 아내대로 저는 저대로 최대한 버티고 있습니다.

가끔은 자꾸 울기만 하는 아기를 달래느라 제풀에 지쳐 화가 날때도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갓 태어난
아기에게 내 의지대로 내 뜻대로 해주기만 원하는 제 모습에 스스로 뉘우칠때도 있습니다.
이런건... 사랑이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서 자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생각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말도 할 줄 몰라 울기만 하는 아기처럼 그저 필요한게 있으면 하나님앞에서 울어대기만 하니까요.
무럭무럭 크라고 항상 넘치게 준비되어 있는 말씀의 젖도 잘 안먹고,
그렇다고 포근히 감싸고 계신 주님 품안에서 평안을 찾을 줄도 모릅니다.
트림을 시키려고 등을 두드리는 것인데도 등이 아프다며 당장 그만둬 주기를 바라고,
잠이 오면 자면 될텐데도 당장 잠들지 못한다고 찡얼거리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깨끗하게 기저귀를 갈기위해 배설물로 가득한 세상의 것들을 빼앗으면 곧바로 발을 동동거리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똥 오줌으로 가득찬 기저귀가 깨끗한 기저귀보다 더 좋다고 말이지요.
심지어 잠이 들어서도 혹시나 하나님이 어디 다른 곳에 가신건 아닌지 자주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확인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님 앞의 제 모습과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2010년 8월 18일 수요일

말씀의 젖

새로 태어난 첫 아이로 인해 거의 한달 만에 글을 써보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늦은 나이에 얻은 아이라서 그런지 아이를 키우는 모든 과정이 정말 신비롭고 대단하게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처음 며칠간은 제왕절개 수술로 엄마의 젖이 금방 나오지 않아서 아기는 살이 빠졌었습니다.
젖만 물리면 금새 잠에 빠지는 아기를 보면서 왜 먹지 않고 잠만 잘까 하고 애타게 고민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결국 엄마의 젖이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되었을때,
젖을 물고서도 먹지 못해 잠만 자면서 살이 빠져가는 아기의 모습은 너무 안타깝기도 하고
젖을 주고 싶은데 주지 못하는 엄마의 울음도 옆에서 지켜보는 제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이제는 정상적으로 젖을 줄 수 있게 되어서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는 아이의 모습에 또 놀라워하기도 하지만,
젖을 주지 못할때... 살도 빠지고 약해져서 잠만 자던 아이의 모습을 통해 제 신앙적 모습을 돌아보게 되어
깊이 회개하였던 기억도 납니다.

말씀의 젖.

우리는 늘 말씀없이도 잘 살수 있는것처럼 살아가지만,
나의 아이를 보면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궁핍한 삶을 사는지 알게됩니다.

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수고를 통해 이토록 풍성하게 주신 바른 말씀을
더 열심히, 매일매일 부지런히 읽어서
이렇게 낳아주신 하나님께 저의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말씀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2010년 8월 10일 화요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 김문수

장문의 글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글이어서 이곳에 옮겨둡니다.
아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순식간에 읽힐겁니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649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http://www.keepbible.com 에 가셔서 이 분이 쓰신 자유게시판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아마
마른 목을 적시는 듯한 느낌을 받으실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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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롬12:2)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12:2).


1970년대 후반에 기독교계에서 유행하던 우스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어떤 못 생긴 여자가 그의 무릎 위로 넘어졌습니다. 그 신학생은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버스가 급정거하자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예쁜 여자가 넘어지면서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여,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다고 합니다.

주(主)라는 크고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을 가지고 우스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잘못이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 "주님 뜻대로"라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의미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주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만큼 널리 사용되면서도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도 드물 겁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은 인생 여정은 한 가지일텐데 자기가 그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위해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애타게 찾고자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상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작은 선택의 문제 하나하나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기까지는 감히 행동으로 나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다른 분들은 자기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으면서 "뭐,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체념을 하거나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번 주제는 글로만 전달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볼만한 흥미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어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입장을 한번 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1)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

기독교인들 중에서 많은 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며,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은 장래 일을 그분의 뜻에 따라 미리 결정해 두었기 때문에 사람이 이를 거스르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숙명론적인 주장을 믿는 분들은 자기들이 실수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길 혹은 계획하지 않으신 길을 선택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매사에 선택과 결정의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숙명론, 운명론에 빠지게 된 데에는 칼빈주의에서 나온 잘못된 예정론 교리가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무엇이거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독재자 혹은 전제군주로 보았으며, 그에 비해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사상과 교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한 개인의 장래는 하나님에 의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숙명론에 쉽게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교도들의 신들과 같이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자기 멋대로 해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이교도들의 신들은 델피의 신탁을 통해서 "오이디푸스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으면, 사람들이 제 아무리 그 운명을 피하고자 오이디푸스를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이려고 해도 결국은 신탁의 내용대로 이루어지고 맙니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에서 나쁜 마법사가 "공주는 열 여섯 번째 생일날 물레에 찔려 죽게된다"고 하면 왕이 나라 안에 있는 물레를 다 없애버리더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고 그분께서 써 두신 각본대로 사람이 움직이도록 조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이나 인형에 불과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마26:34). 그러나 주님의 미리 아심(예지)이 베드로의 선택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계획되고 작정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니라(마26:41).

베드로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님을 부인하도록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면,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둘 일이지 구태여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로 대비하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부인할 것인지 시인할 것인지를 선택할 여지가 남아있었다는 겁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30:19).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나쁘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거하고 있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수24:15)

심지어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문을 열고 그분을 모셔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 역시 우리 각자가 결단하고 선택할 문제이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자신의 미래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자신의 모든 행동과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에 대해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선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그냥 하고 싶은대로 기분내키는대로 하면 될 일이지 왜 골치 아프게 이런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합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자기 맘에 드는대로 행동합니다. "내가 오늘 경건치 않은 분위기의 모임에 가게 되는데,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막아서 못 가게 하실 것이다." 이런 변명을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내세우고 하나님의 적극적인 반대가 없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의 천사를 보내어 대언자 발람을 막듯이 그를 가로막기 전에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창조주시요, 통치자시요, 심판자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자기 멋대로" 권능을 행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사랑과 공의라는 기준에 따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시기에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개인의 선택과 판단을 존중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나중에 그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시고, 주의와 경고를 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미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빠져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을 위해 최적으로 맞춤 설계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궁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무당들을 찾아가서 상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일상생활에서의 선택과 하나님의 뜻

여러분은 신발을 신을 때 오른발과 왼발 중 어느 쪽부터 신습니까? 혹시 어느 쪽부터 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께 물어보고 결정합니까? 오른발부터 먼저 신을 경우에는 왼발부터 신을 경우에 비해서 여러분 앞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종종 이런 사소한 영역 하나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따라 행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발부터 신발을 신느냐 하는 문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밥은 숟가락으로 뜰까요, 젓가락으로 집을까요?", "제가 짜장면을 먹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짬뽕을 먹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오늘은 제가 성경 어느 부분을 읽기를 원하십니까?" 등을 일일이 물어보고 주님의 뜻을 분별한 다음에 행하려고 합니다. 아마 정상적인 경우라면 하나님께서는 위의 각 질문들에 대해서,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라.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라. 어제 읽은 다음부터 읽어라."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이처럼 생활 중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참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분들이 전혀 일상생활에 지장을 겪지 않고 신발을 신기도 하고, 수저를 사용하기도 하고, 짜장면을 먹기도 하고, 성경을 읽기도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행치 않겠다더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물으면, 그분들은 당당하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다."라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 선택과 결정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반 상식과 개인의 선택권을 무시하면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 상당한 이질감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직통 계시를 주지 않으실텐데 도대체 그 계시라는 음성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어둠의 세력에 속한 악한 영들로부터 온 것이거나 자기 마음 속의 욕망이 발하는 메시지일 겁니다.

이전에 제가 결혼하기 전, PC통신 게시판을 통해 여러 형제 자매들과 결혼에 대한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자매가 바로 "내가 하나님께 물어봤더니 ~ 라고 하시더라."라며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자매가 저에게 "내가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형제님의 모습을 보여주더라."라고 말하며 접근해 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자매치고는 좀 대범한 프로포즈라고 생각하며 좋아했을까요?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고 받아주었을까요? 저는 한번도 그 자매를 결혼 대상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가 관심도 갖고 있지 않는 사람하고 결혼하라고 하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냥 무시해 버렸습니다. 결국 저는 그 자매와 결혼하지 않았고 그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 자매의 입장에서는 나와 결혼하는 것이 그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여러가지 사소한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일일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하여 어떤 신비한 음성을 들으려고 하거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이성과 분별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 상식과 이성과 선한 양심에 따라 선택을 하면 됩니다.


(3) 안 되면 조상 탓 대신 하나님 탓?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사전에 결정되어 있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각본대로 따라가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처한 모든 상황은 자기 의지와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선택하여 얻은 결과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여 병에 걸리거나, 늦잠을 잤기 때문에 학교 수업에 지각을 하거나, 운전 중 한 눈을 팔다가 교통사고를 내고서도 태평하게 "이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여기에도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실한 자세로 건강하고 평안한 가운데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지, 뭔가 교훈을 주기 위해서 자기 자녀들을 강제로 병들게 하고 사고를 당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원인을 무조건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숙명론을 빙자하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합리화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이 잘 안 되면 조상 탓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두시고, 순종과 불순종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하여 얻은 결과를 팔자 소관이나 운명 탓으로 돌리는 입장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한 것이거나 사람의 잘못이나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4)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란 건 없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한 최적의 인생항로를 정해 두셨다고 생각하고 과연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신비한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려고 애쓰고, 또 어떤 이는 그런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기독교 무당 앞에 가서 상담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개의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자기 뜻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선교단체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저와 함께 성경을 읽고 깨달은 내용을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필 심이 뚝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건 오늘은 성경을 그만 읽으라는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성경을 덮어버렸습니다. 성경 읽기 노트를 작성하다가 연필 심이 부러진 것이 과연 성경 읽는 것을 중단하라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연필을 새로 깎아서 쓸 수도 있고, 다른 펜으로 기록할 수도 있고, 혹은 기록하지 말고 성경만 읽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는 성경을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이 들자, 자기에게 닥친 그런 사소한 환경의 변화 하나를 핑계거리로 삼아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을 하여 자기가 내린 결정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지역교회 연합 모임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주 아름다운 자매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청년은 그 자매가 마음에 들었지만 교제를 신청했다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봐 말을 건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꺼냈습니다. "저기~ 안녕하세요. 오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과 결혼하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 주셨는데, 괜찮으시다면 우선 친구로 사귀어 보실래요?" 그러자 그 자매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그럼 우선 집에 돌아가서 제 남편과 한번 상의해 볼께요."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 속으로 원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고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최종 결재 도장을 찍어주기를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가부를 판단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결재 도장을 찍고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의 간섭이나 참견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계획과 의지를 관철시키고, 사람들 앞에서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온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나를 위해서 뭔가 일을 해 주는 도우미로 여기는 자기 중심적 사고에 기초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나오는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그분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위한 뜻이지 결코 사람을 위한 뜻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 "너희를 향한 그분의 생각"은 있어도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없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 하니라(눅2:14).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노라. 그것은 평안을 주려는 생각이요, 재앙을 주려는 생각이 아니니 곧 기대하던 결말을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렘29:11).

자신의 삶 가운데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중심이 되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 뜻, 자기 계획을 많이 세우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런 수많은 계획을 세울지라도 오직 주의 뜻만이 서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잠19:21).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 그것만이 서리라(잠19:21).

그러므로 하나님을 종으로 여기고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맞춤 설계는 무엇인가?"를 찾는데 골몰하지 말고, 먼저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고(엡5:17),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약4:15).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그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며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하여야 하나(약4:15)


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인 예

이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반적인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짬뽕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라고 묻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먹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내가 오늘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 마태복음을 읽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그다지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마4:4).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성경을 어떤 순서로 읽을 것인지는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결정하면 될 일입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이번에는 좀 더 중요한 문제,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어떤 형제가 영희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순희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에는 "나의 결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대신 결혼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지 말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8). 그러므로 독신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서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좋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마19:12, 고전7:26).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으면 믿음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후6:14).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것은 물론이고, 두 사람이 함께 걸으려면 주 안에서 같은 믿음의 방향과 목표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암3:3).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느냐?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느냐?(고후6:14)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암3:3)

그리고 일단 결혼하면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엡5:33).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결혼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듯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엡5:33).

결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이렇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그런 기준에 따라서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하면 됩니다. 만약 그런 조건에 맞는 대상자가 여러 명이 있다면 그 가운데서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 선택은 여러분 자신의 몫입니다.

3.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적인 예

우리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인물들의 사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는지, 또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선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야곱의 결혼

아브라함의 종이 신부감으로 데려온 리브가와 결혼한 이삭과는 달리 야곱은 자기 스스로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중매 결혼을 했느냐, 연애 결혼을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방법은 각기 장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야곱이 배우자를 선택한 판단 기준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기 좋은대로 아름답고 잘 생긴 여자를 선택했습니다(창29: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우나 라헬은 아름답고 잘생겼더라(창29:17).

레아를 선택하건 라헬을 선택하건 그것은 야곱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삼상16:7). 그래서 그분은 얼굴이 예쁜 여자보다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잠31:30). 눈에 보이는 정보에 따라 행하는 것은 믿음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후5: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16:7).

호의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주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으리라(잠31:30).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고후5:7)

야곱은 라헬을 연애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 동안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잔치를 마치고 신부와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간교한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 속아서 결혼한 야곱은 다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결혼을 무효로 돌리고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 일할 것인가, 아니면 레아를 평생 아내로 사랑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 여러분 중 누군가가 야곱에게 다가가 "이것도 다 주님의 뜻이겠지요." 라고 말하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체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더라도 라헬을 애타게 연모하는 야곱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야곱은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간 더 라반을 위해 일을 하겠다고 자처합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야곱이 레아와 결혼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레아를 미리 그의 신부감으로 점찍어 두셨는데, 야곱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라헬에게 마음을 두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라반을 사용하여 야곱에게 속임수를 써서 레아와 억지로 결혼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중 어느 하나를 야곱을 위해 예정하고 이를 그에게 강요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레아, 라헬이 태어났을 때 보이지 않는 실로 그들을 연결하여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천생연분의 배필로 맺어지게 하는 삼신 할머니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존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이는 것이나 야곱이 그 속임수에 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레아가 결혼한 것은 라반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므로 이 결혼은 무효로 해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좋아했지만, 레아 역시 야곱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그녀에게 라헬 대신 신방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을 때 이를 수락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로 위장을 하고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장자의 축복을 받고 싶었던 것처럼 레아 역시 자기 동생 라헬 행세를 하며 야곱을 속여서라도 그에게 시집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유효했던 것처럼,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결혼한 것도 유효합니다.

이제 이렇게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부부가 된 상황 하에서 과연 야곱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야곱은 레아를 원치 않으니까 그녀를 내쫓아야 할까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아내가 음행을 한 적이 없다면 그녀를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며 또 누구든지 이혼 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마5:32).

레아가 야곱을 버리고 간음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녀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레아와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라헬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이 좋을까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결혼 제도를 만드실 때 한 남자(a man)가 한 명의 아내(his wife)와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일부일처 제도를 만드셨습니다(창2:24). 그러므로 야곱이 레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처제인 라헬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그 상황에서 야곱은 레아를 부인으로 인정하고 자기 아내가 된 그녀를 사랑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록 레아가 라헬만큼 귀엽고 사랑스럽지는 않았겠지만, 야곱은 그녀를 아내로서 사랑해야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슴 설레는 애틋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선택이며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황홀한 연애 관계를 깨뜨린 레아를 미워하였고(창29:31), 라반에게 7년간 더 일해 주기로 약속하고 라헬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주께서 레아가 미움 받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수태하지 못하였더라(창29:31).

제 생각에는 야곱이 그때 레아라는 한 여자로 만족하고 그녀를 아내로서 사랑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괜히 라헬까지 아내로 맞아들이는 바람에 레아와 라헬 두 자매 사이에는 반목과 질시가 있었고, 서로 아들 낳기 경쟁을 하다가 마침내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두고 열두 명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르우벤과 빌하 사이에는 근친상간이 일어났고, 배다른 형제들은 서로 시기하고 다투다가 마침내 자기 형제 요셉을 노예로 파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만약 야곱이 레아와만 결혼하면 이스라엘 12지파는 어떻게 생기느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으나, 저는 하나님께서 꼭 네 명의 아내를 두어야만 이스라엘 12지파를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한 명으로도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백성을 만드셨으니 레아가 낳은 여섯 명의 아들들로도 충분히 크고 강한 민족을 만드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라반이 야곱을 속이는 것이나, 야곱이 속아서 레아와 결혼하는 것이나, 그가 자기 아내 레아를 미워하는 것이나, 그가 또다른 아내들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가 라헬과 결혼하느냐, 레아와 결혼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자기 아내가 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분명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야곱의 뜻이나 야곱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도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을 좀 더 오래 부려먹고 싶은 라반의 뜻이며, 그런 속임수를 써서라도 야곱에게 시집가고 싶은 레아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과 레아의 자유의지를 가로막지 않고 내버려두셨을 뿐입니다. 제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야곱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야곱의 뜻 이외에 라반의 뜻과 레아의 뜻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제가 예로 들었던 자매, "결혼을 위해서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형제님을 보여주셨다."라고 하던 그 자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순전히 그 자매의 뜻이었지, 제 뜻도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A 자매와 결혼할 것인지, B 자매와 결혼할 것인지에 대해서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결정을 내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들 자기 중심적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끼워맞추다보니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럴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버리셨는가?",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라고 생각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야곱은 한 여인과 결혼하여 그녀를 일평생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처음에 점찍어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일부일처 제도를 위반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가 다른 아내를 취하는 것을 막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따라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그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란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다 치밀한 계획 하에 정해져 있다고 하는 숙명론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곱은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그 결과 그의 가정 생활이 엉망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든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그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과 실수까지도 다 수습하셔서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최종적으로 선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롬8:28). 숙명론자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12 지파를 만들기로 작정하셨다. 이를 위해서 야곱이 12명의 아들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가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도록 예정해 두셨다. 그냥 내버려두면 야곱은 라헬과만 결혼하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은 레아도 야곱과 결혼하도록 라반을 시켜서 야곱이 결혼 사기를 당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자매들이 서로 아들 낳기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야곱이 레아를 미워하고 그녀를 구박하도록 하셨고, 그 자매들이 자기 하녀들도 남편에게 첩으로 갖다바치게 하셨다."고 하고 싶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이미 저질러진 야곱의 실수와 라반의 죄, 사람들의 욕망의 산물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야곱을 속인 것이 아니며,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 아내를 둔 것이 아닙니다.


(2) 요셉의 고난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관심과 총애를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통해서 자기가 형제들 가운데서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아버지의 총애와 그의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흉년으로부터 구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풍부한 자원으로 크게 번성하게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번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즉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한 도구입니까?

숙명론자들은 창세 전에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그의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파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의한 것이며, 또한 그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에 의해 집행된 것이며 하나님은 그 모든 죄의 배후 세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런 죄를 짓도록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신 적이 없다고 증거합니다(렘19:5).

또한 그들이 바알의 산당들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로 바쳤나니 그것은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한 바가 아니니라(렘19:5).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것은 그들의 시기심과 탐욕 때문이었지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의지로 요셉을 팔 수도 있었고, 팔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노예로 팔려서 이집트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그분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을 훔쳐다가 상품으로 파는 것을 죄라고 하시며 그에 대해서 벌하시는 분입니다(신24: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훔쳐다가 그를 상품 취급하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도둑을 죽일지니라. 너는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할지니라(신24:7).

어느 누구도 요셉의 형들이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요셉을 노예로 팔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유다가 며느리와 간음을 한 것도,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한 것도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도록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업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일등공신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 기록을 살펴보면,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동생을 노예로 팔지 않았으며 요셉 역시 팔려가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며 그분을 찬양하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요셉은 과거 일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창50:20)

분명히 그 형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셉에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형들이 저지른 악행조차도 사용하셔서 그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일으키는 일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노예로 팔리지 않았더라면 이 하나님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팔리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그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요셉이 팔려가는 비극적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처럼 크고 놀라운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다면, 요셉이 팔려가지 않고 다른 형제들과 화목했더라면 더욱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최적화된 마스터플랜이 이미 나와 있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거쳐가야 하는 인생 경로까지도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나의 이런 죄악된 행동과 부정적인 환경도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이므로 이것은 주의 뜻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죄와 실수를 정당화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3) 모세의 인생 여정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구출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가 40세에 살인자가 되고, 80세에 부르심을 받고, 120세에 죽도록 미리 그분의 뜻에 따라 그의 운명을 예정해 놓으셨던 것일까요?

이집트의 왕자로 자란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동족들의 고난을 돌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여러가지 선택가능한 대안들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자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방법, 자신이 이집트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방법, 백성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고 탈출하는 법,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의 노예 감독을 몰래 해치우는 방법 등... 모세는 자기 형제를 학대하는 자를 쳐서 죽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행7:25).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40세에 이집트 사람 한 명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쳐야 했을까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40년간을 광야에서 살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모세는 광야에서의 생존 전략을 미리 연구하기 위해서 미디안에서 양치기 생활을 했어야 할까요?

만약 모세가 숙명론자였더라면 자기가 저지른 살인죄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내가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 무슨 뜻이 있어서겠지요."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당시에나 그후에도 결코 자신의 죄에 대해 그와 같이 변명하거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살인자가 되어서 광야로 도망한 후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신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모세가 스스로 판단하여 저지른 일입니다. 비록 모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택하지 않고 죄를 지었지만 그의 죄와 실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무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저지른 잘못까지도 선을 이루는데 사용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그 길이 평탄하고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실수와 약점 때문에 좀 더 그 과정이 길어지고 시간이 지연되기도 하지만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면 곧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지만, 그들이 믿지 않으면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패역한 자들이 다 죽어 소멸된 후 남은 자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거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성취하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집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혹은 체념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신대로 다 알아서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무절제와 방탕에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상황을 선하게 사용하여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충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하며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만약 현재 처한 상황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깨달았을 때 즉시 거기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4) 사도 바울의 선교

사도 바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분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워 땅끝까지 이르러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네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을 위한 일꾼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매(행13:47)

그런데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의 선교 방향을 두고 한 가지 선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사도가 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행21:4).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아가보라고 대언자가 찾아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되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했습니다(행21:10-14).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혹시 사도 바울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동족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고 로마로 이송되어야만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물거품이 되어 버릴까요? 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행 선택 여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던 제자들은 결코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를 권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말했으며(행21:4), 성령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행21:11).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을 뿐 결코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거나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 바울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분의 뜻을 가지고 계셨고, 이미 이를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를 신중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루살렘에서나 혹은 다른 곳에서나 주님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일 주님께 순종하며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사는 한, 주께서는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도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수 있고,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떠어떠한 경로를 거쳐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일까?"에 대해서 고민하지 마시고 사도 바울처럼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4.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일반적인 예와 성경적인 예를 통해서 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선택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성경에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짚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 대표적인 성경 말씀들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고후7: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너희는 음행을 삼가고(살전4: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위에 열거한 구절 이외에도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겠지만, 죄를 미워하고 슬퍼함으로 회개에 이르는 것, 거룩한 분리와 성별된 생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과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등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반적인 원리보다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원합니다. 내가 어느 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좋은지,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내가 어느 선교지로 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구체적인 부분들을 관광코스 안내지도처럼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느 유원지에 들렀다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어떤 유적지를 방문했다가 그 다음에는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채로 우리에게 제시해주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지금부터 너희는 강을 따라 올라가서 하란으로 가고 거기서 머물다가 데라가 죽거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지시한 땅"이 아니라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직 아브람에게 가야 할 여정은 고사하고 최종 목적지조차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는 겁니다(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히11:8)

그런데 아브람이 어떻게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인줄 알고 거기로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그가 매일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눈에 펼쳐진 관광 안내지도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풀어서 읽어야 하는 두루마리(scroll) 성경과 같습니다. 현재 펼쳐진 부분을 읽고 나야만 그 다음 부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통해 가르쳐주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할 때 그 다음 단계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5.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를 구했고(렘42:3),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렘42:6).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갈 길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우리가 당신을 주 우리 하나님께 보내오니 일이 좋든지 나쁘든지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리이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면 잘되리이다, 하니라(렘42:3,6).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에게 그 땅에 머무르며 바빌론 왕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자,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며 예레미야가 전한 주의 말씀을 부정했습니다(렘43:2). 그들은 애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생각이 없었으며 자기 마음속으로 속인 것입니다(렘42:20).

너희가 나를 주 너희 하나님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해 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대로 우리에게 밝히 알리소서. 우리가 그것을 행하리이다, 하여 너희 마음속으로 속였느니라(렘42:20).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만 하고, 정작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에 순종하지 않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하면서 부지런히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없으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롬12:2)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5:16-18; 눅2:14)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맞춤형 설계도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주의 뜻 그것만이 서리라(잠19:21).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잠3:5,6).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주의 법 vs. 세상의 법

(알레프) {주}의 법 안에서 걸으며 그 길에서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분의 증언들을 지키고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또한 불법을 행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길들로 걷는도다.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사 부지런히 주의 훈계들을 지키게 하셨사오니
오 내 길들을 인도하사 주의 법규들을 지키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주의 모든 명령에 관심을 기울일 때에 부끄럼을 당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울 때에 올바른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의 법규들을 지키오리니 오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편 119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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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법안에서 걸으며 그 법을 최대한 이용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세상의 법을 지키면서 온 마음으로 돈을 찾는 자들에게 성공이 있나니
그들은 또한 세상 법을 지키면서 부자의 길들로 걷는도다.
세상이 우리를 종용하여 법만 어기지 않으면 된다 하였으니
오 내 길들을 인도해서 법을 잘 이용하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법의 모든 조항에 관심을 기울일때에 부끄럼을 당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세상의 법조항을 배울때에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돈을 추구하리이다.
내가 세상의 법을 지키오리니 오 나를 거지로 만들지 마옵소서.

2010년 7월 9일 금요일

오랜만에.

제가 예전에 적어둔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때보다 나아진게 하나도 없어보여서 눈물이 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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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자주 흘리던 눈물이
어느새 메말라버려서 내 마음도 그렇게 말라버린줄만 알았습니다.
화려하고 신기한 세상의 것들을 보는것이 왜 그리 좋던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나의 이 두 눈이 붉게 충혈되도록 그렇게 주님을 외면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사이에 주님께서 다시 제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왜 이리 못나게 굴었던지요..
왜 그리 죄송스럽고 .. 이 되먹지 못한 것이 얼마나 밉던지요..

울보가 되어도 좋고 바보가 되어도 좋으니
오늘처럼만 주님이 내 마음을 두드려주시면 좋겠습니다.  -2003년. 봄.

2010년 7월 8일 목요일

부모의 선택

갓 태어난 아기는 목을 가누는 힘이 없어서 한 손으로는 항상 목을 받쳐주며 들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육아 교육을 받으면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목을 앞뒤로 가누는 힘은 없지만 좌우로 가누는 힘은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힘이 없더라도 앞뒤가 아닌 좌우로 쏠리는 머리는 안전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생아에게 그럴만한 힘이 있을거라고는 믿겨지지 않거든요.)

아무튼 아기를 들때 옆구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살짝 돌려서 들어주면 굳이 목을 받치지 않아도 안전하고 매번 이렇게 들어주면 목 주변의 근육 운동도 되어서 어쨋거나 아기에게는 더 좋다고 합니다.

물론 아기는 더 힘들겠지요. 누군가 자신을 들때마다 계속해서 목에 힘을 주게 될테니까요.
한 손으로 목을 받쳐주고 자신을 들어주면 힘 하나 들이는 것 없이 훨씬 더 편할겁니다.

그러나 저와 제 아내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는 아기를 들때에는 항상 옆으로 돌려서 들기로 곧바로 결정했습니다. 게다가 좌우 번갈아서 골고루 들어주기로 말이지요.


어찌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갓태어난 아기에게조차,
힘이 더 들고 불편한 것을 강요하는 것은(그것도 부모라는 사람들이),
그것이 아기에게 더 좋은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때문입니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기때문이고 그것을 버틸 힘이 있다는 것도 알기때문입니다.
그것이 아기를 힘들게 할수는 있어도 해를 입히지는 않을것이라는 것도 알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이렇게 키우시는것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아기를 드는 간단한 일에도 아기의 몸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필요하고 거기에 맞춰 가장 좋은것을 선택하는데, 우리의 모든것을 알고 계시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실지는 자명합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그런즉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마음에 의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민족들이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 누가복음 12:28-32


위의 두 구절이 더 깊이 마음에 새겨지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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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6일 화요일

안정감.

어제는 퇴근후에 아내와 함께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아기 돌보기 교육에 다녀왔습니다.

아기를 드는 법에서부터 옷을 갈아 입히는법, 씻기는 법, 기저귀를 가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아기의 무게와 비슷한 약 3.5 킬로가량의 아기 인형은 십여명이 넘는 참가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옷과 기저귀를 갈아 입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배우면서 하나 느낀것이 있는데, 아기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이 안정감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름대로 적응해서 편안했겠지만... 좁고 꽉 끼던 엄마의 자궁을 떠나 세상에 태어나면, 갑자기 팔과 다리를 쫙 펼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으로 바뀌는 것에 아기들이 불안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를 일부러 이불로 꼭 감싸주기도 하고, 아기를 옮기거나 안을때에도 항상 손으로 몸의 대부분을 감싸서 잡아주거나 땅에 몸의 일부가 항상 닿아 있도록 하는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저 두 손으로 덜렁덜렁 안거나 이러한 배려없이 들거나 하면 불안감에 곧바로 울어버린답니다.

단지 이런 사실에서도 수많은 신앙적인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또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 자라고 있는 나의 영적인 상태를 생각하며
아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수 있을것도 같고, 앞으로도 많은 신앙적 성숙이 있을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자녀를 둔 거듭난 모든 형제 자매님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2010년 7월 2일 금요일

그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기에,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큰 잘못으로 인해 어쩔수 없는 헤어짐을 잠시 맞이하여도...

용서하며,

사랑하는 그 사람과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노예로 팔려가버린 그 사람의 주인과 만나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며

함께 지낼 곳을 마련하여 늘 동행하기를 원하는 건...



완전한 사랑때문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 누가 그분의 백성이냐?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에스라 1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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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8일 월요일

보소서, 우리가 이 날 종이 되었사오며

보소서, 우리가 이 날 종이 되었사오며, 보소서,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거기에서 나는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신 그 땅으로 인해 우리가 그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 그 땅이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왕들에게 많은 소출을 내고 또한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마음대로 지배하므로 우리가 큰 고난 중에 있사옵나이다. (느헤미야 9장 36-37)

하나님께 받은 복이 우리의 죄로인해 우리를 오히려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받은 징계로 인해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앞에 나아갈때
그것은 우리를 다시금 세워주는 훌륭한 복이 됩니다.

어느덧 나이가 중년의 초입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주님 보시기에 절대 기뻐하실 만한 삶은 아닌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은혜와 희생으로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신 제 인생을 통해 더 많은 열매를 바라시고 계실 충분한 권리가 있으신 분이기에
그분앞에 저의 남은 삶이 지금의 모습처럼 가득채워지기를 기도할수는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오직 은혜로 물려받고 결국은 그들의 죄로 인해
그 땅의 종이 되어버렸던 이스라엘.
그리고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시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며
말씀으로 다시 기초를 세워가도록 도우시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기록들을 보면서

나의 남은 인생에서는 주님의 복을 걷어차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지름신.

지름신이란 단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맥 유저가 되면서 더 자주 접하는 경험이라 앞날이 은근히 걱정도 되구요.


어제는 시내에 잠시 나갔다가 아이패드를 보고나서는 "지름신 강림"으로 표현되는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하루가 지난 오늘은, 뭔가 사고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내 모습이 좀 객관적으로 보이면서 아주 한심하다는 생각이 가득하네요.

이 "지름신"이 가면 또 다른 지름신이 오겠지요?
혹시나 이 사이클이 죽을때까지 반복할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제 삶이 너무나 육신적이라는 걸 정말 시시각각 느끼고 있습니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Serif 와 San Serif

이래저래 글을 자주 접하고, 또 쓰기도 하면서 폰트에 점점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웹브라우저나 혹은 다른 프로그램등에서 기본적으로 쓰이는 폰트를 다른 폰트로 바꿔쓰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에 Sans Serif, Serif 등이 뭔지 드디어 알게되었네요.

Serif 는 불어로 발, 혹은 끝부분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폰트의 획 끝이 약간 구부러진 폰트들은 Serif 라고 하고, 앞에 '~이 없는'이라는 뜻의 불어인 Sans 이 붙으면 우리나라에서 고딕체라고 불리우는 폰트들처럼 획의 끝부분이 구부러짐없이 끝나는 폰트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굴림체나 고딕체는 Sans Serif 이고,
바탕체는 Serif 인거죠..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일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벽을 건축하여 모든 성벽이 함께 연결되고 높이가 그것의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에게 일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더라 (느헤미야 4장 6절)

민족의 대부분이 몇개월이 걸리는 거리{1}의 먼 땅에 포로로 잡혀가서 종살이를 하다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일은 참 보기 드문일이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기적적으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의 집(에스라서)과 허물어진 성벽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면 참 생각이 많아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마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일들을 생각하며 많은 밤을 보냈겠습니다. 또 낮의 열기속에서 그들이 흘린 땀방울 속에는 그 회한이 가득할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각종 건축기계와 시설들을 활용해서 짓는 것도 쉬운일은 아닌데,

오직 주어진 손과 발로 몇년의 시간을 들여서 기초를 놓고 하나하나 벽을 쌓아 올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집을 완성하고 또 느헤미야서의 기록에서처럼 성벽도 올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그것도 다시 돌아온 그 민족이 다른 민족의 도움없이 스스로 담당한 일이며, 더구나 이 일을 하려는 생각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유대 사람들에게 성막, 혹은 하나님의 집이었던 성전에 관한 기사를 볼때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지금의 교회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오해처럼 성전을 짓는다는 성경의 기사를 교회 건물을 짓는 일로, 혹은 교회 건물을 짓는 일도 포함된다는 식의 비유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알고 계시듯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회는 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무리를 뜻하고 또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살아있는 돌들로 표현되는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바로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눈에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그 안에는 어떠한 건물을 짓는 일이나 기타 다른 일이 포함될수 없지요.

어찌되었건, 느헤미야서에는 이렇게 다시 성전이 지어진 다음 도시를 두르는 성벽을 쌓아 올리는 기사가 나와있습니다. 왜 성벽을 쌓는지는 아마 잘 아실것이라 생각됩니다.

바깥으로부터의 여러가지 부정적인 침입을 막기 위해서 이지요.

짐승의 무리가 공격할수도 있고 또 외부의 다른 족속들이 공격해오는 것 등등을 막기위한 기본적인 안전장치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성벽을 짓는 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울부짓는 사자가 먹이를 찾듯 온갖 악한것으로 가득한..
그곳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성벽은 어디에 있으며 누가 그것을 위해 일하려 하고 있습니까?

오늘 일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유대 백성을 보면서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성벽과 그것을 쌓아올리려는 생각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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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 7장 9절: 그가 첫째 달 초하루에 바빌론에서 떠나 올라오기 시작하여 그의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그 위에 있으므로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라

블로그 이사

다시 이사왔습니다!

이젠 글의 폭너비도 고칠수 있고, 댓글도 블로그 글 아래에 바로 붙어 있군요.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 기분이 좋습니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붉은 악마.

어느덧 또 한 번의 월드컵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요즘 각종 매체들을 통해 선수들의 소식들 뿐만 아니라

응 원단체인 "붉은 악마"에 대한 소식들도 자주 보게 됩니다.

평소에 축구를 그리 즐겨하거나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언제나 국제경기가 열릴때면 꼭 함께하며 응원하고 싶고,

고국을 떠나 살다보니 국제경기라고 하면 그 경기가  어떤 종목이던 간에 더욱 관심이 생기고 힘을 보태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  같은 경우 "붉은 악마"라는 한국의 응원단체는 2002년 월드컵부터  알게 되었고,

마침 그 해에 한국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성적으로 4강 진출이라는 성적을 내면서 한국팀의 대표 응원단 이름으로

"붉은 악마"라는  이름은 세계적으로 더욱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던것 같습니다.

누구나 붉은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면 "붉은 악마" 응원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열린 분위기와 하나된 느낌,

특히 2002년에  있었던 16강전, 8강전 그리고 4강전에 이르는 큰 의미를 지닌 국가 대표 경기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고

또  승리하면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 옷을 입고 응원하는 것으로 응원하는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너무도

당연 한 것처럼 여겨졌던것 같습니다.

최근 모 방송국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붉은 악마"라는 이름은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를 할때 그 당시 외국의

신문기자가 붉은 옷을 입고 경기했던 한국팀을 자신의 기사속에서  "red Furies(붉은 악령)" 라고 표현했던 것이 시초가 되어

한국어 번역에 다시 영문으로 재 번역되면서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몇몇 기독교계에서 "붉은 악마"라는  이름속에 있는 "악마"라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에 대한 글들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여러 기독교 단체내에서  "악마"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을 놓고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심지어 올바른

기독교 문화 선도를  위해 "천사 응원단"이라는 응원 단체도 만들어내어 "붉은 악마"에 필적할만한 응원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애쓴 다는 소식도 접하게 됩니다.

"붉은 악마" 라는 이름이 비록 축구 경기를 응원하는 단체의 이름일  뿐이며,

그들 스스로도 사전적 의미의 "악마"라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무 엇인가 강한, 그리고 동시에 상대 팀에게 위협이 될만한 이름으로 차용한 이름이겠지만,

사람들은  어느새 "악마"라는 단어가 가진 사전적 의미의 상징성을 조금씩 조금씩 빌려와서는

얼굴과 몸에 검붉은 칠을 하고,  머리에는 뿔을 달고, 붉은 색 창과 붉은 색 옷으로 몸을 치장합니다.

또한 그 이름에 걸맞는 형상과 심볼을 위해  "치우천왕"이라는 옛 신(神)을 들여오고 현대적 디자인을 통해

옷과 깃발등에 새겨넣습니다.

여 자들은 저마다 붉은 옷과 태극기, 뿔 등으로 패션코드일 뿐(!)인 "섹시"함을 드러내려하고 그것이 월드컵 기간에는

전 혀 이상하지 않은 문화처럼 자리매김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유럽의 카니발을 연상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이곳에서조차 느낄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보자면 저 아래 나무 밑둥에서는 나름의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인 많은 것들이

저 위 가지의 끝에 맺히는 열매들을 통해 그 진가?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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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월드컵때 우리나라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정해진 경기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뛸때

저도 아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응원할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붉은 옷을 찾아 입거나 "붉은 악마"처럼 혹은 "붉은 악마"가 되어 응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제 마음속에 있는 애국심으로 다른 국제 경기들을 보며 응원하던 그 마음으로 한국 축구팀을 응원하겠습니다.

하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 마음속에 남아있는 이 씁쓸함과 어두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유명해지기의 덫

아래의  글은 김재욱 형제님께서 www.keepbible.com 의 자유게시판에 올려주신글을 갈무리 한것입니다.

링 크




누구에게나 있는 인생의 자랑

여자보다는 남자가 좀 더 강하다지만 누구에게나 명예욕, 즉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모두들 자기가 열심히 뛰는 것에 대해 특정한 의미부여를 하거나 빙빙 돌려서 말하고 대외용으로 포장도 하는데, 유명한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는 정면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나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이 알려지고 인정 받기 위해  일한다."

그래서 '인생의 자랑'이란 과연 죄성을 지닌 교만한 인간의 기본 속성이며 성화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의 숙제라 할 수 있다. 물론 명성을 얻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 의해 유명해지며, 그 열매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주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니 그의 명성이 온 지역에 두루 퍼지니라. (수  6:27)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또 이집트 땅에서 그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신하들의 눈앞과 백성의 눈앞에서 심히 위대한 자가 되게 하셨더라. (출  11:3)

이런 이유, 이런 과정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유명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지혜로 이방 국가들에까지 명성이 높았던 솔로몬처럼 마무리가 찜찜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랴

현대인들은 메신저 창에 그득한 친구들의 아이디를 세며 (생전 대화 한 번 하지  않을지라도) 뿌듯해 하는 존재이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알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며, 그들 중 유명인이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 있으면 그것을 자랑이자 재산으로 여긴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얼굴 도장을 찍고 인맥을 넓히려 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을 안다는 것에는 함정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알면 그것이 내게 영향을 미치고 법이 되듯이, 사람을 알면 그 사람의 영향력과 말과 생각이 내게 법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를 취재한 기자의 글은 천편일률적으로 인터뷰 대상에 대한 애정과 칭찬과 호의로  넘쳐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 잡지사에 근무할 때도 기자들이 취재에 나갔다가, 갑자기 떠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버릇없는  연예인들을 만난 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돌아오는 경우를 종종 보았는데, 그래도 써 놓은 기사를 보면 칭찬 일색이다. 일단  인터뷰를 해 보면, 상대방이 다소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해도 다 빼고 좋은 점만 쓰게 되며, 자꾸만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면전에서 웃고 뒤통수를 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내가 다니는 교회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스펠 매직을 하는 강사가  초빙되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교육목사가 승인한 일이었다. 나는 의분을 느끼고 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마술에 대해 글을 썼다. 전에 이곳에도 올린 적 있는 그 글을 처음 쓰게 된 동기이다.
며칠 후 행사가 시작되는 날 쯤, 전화가 걸려 왔다. 스쳐 지나간 적은 있어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바로 그 신임 교육목사였다.
"아무개  목사인데요... 한 번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안녕하세 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인터넷에 올리신 마술 관련  글 때문인데요..."
"아,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전화보다는... 뵙고 말씀을 드릴게요."




대충 눈치는 챘지만 꼭 만나야 한다고  해서 점심을 같이 하게 됐다. 나보다 서너 살 젊은 그 분은 인품도 인상도 좋아 보였다. 대화 내용은 대략 이랬다.
"매사에 오해가 생기는 이유가... 서로 만나면 해결될 일이 많은데, 안 만나서  문제가 커지더라구요."
"아, 네..."
"올리신 글에는 저도 대부분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가스펠 매직을 하는 분이  교회에 와 계신데 그 글이 떠 있으니까 혹시 볼 수도 있는데, 기껏 초청해 놓고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제가 직접  보니까 심각한 마법 같은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트릭을 쓰는 것이고요... 내용에 복음이 담겨 있더라고요. 요즘 교회 아이들은 별  짓을 안 하면 딴 짓을 합니다. 교육 현장에서 힘든 일이 참 많지요.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모든 일이 가하고...."
이런 내용에 대한 반박도 이미 글에서 다룬 것이었지만 논쟁을 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그의 목사라는 직함, 많은 아이들을 동원해야 하는 책임감, 부흥에 대한 열정 또는 새로운 포부, 이미 벌어진 일을 철회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 이해가 됐고, 직접 나서서 일도 안 하면서 괜히 방해만 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너무 교만한 처사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게 지었다.
"저의 입장은 바뀐 게 없습니다. 하지만 목사님과 교회의 입장을 존중하는 뜻으로 글은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런 일로 사람을 만나면 안 되겠다는 것뿐이다.
오래 두고 보아도 그 분이 그리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요즘에 와서는 청소년과  성도들에게 창조과학 알리기에 열심을 내고 있기도 하다.
만 나서 오해를 풀고 그리스도인들끼리 순수하게 교제하며 마음을 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교제를 가장해 인맥을 이용한 명성을  쌓으려 한다거나 그것 때문에 더 중요한 가치를 양보한다는 것은 소탐대실이며, 주객전도일 것이다. 웃는 낯에 침 뱉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물러서면 안 되는 것들까지 너무 많이 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고받는  면죄부에 싹트는 우정

얼마전 어떤 분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천국 지옥 직접 패키지투어(?) 간증  동영상을 추천했다. 그야말로 불교의 '회심곡'에 나오는 지옥보다 더욱 황당한 지옥 묘사,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에 나오는  것보다 더욱 비성경적인 천국 묘사에 아연실색했다.
그런데  내가 더욱 맥이 빠진 이유는 그분이 내가 건네는 책도 잘 읽고 공감하며, 킹제임스 성경 신자가 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 중 한  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느끼는 감정은, 어릴 때 고이 숨겨두었던 동전으로 핫도그를 사서 한 입 베어 물려다 빗길 진흙탕에  떨어뜨리는 느낌과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간증을 한  젊은 여전도사가 있는 교회의 목사는 이단 시비에 휘말린 사람이었다. 그가 쓴 책의 제목만 봐도 황당했다. 구원 받은 사람도  (구원을 잃고) 지옥 간다든지, 축사의 필요성, 귀신의 존재, 은사가 어떻고, 직통계시 등등... 그런데 이 목사가 최근 이단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그 간증이 담긴 카페는 회원수가  수만 명, 숭배 수준의 찬사 일색이다. 모두 매니아는 아닌 것 같고, 나처럼 소개를 받거나 대체 뭔가 하고 왔다가 가입을 해야만 볼  수 있대서 가입한 사람들도 많을 터였다. 아무튼 등급이 올라가야 덧글을 달 수 있으니 아무나 비판적 글을 달 수가 없게 돼  있었다.


문제는 그 교회의 변모 목사가 어떻게 이단에서 풀려났느냐는 것이다. 그의 부흥회  동영상 중 하나를 보니 바로 해답이 있었다. 이단 색출 단체 등이 자기를 정죄했지만 요즘 자기가 조용기 목사랑 만나고 집회에 함께  다닌다는 것이었다. 또 '신앙계' 등의 잡지에 글을 실었는데 아주 반응이 좋고, 아예 연재를 해 달라고 했다며, 내가 이단이면  그런 활동이 가능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아주 간단하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공격한 이들을  비방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 사람 외에도 많은 이들이  조용기 목사와의 친분을 강조하며 넘어가고 있다. 아예 예전에 개그맨 서세원이 흉내내던 조 목사의 특이한 말투까지 성대모사하며  사람들을 웃기는 부흥강사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정말 괜찮았던 교계의 지도자들도 그와 연합하고 또 서로 연합하면서 그 생명력을  잃어간다는 사실이다.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일으킨 조용기 목사와 회동을 하면 꽤 유명해진다. 주목을  받고 덩달아 세상적인 영향력도 커지는 등 얻는 것이 아주 많다. 다만 영혼을 팔아야 한다. 그와 손 잡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그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도 인정해야 하며, 그가 끌어안은 온갖 괴상한 교리들도 함께 떠안아야 한다.  그것이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큰 대가이다. 그런데도 오늘도 많은 이들이 그 명성에 줄을 대며 '키워 달라고' 아우성 친다.
참  능력의 원리를 무시함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든 유명해지면 더 큰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고, 더욱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원리를 알되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 앞에 죄스럽게 여기기도 하는데, 그  또한 '허비의 원리'를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 아니, 알지만 자신에게는 적용시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수도원에 갇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겠으나 하나님이 들어올리시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 높이려 한다면 그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호텔의 연회장과 큰 교회의 연합모임에서 만나 서로를 높여주는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비판 정신과 바른 이성을 저버리고 어제 만난 유명인사들을 칭찬하며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신을 높이게 된다.


이런 것이 사람간의 이치인데, 한 가지 예외적인 일도 있다. 정치인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웃으면서 악수하고도 박터지는 토론에서 상대를 면전 반박한다. 끝나면 다시 웃으며 악수 및 기념촬영을 할지라도 절대  굽히지 않는다. 각계의 반대 성명이나 단식투쟁이 있다 해도 여당 대표는 요지부동이며, 청와대에서 밥을 얻어먹은 야당 지도자는 입 싹  씻고 비판 성명을 낸다.
대체 그들을 이처럼 낯 두껍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것은 물론 소속 정당이 추구하는 목적이요, 투철한 정치이념일 것이다. 그러면 목사와  교계 지도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그보다 얼마나 하찮은 것이기에 그토록 무뎌지고 물러 터져서 섞이고 섞여 양날 달린 검은 고사하고  물에 젖은 솜방망이만도 못한 것으로 변해가는 것일까. 일개 정당의 당론만도 못한 진리, 일개 정치인의 이념만도 못한  신앙이라니...

여기 또 한 종류의 '명성'에 관한, 잘 알려진 말씀이 있다.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 (창 6 :4)

스스로 유명해지는 것은 덫에 걸리는 일이다. 그때부터 그들에게는 진실을 말할 능력이나  자유가 없게 된다. 진리를 양보하고 영혼을 팔면서까지 강력해지고 유명해지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능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에게 돌아올 영광이란 그 옛날 거인족들이 얻었던 죄악과 불명예의 명성뿐일 것이다.
너무 과도한 비교라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팔아먹은 참된 교리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구원의 진리 때문에 우리의 가족일 수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귀한 영혼이 도매금으로 지옥에 넘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4:11)

2010년 5월 6일 목요일

세워주는 것

글을 쓰다가 언젠가부터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나누는 것도 좋고,  권면의 글도 좋지만 언뜻 성경에서 읽은적이 있는.. "세워주라" 는 말씀이 생각나서

세워주는 글이야말로 정말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되었지요.

그래서 일단 언젠가 성경속에서 보았던, 머리속에  기억나는 단어인 "세워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성경에 나와있는 가치있는 일인지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서 세워주는 것에 대해서 성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저의 기준 성경인 흠정역 성경에서는 edify 라는 단어가 제가 찾고자 하는  세워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또한 이 단어는 오직 신약성경에서만 쓰이는 단어라는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리고 이 단어를 중심으로 찾아진 성경말씀들을 읽어나가면서 참 귀한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말씀으로  확인하기전에 내가 가졌던 대략적인 개념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칭찬 정도였습니다.

부 드럽게 말하고 웃어주고 특히 신앙적인 부분에 대해 칭찬해주는..

그런 격려와 칭찬이 곧 "세워주는" 것이  아닐까 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좀 넓게 보면 누군가를 돕는 것, 혹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를 세워주는 것에  포함되겠다는 정도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주는 것은 역시나 달랐습니다.

우 선은 무엇이 세워주는 것인지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성경구절입니다.

고린도 전서 8장 1절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고린도전서 14장 4절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

저 는 성경 말씀속에서 "사랑" 이라는 단어를 만날때마다 도무지 감당할수 없이 큰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면서 나를 구원하셨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아내를 보며  "사랑"한다고 표현할때도 자주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을 생각하며 이야기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곳에  등장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사랑" 말입니다.

그렇 습니다. "사랑"이 바로 세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새롭게 알게된 것이 바로  "대언하는 자"가 주님의 몸인 교회, 곧 지체들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는  것에 그칠 뿐이고 부패한 대화는 입 밖으로 내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은 교회를 세운다고 가르쳐 줍니다.

이 말씀은 제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 랑과 대언.

이 두가지야말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세우는" 일입니다.

사 랑하면 희생하겠지요.

돕고 격려할뿐만 아니라 나를 희생할것입니다. 이로써 그를 세워주게 될 것입니다.

그 리고 대언을 해야하겠습니다.

부패한 대화도 없애고 나만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없애며

사랑없이  지식만으로 우쭐대는 것도 없애야 겠습니다.

사랑으로 희생하고,

사랑안에서 나누는  진리가 화제가 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나누는 대화를 늘여야 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사랑과 대언. 이 두가지가  오늘 제가 배운 세워주는 방법입니다.

2010년 4월 29일 목요일

스테레오 타입

아래는  "스테레오 타입"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한 야후 사이트의 내용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한번 읽어보시면 아마 저처럼  여러가지 생각이 들것 같습니다.



고정적·선입견적인 사회적 관념. <판에 박힌 형(型)>이라고 번역된다.

W. 리프먼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 《여론(1922)》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이래, 사회심리학뿐만 아니라 널리 사회과학상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그는 이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 개의 경우,  우리는 먼저 보고 나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정의를 내리고 나서 본다. 외계(外界)의 어떤 방도도 없고 떠들썩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문화가 이미 정의를 내린 것을 선택하고 문화가 유형화한 그대로 그 선택된 것을 지각하게 된다>.

이와 같이  스테레오타입이란, 특정한 문화에  의하여 미리 유형화되고 사회적으로도 공유(共有)된 고정적인 관념 내지 이미지를 말한다.
그 특징으로는
① 너무  단순화되어 있다는 점
② 불확실한  정보나 지식에 기초해서 과장되고, 종종 왜곡되게 일반화 내지 범주화했다는 점
③  호오(好惡)·선악(善惡)·정사(正邪)·우열(優劣) 등 강력한  감정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
④ 새로운 증거나 경험과 마주쳐도 쉽게 변용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이 왜 스테레오타입을 고집하는가에  관하여 리프먼은 2가지 이유를 들었다.
하나는 인간의 환경적응에서 스테레오타입의 경제성 때문인데, 스테레오타입에 의하지  않고 일상생활의 모든  사물을 새로 상세하게 지각하려고 하면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잇따라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또  하나는 스테레오타입의  체계는 아이덴티티(동일성)의 핵심이며 자아방위(自我防衛)의 메커니즘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벽한 세계상은  아니지만, <세계에 관한  질서이든, 많든 적든 시종일관된 화상(畵像)>이며 인간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 정상적인 것, 의지할 바가 되는 것의  매력>을 가지며,  <일단 익숙해지면 늘 신던 신발처럼 마음에 쏙 드는> 것이다.

그 결과 스테레오타입을 동요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존재기반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이 되며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된다. 스테레오타입이 단순히 엉클어지고 기준치가 없는 현실을 대신하는 질서의 대용품이라  하더라도, 현실로 가는 첩경도 없고 가치규범이나 도덕이 담긴 신념체계인 한, 스테레오타입의 체계는 사회전통의 유효한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사람들이 지배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수용하지 않고 거부한다면 반도덕적·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을 그들에게 찍고 비난과  공격을 퍼부으며 제재를 가해도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런 정통성 때문에 사람들은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규범적인 순종과 동조를 보인다.

현대사회에서는 매스컴이  스테레오타입의 배양기 및 증폭기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
생각을  정리하는 것인가 봅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이후, 지금까지의 수많은 생각들을 다 정리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차 곡차곡 정리하고, 조리있게 풀어나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아마 크리스천이라면 이해하실수 있을겁니다.

질 문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여러가지 상황들에 답답한 마음들이 가득할때...
당장 해결하고픈 기분...  목소리를 내어  크게 외치고 싶은 마음들...

어렵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후에 차곡차곡 그 생각들을 정리하자면..
이미  그때에도 그러한 생각들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게 되겠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앞에 비춰볼 때의 그 초라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겠습니다.

말씀속에서 정리되어지는 생각들만 적을수 있다면,
아마 저에게도 또 누군가에게도 반드시  도움이 되겠지요.

앞으로는 그런 글들이 많이 써지면 좋겠습니다.

2010년 4월 21일 수요일

작은 돌

그 집은 건축할 때에 돌을 거기로  가져가기 전에 미리 예비하여 건축하였으므로
그것을 건축하는 동안에 집안에서는 쇠망치나 도끼나 어떤 쇠 연장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였더라.(열왕기상 6 : 7 )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베드로전서 2:5)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 미리 예비된 돌입니다.
또 한 교회의 모퉁이 돌되신 예수님위에 세워지는 영적인 집, 곧 교회를 이루는 살아 있는 돌입니다.

솔로몬이 처음 성전을  지을때 어떤 쇠 연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오직 거듭남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 우리를 그 누구도 다시 다듬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를 이루며 올바르게 자라야 할 존재일뿐입니다.

다만 주님의 도움을 받아  세상속에서 새로운 존재로서,
빛으로 소금으로,
또한 주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증인의 삶을  살기위해서
그렇게 끊임없이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는 일만 남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살아있는 돌로,
그 중에 작은 돌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곳 블로그의 이름이  작은 돌입니다.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가인의 노력과 수고

오래전  아내와 나누었던  내용과 또 김문수 형제님의 예전 글도 참고했습니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이브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이브가 또  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지키는 자였으나 가인은 땅을 가는  자였더라.
시간이 흐른  뒤에 가인은 땅의 열매 중에서 헌물을 가져와 {주}께 드렸고
아벨도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 중에서 가져왔는데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므로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빛이 변하니라. (창세기  4장 1-5절)

제 집앞에는 정말 손바닥만한 정원(?)이 하나 있습니다.
울타리가 높이  둘려있고 꽃들이 피어있는 아담한 그런 정원이 아니라,
발목 높이만한 쇠 울타리가 둘려져있고 길가에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볼수 있는 한 2평정도 되는 조그마한 풀밭입니다.

그런데 이 풀밭에서 올라오는 잡초는 정말 여름 기간 동안 저를  무척이나 힘들게 할때가 많습니다.
깍아도 깍아도 순식간에 자라버리는 잡초는 뿌리째 없애도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매 번  뿌리까지 없애는 것도 소용이 없어서 이제는 풀깍는 기계까지 동원해서 잔디와 함께 바짝 깍아버리지만
한 2주 정도만 지나면 또  수북해집니다.

처음에는 풀깍는 기계가 없어 일일이 손으로 깍고 뽑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손으로 2평도  안되는 풀밭을 깍는데 잡초를 뽑아가며 하자니 얼마나 시간이 걸리던지요..
불과 2평도 안되는 풀밭이 이러한데, 제대로 농사를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 농사를 지어본 일은 없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인은 땅을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었던 것이지요.
땅의 열매를 얻기위해 도대체 가인은 얼마나 노력을 해야만  했겠습니까?

그 당시에 기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미 아버지인 아담으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아 계속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니(창 3:18)
지금처럼 농약도 없던 시절에 얼마나 그 노동이 힘들었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열심히..
땅이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드디어 열매를 얻은 뒤의 가인의 표정은 아마 함박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이브,
그리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아마 가장 좋게 열린 탐스런 열매들을 고르고 골라서
정말  기쁘고 스스로에게도 자랑스런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지요.

그런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함박웃음과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가인의 얼굴빛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열매는  둘째치고서라도, 땅위에서 그렇게 수고했던 그 긴 시간의 노력과 수고를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또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요.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의 심정은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이겠지요.

그 서운함과 서러움, 원통함과  미움이 쌓인 가인에게 사탄이 찾아갔을 겁니다.
아니 가인이 스스로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사탄 앞에서 그동안의 모든  것을 털어 놓았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사탄은 축 처진 어깨를 토닥여 주며 거짓된 위로로 그 마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그렇게 노력한게 있는데.. 나는 공정하게 널 인정해.
나는 네가 얼마나 수고한건지 다  아니까...

그 달콤한 거짓 위로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맞다며 맞장구 쳐주는 사탄...
그렇게 가인은  사탄에게 마음을 주며 그에게 완전히 속한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인과  같이 되지 말라. 그는 저 사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형제를 죽였는데  그가 무슨 이유로 그를 죽였느냐? 자기 행위는 악하되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요일 3:12).

그리고나선 동생 아벨에게 토로했겠지요.

자신이 했던 그 수많은 노력과 땀을 보여주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불공정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수 있느냐며
나와 함께 하나님을 버리자고 이야기 했을 겁니다.
나의 노력과 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저 사탄이야말로 공의로우며 섬길만한 대상이라고 설득했겠지요.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올때 받으실만한 헌물이 무엇인지 이미 우리에게 말하시지 않았느냐고...
왜  그것을 무시했느냐고 오히려 되물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창조하신 분일진데 그 분의 말씀을 왜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말이지요.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것임을 다시 한번 알려주며 다음부터라도 그래서는  안된다는것을 알려주었을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인은 사탄에게 속해버린 뒤였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가인에게 아벨의 대언은 오히려 증오심만 끓어오르게 했겠지요.

이로써  창세로부터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눅 11:50-51).


도저히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공정하기만 한 하나님과 그런 하나님의 말을 토시하나 빼놓지 않고 자신에게 전하기만 하는 아벨. 아벨도  자신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듯 보였을겁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기왕이면 자신이 그렇게 땀흘려 노력하고 수고했던 그 땅.
바로 그 땅 들판의 한  가운데서 죽이기로 말이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의 피붙이 혈육인 동생마저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창 4:8)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르다 생각한  대로...
정말 열심히 행했고..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불공정하다며 거부한 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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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가인을 보는지 모릅니다.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받드시 인정받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하며, 그것을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복음에는 그들의 수고나 노력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때문입니다.


그 노력과 수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것입니다. 오히려 노력하고  수고하는 모습은 본받아야 할 일이지요.
다만 그 모든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변함없이 수천년을 이어온 완전한 그  말씀,
언제나 동일하신 그 하나님을 바른 말씀으로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인것입니다.

바른 성경,  바른 교회, 바른 신앙생활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저도 나중에 주님을 만날때
잘못된 노력의 열매를 가져간  가인처럼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안에 머무를 그때에, 바깥으로 쫓겨나 이를 가는 무리들을 보며
말씀 대로 행하길 정말 잘했구나하고 함박웃음을 짓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과학의 한계

아는 것이 힘이요, 모르는 것이 약이다 라는 말은 자주 듣는 말중의 하나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는  것, 즉 정보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수가 없을 정도이지요.

세상속에는 수없이 많은 거짓 정보도 함께 있기때문에 이러한  정보의 진위를 따지는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참된 정보로 대부분 받아들입니다.
과학자들이 쏟아내는 무분별한 말들조차 과학자라는 신분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습니다.

과학적 지식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며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누구나 수용할만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바로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과학" 이란 관찰 -- 가설 -- 실험 -- 법칙의  순서로,
검증되고 객관화된 지식이 쌓인 지식체계를 말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을 통해 미래의 일을  예측하려고 하는데,
과학적 지식으로 정확한 예측을 할수 있게 되면 많은 일들을 해낼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 잡한 기계를 만들때 그 기계의 부품 하나하나가 어떻게 작동할지 과학적 지식을 통해 예측할수 있기때문에
필요에 따라 설계할 수  있게 되고, 또한 그 기계를 적절히 사용할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과학적 지식들로 설계도 할수 있고, 필요에 따른  새로운 것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학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과학은 무엇이든 설명해주는 만능(?)  지식으로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운명도 과학으로 설명하려 하지요.
자신의 존재도 그저 생물학적 지식으로,  자신의 죽음도 의학적 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랜시간 발전해온 과학이 더욱 발전하면 언젠가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할수 있으리라 믿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실.  과.학.은.가.장.중.요.한.것.을.설.명.하.지.못.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과학은 "왜 그런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만드는 모든  것에는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왜 이 기계가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위해 만들어 졌는지를 모르면 그 기계를  적절히 사용할수 없게됩니다.
"왜", "무엇을 위해"는 어떤것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 질문중의 하나입니다.

그 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은 그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최종적인 법칙을 만드는 것이 전부입니다.
한마디로 과학은 처음과 끝은  모른채 중간의 현상만 잘 정리해 모으는 지식체계인 것입니다.

과학으로 제트 비행기를 만들고 우주 탐사선을 띄울수  있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물이 H2O 라는 화학식으로 되어 있다는것은 초중학교에서 이미 배우는  과학적 지식입니다만,
왜 물이 H2O로 되어야 하는것인지,
그러니까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한개가 모여서 왜  물의 성질을 나타내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가 모이면 물의 특성을 띄며 물이 되더라 라고 하는  것이 과학이 설명해 줄수 있는 전부입니다.
무엇을 위해 물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존재하니까 그 특성을  관찰해 특성마다 적절한 이름을 지어줄 뿐이지요.

양극과 음극은 서로 당기고, 같은 극끼리는 밀어낸다고 과학은  설명하지만
왜 양극과 음극이 서로 당기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왜 하필이면 1극,2극, 3극이 아니라 양극과 음극이란것이  존재하는지도 과학은 설명할수 없습니다. 관찰--가설--실험--법칙으로 어떻게 이런것을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질량을  지닌 물체간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과학은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그 현상을 표현할 뿐,
왜 서로  끌어당기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고 하나의 법칙으로 "이름"을 정했을  뿐입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 쿨롱의 법칙, 케플러의 법칙, ... 법칙, ...법칙, ...법칙, ...

수  없이 나열되는 이런 과학의 법칙들은 다만 자세히 관찰하여 반복되는 것들에 대해 "이름"을 정해둔 것일 뿐입니다.

이 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물에 대해 이름을 지어준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을 지으시고 아담이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을 부르는 바가 그대로 그것의 이름이 되었더라.(창세기 2장19절)

인류가 기나긴  역사속에서 찬란하게 발전시켰다는 과학이란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이 한 일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창조물을  보고 이름을 짓는 일일 뿐임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전도서 1장 9절)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자랑하는 과학의  실체입니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채 그저 이름짓기만 할 뿐입니다.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질문에 단 하나도 대답할수 없었던 몇천년 전의 욥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2010년 4월 8일 목요일

keepbible.com 사이트 소개

인터넷에 보면 성경을 통해 얻은 지식을 정말 잘 간추리고 알기쉽게 풀이해서 적은 좋은 글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  글들을 보면 모두 이곳 블로그에 갈무리해서 올려놓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만..

아마 그렇게 하다보면 이 블로그는 그렇게  갈무리된 글들로 가득찰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것 보다는 좋은 글들이 있는

사이트를 소개하는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블로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블로그라서.. 정말 적은 분들이  오시지만.. 그 분들께만이라도 소개를 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이 되실때 Keepbible.com 이라는  사이트에 꼭 한번 들려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곳 자유게시판에 가셔서 김문수 형제님,  김재욱 형제님의 글들을 읽어보시면 성경을 읽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곳에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은  최근에 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 바르게 읽는 성경 / 김문수 저 / 출판사 그리스도 예수안에 ")

그  외에도 수많은 주옥같은 자료들이 모여있습니다. 설교, 동영상, 기타 지도, 선도자료 등등등.

제 최근 글들도 그곳  자유게시판에 한동안 꼬박꼬박 올렸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보기에는 크리스쳔들에게 가장 좋은 사이트중  하나가 아닐까 하여 추천합니다.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복음에 관한 고민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해보았습니다.

그럴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대부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스스로 경험했던 교회에 대해서,

또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혹은 자신이 알고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선입견들이 복음을 듣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됩니다.

순수한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 이의 마음은 이럴때마다 마치 해결사가 되어야 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사람 불리려고 우리 교회 다니라는 말도 아니고, 헌금 내라고 해서 돈을 뺏자고 하는 말도 아닌...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하고자 해도, 이미 듣는이의 마음속에는 선입견들이 불쑥불쑥 솟아나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설득하려고도 했었고, 얼르고 달래가며 전하기도  했지만 듣는이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 싶어 미리 시간을 내어 열심히 기도한뒤 전해도  듣는이는 냉담할 뿐입니다.

사랑이 없었구나 싶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해보아도 여전히 듣는이는 다른곳만  쳐다봅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요령까지 생깁니다.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준비하는 철저함까지 갖추지만 그래도 듣는이의 마음은 세상의 다른 생각들로 가득차있습니다.

방해가 되는 많은 질문들에 대해 세련되게 준비된 대답으로 하나하나 넘기며 전해도 듣는이의 마음은 열릴줄 모릅니다.

다시 고민은 스스로에게 돌아와서, 내가 전하는 복음이 혹시 잘못된건 아닐까 점검을 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때 이 내용도 빠뜨린것 같고, 저것도 빠뜨린것 같아 지금까지 잘못 전한 것 같다는 생각때문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라도 잘 전해보아야지 하며 복음을 깊이 깊이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복음으로  풀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찬찬히 흟어보니 이 말씀도 복음이었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저 말씀도 복음이구나  하며 고마우신 예수님께 감사가 흘러나오고

말씀의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저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무지 헤아릴수 없는 이 커다란 주님의 은혜를 어찌 다 전할지 알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복음을 잘 전해보고자 복음에 관한 말씀만 정리해보자며  시작했었는데..

복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전해야 할 말씀이 정리되기는 커녕 모든 말씀이 복음이  되어버렸습니다.

더불어 내 삶의 모든 것이 복음으로 감싸여 있는걸 보게 됩니다.

내  못난 모습들도 주님의 피 아래에 덮여있고 내가 갈 앞으로의 인생도 오직 부활하신 주님이 중보하고 계십니다.

도무지 어떻게 이 한없는 은혜를 전해야 할까요?

그러나 이런 시간동안 어느새  하나님은 저를 조금씩 조금씩 빚어가고 계신것을 깨닫게 됩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점점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점점 더 주님안에서의 평안을 알게하십니다.

감사할줄 모르던 이기적인  마음이 길 옆의 풀만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할줄 알게 되고,

남을 깔보고 제 멋대로이던 마음도 섬기는 기쁨을  알게 하시며 그와 더불어 제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도 깊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설득하려고 애쓰던 제가,

스스로를 먼저 낮게 여기는 저를 보게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해야지 하던 제가,

이미 사랑이 넘치는 마음이 되어있는 저를 보게되었으며,

기도하고 전하려고 미리 시간을 내던 제가,

이미 기도하고 있는 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잘 전해보려고 애쓰던 저는 이제 복음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복음을 도무지 어떻게  전해야 잘 전하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나를 생각치도 못한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셨으니 앞으로 더 복음을 잘 전하는 모습으로 바꾸실 것이라 그저 굳게 믿을뿐입니다.


----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덧붙입니다.

복음의 은혜안에서 말씀을 볼때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구약의 여러 내용들도
죄에  대한 용서라던지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등등...
복음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은혜, 공의 등의 내용을 증거하는  예들로 이해 될 수 있고,
또 다양한 상황속에서 창세기부터 목격할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엿볼수 있다고 하는 관점에서 모든  말씀이 복음이 되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때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죽음과 부활까지 곁들여 설명하며 길게 설명하기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족할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예: 죄의 댓가는 죽음이다..)중 하나에 포함되어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할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부 이야기하며 그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이야기 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자면 끝이 없겠지요.
그래서 처음  복음을 간결히 전할때는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구절을 보여주는것으로 족하다 생각합니다.

복음은  나의 말솜씨와 상관없이 기회가 될때마다 선포하는 것이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내가 더 잘 전하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시는 일임을 아시고 계실것이라 생각되지만 글을 쓰고 난뒤에 다시 읽어보니 오해의 여지가 다분히  있는것 같아 이렇게 덧붙여 씁니다.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마음

교회에는 많은 다양한 분들이 옵니다.

우 선은 믿음이 없이 방문하거나,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매주 출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정상적으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분명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들었던것  같은데, 일주일간의 삶은 보지 않아도 뻔할 정도로 멋대로 살다가도 희한하게 주일날은 교회에 와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분들도 보이고,

몇 개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척 보아도 드러날 정도로 탐욕스런 눈빛을 지닌채 몇  달만에 하필이면 수련회 같은 곳에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큰 소리로 주님을 찾는 분들도 보입니다.

일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알 수도 없지만 오랜만에 한번 불쑥 찾아와서는 나름 진지하게 예배를 드리고는 교제도 없이 휙하니  집으로 되돌아 가는 분들도 계시며, 매우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교회를 다니시던 분이 역시 조용히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도  목격합니다.

게다가 어떤 분들은 서너 달에 한 번 정도씩 교회에 와서는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또 몇 달간 감감 무소식으로 교회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 분들도 계십니다.

지 난 날을 뒤돌아 보면 저 또한 이런 식(?)으로 교회를 다녔던 경험이 있습니다.

몇 달간 열심히 빠지지 않고 다니다가 또  몇 달간 나가지 않거나, 한 두 해 정도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갑자기 다른 교회에 출석해서는 또 몇 달 다니다가 다니지  않고... 갑자기 아무 교회에 불쑥 한 번 가서는 예배를 드린 다음에 사람들과 교제하기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곧바로 집에오는  등등...

그 때를 생각해보면 결국 제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 경을 통해 알수 있는 바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내 머리속 그 하나님의 모습이 전부인양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했었던 모습이었던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평소 사는 모습을 엿볼수록 역시나 내  사는 모습이 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확신했었고
그래서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더 속으로는 떳떳했던것 같습니다.

지 금 되돌아보면, 예수님 덕분에 다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다시 허락해 주신 시간들과 여러가지 여건들을
또 다시  거듭나기전의 내것처럼 허비했던 무지하고 부끄러운 시간들입니다.

어쨋거나 그렇게 간신히 돌아선 그 마음들이  가끔씩이나마 저를 교회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교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때의 참담했던 심정의 저보다 더 나을것 없는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고
뻔하고 힘없는 설교에 실망하거나, 도무지 이런식의 예배로는 허망한 마음 한구석이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되돌아  왔었던 기억도 납니다.

어떻게 보면 제 스스로가 이런 시간들을 경험했기때문에,
또 다시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날때에 더 다가가서  바르게 하나님을 알려주는것이 옳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그 때의 제 마음을 또한 기억하기때문에 아무도 한 두 마디 말로 그  단단한 마음을 깨뜨릴수는 없다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그 끝을 경험하거나 스스로 그  참람한 상황들을 좀 더 확실히 깨달을때에야 그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되돌려지는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오히려  누군가 곁에서 한마디 하는게 오히려 반발심을 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고, 결국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니 그냥 두는것이  돕는것이라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무관심이 돕는것이고 그저 잊지 않고 기도로 돕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아버지의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아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하나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 " (누가복음 15장  17절-24절)

비록 이 말씀은 문맥상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지만, 이  이야기에 나온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제 마음의 태도를 깊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난 한번이라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나온 분들에게 이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을까요?

정말 그렇게 아끼고 불쌍히 여기며, 이제 다시 돌아왔으니 너무나  반갑게 여기며 껴안고 애정을 보이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 같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왜 가지지  못했을까요?

그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저같은 놈도 구원해주셨는데...
그렇게 어렵게 다시 교회에 나온  그 분들의 마음을 이해한답시고 결국 멀찍이 떨어져서 냉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던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네 것이니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누가복음 15장 31-32절)

그 분들의 평소의  생활이 어떠한지, 교회에 잘 나오는지 아닌지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렵게 어렵게 예배에 나온 그 분들을 내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가 나와 항상 함께  계시고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 있으니 이 사랑을 표현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체하셨습니다.

우선  제가 자주 가는 어느 의사선생님의 블로그에서 잠시 인용하고픈 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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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분들을  만나다보면 항상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제 병은 체한 게 아닌가요?" 라는 질문입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환자분을 만나면 이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항상 제가 환자분께 반문을 하곤  하지요.

"환자분은...'체했다'라는 병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대개 말문이 막혀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그, 그럼...체했다는 병은 없다는 건가요?" 라는 질문을 하시지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체했다는 병명은 없답니다. 다만, 체했다는 증상이 있을 뿐이지요.
가슴이나 윗배에서  음식이 잘 안 내려간 듯 더부룩하고 미식거리고 속이 아프면 '체했다'라고 표현하시잖아요?
그러니 '체했다'라는 것은 그런  증상을 말하는 것 뿐이고 그 '체했다'라는 증상을 일으키는 병은 수없이 많지요.
위염, 역류성식도염,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급성간염, 췌장염, 담석증, 담낭염,  급성충수돌기염, 위암, 대장암도 그런 증상을 일으킬 수 있고 심지어는  급성심근경색에서도 환자는 '체했다'라는 증상을 호소하고 병원에 오는 경우도 있는 걸요?"

환자분들은 "체"라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체"를 없애기 위해 "체내림"이라는 것도 하러 다니는 것이구요. 저는  그렇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유가 참 궁금했습니다.
누가 이런 얘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걸까? 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사전도  검색을 해 봤는데 "체"라는 명사는 따로 없더군요.

그런데 어쩌면 이게 원인이 아닐까..하는 짐작되는 단어를  찾았습니다.
그렇군요. 한의학에서는 "체증"이라는 명사를 쓰는군요.
비록 병명으로는 안 나와있지만 어떤 명사로 쓰는 걸  보면 이게 실존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실제로는 한의사의 탓만은 아닌 것 같은  게...환자들에게 물어보면 일부 약사들이나 응급실이나 개인의원의 의사들도 환자들이 자신의 병명이 뭐냐고 물어보면 "체한  것이군요."라는 성의없는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참..답답한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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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증"에 대한  위의 대화들은 이렇게 알고보니 정말 황당한 대화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화입니다.

저도 살면서 제 친구나 주위의 사람들이 병원에 다녀온 다음 "이거 체한거래.." 라고  답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봤었으니까요.

잘못된 것을 알고 고치려 하는 환자들의 질문에서도,

잘못된 것을 알아내어 고치려 하는 의사들의 대답에서도,

그 원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이런식으로  ...

왜 그런지에 대한 이해와 관심 부족으로 생기는 온갖 주변의 상황들을 하나 둘씩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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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마 항상 눈에 보이는 세상 소식들만 서로 나누며 교제(?)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대화속에서...

매주 교회에서  나누는, 주님안에서의 교제라 여겨지는(!) 예배후의 대화속에서,
가끔씩이라도 우리의 모든 원인되시는 예수님이 등장하면 참  좋겠습니다.

이번 주간동안 새롭게 알게된 주님의 모습과, 나를 변화시켰던 주님의 말씀들과,
자신의 힘든  처지에서도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나누는 기회가 조금씩 조금씩 더 많아지면 참 행복할것 같습니다.

누구나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인정을 하는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에 몇가지 기준들이 있게  마련인데,

언제나 그런 것들을 통해 자신이 생각할때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더 좋은  것을 두고 오히려 다른 것을 선택할 때에도 역시 그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다른 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각자가 가진 의견이 다를때에도 이것이 존중되면 그  사람의 의견도 가치있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게된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내가 볼때 말도 안되는 의견, 주장을 내세울때에도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유에서이건

그것이 현재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그는 그런 입장인 것이지요. 내가 그렇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함께 일을 할때에는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것을 최선이라 여기게 하는지 알아내는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때문에 이것을 최선이라 여기는지 곰곰히 생각해야 합니다.

합의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서로 다를때,

그 사람도 현재 나와 같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상대주의를 옹호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상대주의에 관해서는 C.S.루이스의 "인간 폐지"를 읽어보시길...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 / 김문수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

" 성경 해석이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며, 일차적으로는 본문 내에서의 문법적 해석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살펴보며 역사적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먼저 바르게 된  다음에라야 거기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위의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에 저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분들로부터 얻어들은 내용입니다. 당시 그 분들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들(Bible believer)과는 일부 견해가 다를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문맥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데에는 입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저는 한창 Q.T.를 열심히 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주는 개인적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관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경말씀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개인적 의미(사적인 해석)"를 발견하는데에 몰두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신명기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신명기 26:12에서 아주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개 역: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신 26:12)

그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 신명기  26:12에서 말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한 끝에, "객(나그네)은 하늘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두지 못한 자요, 고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요, 과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지 못한 자다."라는 (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적용을 했습니다.

그 리고 이렇게 묵상을 통해 깨달은 바를 함께 성경공부하던 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이 이런 묵상에 대해 칭찬을 하지는  않더라도 동의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성경 말씀을 "영해"하는 것이라고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 분들의 말에  의하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읽지 않고, 자꾸 거기에 무슨 오묘한 뜻이 있지 않나 영적인 의미만을 찾다보면 결국에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지 못하고 말씀을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맨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일차적으로 본문의 문맥 가운데서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문 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법적 해석

이것은 성경 본문의 문맥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말씀하시면(창 1장, 출  20:11), 그것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6일간의 창조"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셧다고 읽고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6일만에  어떻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느냐? 60만년이나, 6억년이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분명히 "six days"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6일"이라고  이해합니다. 만약 그 기간이 60만년이었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데 60만년이  걸렸다"라고 기록하셨을 겁니다.

요한계시록 20:2~7 말씀에는 한 절마다 한 번씩 "천 년"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히 천년왕국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 역시 문자적으로 천 년이지, 막연히 추상적으로 "오랜 기간"이나  "영원토록"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절에서 "천 년 동안", "천 년이 끝날 때", "천 년이 다  차매"라고 기록하여 그 기간이 유한한 기간으로서의 천 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단어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적 해석은 물론, 시제, 태, 단수/복수 등에 대한 문법적인 검토,  수사법(직유/은유/시적표현), 비유 등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문법적 해석이 반드시 글자 그대로의  경직된 문자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신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은 "성경이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위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며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법적 해석에는 이런 수사적 표현에 대한 고려도  포함됩니다. 즉 성경에 나타난 명백한 비유나 수사적인 표현까지 억지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기대면서 "당신의 가슴은 푸른 풀밭이오"라고 말하면, 이것은 그의 품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지  그 사람의 가슴 피부에 진짜로 풀이 자라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어린 양"(요 1:36)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진짜 짐승입니까? 시편 기자가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시 18:2)라고 했는데, 정말로 하나님이 돌덩어리입니까? 이렇게  문장의 수사법을 고려하지 않는 경직된 문자적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문법적 해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문 법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에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시제나 능동태/수동태, 명령문/수사의문문/평서문,  전체 문맥 속에서 문장들간의 관계 등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단수와  복수 문제

성경 말씀은 단수와 복수를 잘 구별해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3:16 말씀을 통해 직접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씨들(seeds)이라고 하지 않고, 씨(see)라고 단수로 표현하셨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us, our)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셨는지,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는 아홉 가지인데 왜 단수로 사용되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죄(sin)/죄들(sins), 하나님(God)/신들(gods), 주(LORD, Lord, lord) 등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 시제의 문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 많이 내고, 종교의식에 잘  참석하면 나중에 구원을 준다는 이야기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혹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끝난 후에야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 5:24).

요 한복음 5:24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현재 영존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죄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미래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되어도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수동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그것이 이미 완료되어 계속적으로 효력을 미침)고 합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교인들을 일평생 카톨릭 교회에 묶어두기 위하여 구원이란 계속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믿는 자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제에 유의하여 성경을 읽으면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의  구원은 확정적이며,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읽다보면  동사의 어미에 -th, -eth가 붙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고어체 스타일의  표현이라고 싫어하는데, 이것은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에  주의하지 않고 대충 읽고 번역하면 개역이나 한글킹제임스성경처럼 스가랴 3:2을 엉터리로 번역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3) 명령문/평서문/의문문

성경을 읽을 때, 그 문장이  명령문인지,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수사의문문인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종종 설교 시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취지는 저도 이해를 하지만, 문제는 성경 말씀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사도행전 1:8은 "너희는 증인이 되어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한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시고, 우리를 그 분의 증인으로 사용하신다는 뜻이지, 우리가 전도 훈련을  받아서 증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3]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 그 뒤에는 그것이 아무 쓸모없으므로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밑에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세운 도시가 숨겨지지 못하리라(마 5:13-14).

마태복음  5:13-14 역시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라!"라는 명령문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소금이라면 자연히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려고 어떤 노력을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면 저절로 그 환한 광채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어둠을 물리치게 됩니다. 빛은 원래 밝고 퍼져나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들로서 빛날 뿐(ye shine as  lights, 빌 2:15), "빛이 되어라!"는 도덕적 훈화 말씀처럼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반 면 고린도전서 16:13이나 에베소서 5:18은 명령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역시 이를 주께서 주신 명령으로 읽고 이해해야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4) 문맥의 중요성

제가 선교단체에서 활동할  때, 매일 아침 선교회 회원들이 모여서 그 날 묵상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시편 5:6을 읽었는데 하나님은 피흘리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어린양의 피를 즐기셨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가나안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는 것도 즐기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형제들은 부분적으로 뭔가 공감하는 듯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개역과 흠정역으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  ...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5:6)

흠정역: ... 주께서는 피 흘리는  자와 속이는 자를 몹시 싫어하시리이다.

그 당시에는 다들 개역을 사용하던 터라 끊어 읽기를 잘못하면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와 같이 읽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그 앞에 나오는 "주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시 5:5)라는 말씀을 함께 읽었더라면 이런 오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 본문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내용만을  추출하여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There is no God."(시 14:1)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성경에서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된다"(마 13:12)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자기 입맛에 맞게  끼워맞추기 식의 해석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 14:1).

있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서 더욱 풍성하게 될 터이나 없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제가 글을 쓰면서 여러 참고 구절을 인용하거나 종종  전후 문장의 흐름과 맥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문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나 마태복음 16:28에 나오는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   역사적 해석

역사적 해석이란 역사적인 시대나 그것이 기록된 배경과 목적, 수신자, 당시의 생활풍습  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문맥에 맞게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취할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는 다 네 사방의 이교도들 중에서 취할지니 너희는 그들에게서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를 살지니라(레 25:44).

레 위기 25:44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는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왕,  귀족, 평민, 제사장, 노예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제도 속에서 살 때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글자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노예로 사고 팔고 하면 안 됩니다.

레 위기 11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말 것에 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레위기 11:7 말씀에 의해 돼지갈비나 삼겹살은 먹으면 안 되고, 레위기 11:12 말씀에 따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 속 생물들(오징어, 굴, 해삼, 전복...)은 가증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어떤 짐승들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들 짐승들이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연관된 것이거나,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거나, 이스라엘의 더운 날씨에서는 쉽게 부패하고 변질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의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저런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적용되지 않으며, 우리는 디모데전서 4:3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음식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딤전 4:3).

성 경에 나오는 할례나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이지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구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 이것은 나와 너희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의 언약 곧 너희가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킹흠정)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출 31:13, 킹흠정)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각 세대별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고 경영하시는  경륜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어느 세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바르게 나누어서 이해해야 합니다(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역 사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은 누구를 위하여, 어느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어떤 목적으로 기록하셨는지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의 왕국과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다른지, 4 복음서는 수신자와 기록 목적, 배경 등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믿음과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지 등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적 해석 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석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 문화, 기후, 풍습, 제도 등에 대해 공부를 해  두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맛잃은 소금(마 5:13),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요 10장), 친족의  상속재산을 대신 물러주는 제도(룻기 4장), 형사취수 제도(창 38장), 이스라엘의 달력과 주요 명절, 지역별 기후와 특산품,  유대인들의 식사예절 등도 알아두시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동물, 식물 등에 대해서  공부해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래에 나오는 신학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찾는 해석이라기보다는, 그 말씀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3. 신학적 해석

신학적 해석이란,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해석은 다소 복잡하고 사람들마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 기록자가 최초로 성경을 기록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차적인 성경의 독자들(수신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생각해보고, 이에 근거하여 그 말씀이 오늘날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묵상하여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명기 17:18-20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주의 말씀을 필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며 그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내용을 발견하고 마음  속에 성경 말씀을 읽어야겠다는 동기력이 솟아나서 성경을 읽기로 결심했다고 합시다.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성경을 다시 필사해야 할까요? 혹은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해당되는 규례이지 나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왕도  아니므로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하시겠습니까?

문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왕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들이 주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라는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토대 위에서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말씀이 직접 우리를 대상으로 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에게 여러가지 본보기와 훈계를 주기 위해 그 말씀들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0:11).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사도 바울 역시 신명기 25:4에  나오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으로부터 영적인 의미를 찾아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적용하여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딤전 5:18).

너는  소가 곡식을 밟을 때에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신 25:4).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또,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느니라(딤전 5:18).

[9]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  [10]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말씀하시느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고전 9:9-10).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문법적 해석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그 말씀이 기록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나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검토하여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신학적 해석은 그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각자가 개인의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서 여러가지 다양한 묵상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주시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저는 이것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잘못된 해석들

몇 가지 잘못된 성경 해석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문맥을 무시한 해석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가라앉기 시작하며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마태복음 14:30에는 바다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후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죄가 아니라 물에 빠진 베드로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문맥 내에서 특정 부분만 도려내어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비유적 해석

성경 100독 세미나로 유명한 조현주 장로나 이만희가 교주로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비유로 풀이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표적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6:35-44에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명석을 교주로 하는 이단 JMS에서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면 크기가 작아지고 가루가 나기 때문에 절대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비유로  해석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불리 먹었다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고 함부로 비유적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절대 변명할 수 없도록 마가복음 6:43에 "남은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었다"고 기록하셨습니다. 이게 말씀 잔치였다면 "남은 빵 조각"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우리는 남은 빵 조각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생각할 때, 정말 그들이 실제로 문자 그대로의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비유적  해석을 할 때에는 주의를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유적 해석이 다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6]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마 10:5-6).

마태복음 10:5-6에  나오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양들(sheep)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53:6 말씀을 읽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은 당연히 비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3)  문법적, 역사적 해석 vs 상징적 해석, 영적 해석

저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언약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과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계 7:4).

그 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더라.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아무도 능히 그 노래를  배우지 못하더라(계 14:3).

요한계시록 7:4에는 이스라엘 자손 중 봉인된 자가 14만  4천명이며, 14:3에는 구속받은 자가 14만 4천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을 들고 와서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14만 4천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네들만 구속받은 무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도 수는 이  숫자를 넘으면 안 되나 봅니다. 이런 이단의 주장에 대해 조언을 구하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  구원받는 사람이 14만 4천이면 그 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00명이라도 그 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명이라고 해도 그 중에 네가 들어가 있다고 믿어라. (성경 말씀에 근거한 답은 안 해주고 구원의 확신으로 밀어부치라는  이야기입니다.)

- 14만 4천은 상징적인 숫자다. 3은 하나님의 수, 4는 세상의 수, 두 수의  곱은 12로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지파, 열두 제자를 나타낸다. 12의 제곱은 144이며 여기에 1,000을 곱한 것이 14만  4천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상징적 해석입니다.)

"그런 데 분명히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14만 4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이는 어거스틴이나 칼빈에게서 나온 언약신학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르우벤, 영적인 유다, 영적인  시므온, 영적인 갓, 영적인 아셀은 누구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구속받은 자를 말한다. (다행히  문자적 해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 말고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 계 7:9에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바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통과하고 나옵니까?(계 7:14) 살전 4:16-17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이미 다 휴거되어서 큰 환난을  겪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요."

(대부분 여기에서 말문이 막힙니다만, 간혹 다음과 같은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며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믿지 말고 열심히 잘 믿어야 하고, 등잔과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하고, 끝까지 견뎌야 하고..."(이하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요 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속받은 이스라엘 자손 144,000명"에 대해서 상징적 해석을 하여, 예수님을 믿는 신약교회 성도들이 곧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라고 주장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기에 거론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들은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믿고, 그 숫자도 실제 숫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방식을 나누지 않고, 믿는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라고 영적 해석을 해 버리면, 우리 성도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 의해 휴거도 되어야 하고, 또한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므로 대환난도 통과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중으로 들림받아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과 휴거된 성도들 머리 위로  대환난이 쏟아진다"라는 새로운 엉터리 주장을 늘어놓거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적용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4)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한 상징적 해석의 실례

아래 인용문은  이전에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이진락 형제님께서 쓰신 내용입니다. 지금은 아마 목사님이 되어서 교회 성도들을 섬기고  있을 겁니다.

"이제 잘못된 성경 해석의 실례를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 번 봅시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고, 여리고는  세상입니다. 교회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강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여리고로 내려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 만약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었다면-죄악에 물들었다면, 포도즙과 기름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피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예수의 피와 성령으로 치료를 받아서 우리 영혼의 상처를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잘 치료 받으려면 데나리온  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입니다. 또 더욱 더 심하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강도 만난 자를 태우고 가는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복음서라는 짐승을 타고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부  단어는 흠정역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알려주시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맥과는 전혀 무관하게 해석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나 그 말씀을 들은 율법사의 반응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비유나 상징으로만 해석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 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우리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기록하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 말씀 속에 무슨 다른 뜻이 있거나, 감추어진 신기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를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다 보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각 시대별로, 각 수신자 집단별로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말씀들에 대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연구해야 하며,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출 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amp;write_id=2252&amp;pag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