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옛 사람의 판단.

성경이 가르치는 어떤 교리에 대해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양쪽에서 좋은것을 취하고, 또 둘 모두의 진심을 알아주고, 좋게 알아서 적당히 받아들이면 될 것을
왜이리 논쟁하고, 헐뜯고, 각을 세우고, 내가 맞다 라고만 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을때가 저도 있었습니다.

모두 사랑이 부족한 것 같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둘 다 지켜보며 양쪽에서 좋은 것만 취하고 내가 해온대로,
그저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되겠지... 하며 교리논쟁으로부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위와 같은 판단을 내릴때 이제 성경을 다시 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성경을 확인하는 경우를 제 주변에서는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야말로 양측의 입장 뿐만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입장을 우선 내려놓고, 오로지 그 주제에 대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살피는, 그런 확인 말입니다.


과거에 잠시 짬을내어 양쪽의 입장을 듣고 정말 그런가 해서 성경을 확인해 보았었던 적이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이 역시 어느 한쪽이 근거로 주장하는 성경 구절을 그들이 가르쳐주는 해석법(?)대로 확인해 보고 그럴듯 하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때로 이런 확인조차 할 시간이 없을때는, 그저 양쪽의 주장에 대해

내 자신이 가진 성정과 경험과 인격으로 판단을 내렸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된지 한참 지났을때까지도 이런 식의 판단으로 넘어간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식의 판단이 바로 옛 사람의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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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려면 성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꾸준히 읽는 말씀으로 성장하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로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반복되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3:12-14)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니라.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에게 속하나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히브리서 5:13-14)


사실 옛 사람이 가진 인격도 세상이 말하는 의를 따라 좀 다듬어지면 웬만한 상황에서도 좋은 면을 볼 줄 알게됩니다.

경험도 좀 쌓이면 원래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고 좋게 봐 줄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분들의 여유있고 인품있는 모습은 자연스레 밖으로 드러나와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치 장성한 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옛 사람의 경험과 인격과 성정은 모두 옛 사람의 의에 속할뿐입니다.

옛 사람의 인격, 즉 공자와 맹자와 석가모니와 여러 성현들이 가르치는 세상의 의를 따라 키우고 다듬은
이 옛 사람의 인격은 하나님에겐 누더기 걸레와 같은 사람의 의일 뿐이며 성령의 열매또한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경험을 거쳐 부드러워진 인격으로 부터 나오는 그야말로 진국처럼 보이는 것들조차 성령의 열매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성장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따라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이

말씀을 먹고 성장하며, 성령님의 충만을 통해 나의 몸으로 반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위력은 단 한 구절만 제대로 소화해도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정도입니다.
이런 말씀의 권능아래서 성령님을 통해 몸으로 행해지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 내 장막은 깊은 흔적들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흔적들로 인해 비로소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장막을 통해서도 비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를 통해 옛 사람의 인격이 새 사람과 같이 바뀌거나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새 사람만이 자라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함에 따른

행함을 통해 새 사람이 자리를 잡고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것일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내 옛 사람의 갈고 닦인 의도 이제는 누더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새 사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죄를 지을수도 없고 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된 이 새 사람이 드러나는 것은, 여전히 썩어 없어질 몸의 장막을 지닌채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혼이 결단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과거에는 노예의 신분으로 자각하지 못한채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여 내 안에 창조된 새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도록 할 수 도 있고,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아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끔 하는 삶을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선택하여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새 사람의 모습이 나의 몸에 습관으로,

또 깊은 흔적을 남길 정도로 반복되면 나의 선택은 점점 더 쉬워집니다.

그러나 그 연습이 되지 않았을때 나의 선택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길거리의 창녀가 나를 향해 외치며 유혹의 손짓을 할때,
또한 동시에 주님께서 주신 양심이 나를 흔들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길을 걷고있는 나를 향해 외칩니다.

그 가운데에서 여전히 육신을 쫒으려 하는 나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내 안의 새 사람이 성령충만함을 통한 행위를 거쳐 이 세상에 자주 드러날수록 새 사람의 인격은 확고히 자리잡게 됩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이러는 와중에도 옛 사람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옛 사람은 절대 개선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조차 옛 사람을 개선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든 옛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속입니다.

훌륭하다고 칭송받던 크리스천이 부지불식간에 극도로 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앞선 주제로 돌아와 보면, 이제 문제는 옛 사람의 인격이 세상의 가르침과 인생의 경험을 통해 어느정도 성숙했던 사람일수록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며,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아기가 젓을 먹듯 열심히 먹어가며, 새롭게 배워나가고 연구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을 도울때, 자기도 모르게 예전의 착한 성격으로 돕습니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채,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돕는것이 아니라 여전히 예전의 인격으로 돕게 될때가 많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실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는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낼 힘을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해 주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많은 시간이 흘러 자신의 의가 인정받게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 마치 모래집처럼 순식간에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짧은 기간동안에는 제 삼자에게 전혀 그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쉽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그것이 마치 새 사람을 통해 나온 행위인것 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또한 그래서 스스로 조차도 어느 정도 내 믿음이 장성했구나 라고 속게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행위뿐만 아니라 말 한마디에도,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써 내려야할 판단에서조차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채 여전히 옛 사람의 인격을 따라 반복되어 일어나기 쉽습니다. 
 
예전부터 쉽게 어딘가에 깊이 빠지는 것 없이, 
 
또 스스로 잘 알아보면서 따져보고 하는 것들 없이도 비교적 중도?의 길을 본능적으로 잘 택했던 경험.
 
큰 잘못없이 남들이 다 옳다고 하는 길로 나가는데 익숙했던 옛 사람의 판단. 
 
이렇게 옛 사람으로 살아온 긴 세월이 주는 경험은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에 대한 간절함을 귀찮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때, 더욱 쉽게 옛 사람의 경험과 판단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 선택이 비록 평화적이며 온유하게 보여서 주위 사람들에게 여전히 좋은 평판을 들을때도 많지만

정작 그 속의 새 사람은 그런 판단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 사람은 여전히 말씀에 굶주려 있으며 성령님은 억눌린채 옛 사람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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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도(?)처럼 보이는 길을 옛 사람의 인격과 지식으로 선택하며,

성경은 외면한 채 옛 사람의 모습대로 세상속에서 잘 융화되어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나는 성숙한 인격으로 양쪽에서 좋은 것을 취하며 잘 살아가는데,

왜 그리 목소리를 높이며 꼭 그렇게 걸고 넘어가서 분란만 만드냐고 점잖게 한마디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럴때가 옛 사람의 모든것을 내려놓을 때인것 같습니다.
또한 바로 이럴때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뭐라고 하시는지 찾아보고 연구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