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6일 수요일

빗나간 "예수님 따라잡기" / 김재욱

1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당연히 예수님의 삶의 태도를 본받는 것이 성도의 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본받으면 곤란하다. 그러나 개념 없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예수님을 따라한다. 오죽하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겠는가.

성경을 바르게 나누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대략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크고 작은 오해가 많이 생긴다. 이런 이들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좋은 말은 다 끌어다 삶에 대입시키고 마구잡이로 해석하며 적용하는 일에도 익숙하다.

성경을 안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겠으나 이런 태도로는 평생 발전이 없다. 그들은 자기 방식의 큐티와 묵상에서 얻는 깨달음에 스스로 감탄하여 그 생각, 자기 아이디어를 평생 신봉하며 끌어안고 살기도 한다. 또한 그런 어설픈 깨달음을 남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강단에 서는 이들도 저지르기 쉬운 실수이다.

조금 열심 있는 사람이 더 큰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다른 역본들을 통해 성경이 이상한 것을 발견한 어떤 사람이, 천국이 침노하는 자의 것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천국'을 여전히 '왕국'이 아닌 죽어서 가는 곳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그곳을 '폭력으로 빼앗으려는 자'가 마귀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열심은 있고 남도 가르쳐주고 싶은데 모르니 이렇게 엇나가는 것이다.

누구라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고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있는 부분도 간과한다면 성경을 배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2

이런 CCM이 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생명을 건지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표현한 노래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흘려야 할 피가 필요하다면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 희생의 제물 필요하시다면

내 생명 제단 위에 드리니 주영광 위해 사용하소서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죽어야 다시 사는 주의 말씀 믿으며

한 알의 밀알되어 썩어지리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의 마음은 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사람은 죄인을 위해 희생하고 싶어도 부패한 피를 지닌 자기 생명으로는 죄인을 위한 제물이 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복음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알면서도 방치한다면 더욱 심각한 일이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이런 노랫말을 만든 모양이다. 죄인을 위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마쳐 놓으셨다. 더 할 일이 없고 다른 제물이 필요가 없으며, 주님이 죄를 제거하신 사실을 믿고 인정하면 된다. 장엄하고 숙연하며 희생과 아픔을 말한다고 해서 다 좋은 노래는 아니다.

3

사람들이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 하는 큰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능력이다. 그분의 능력을 열렬히 사모하는 이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 같은 것은 생각 못해도 마귀를 쫓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앉은뱅이는 못 일으키면서 위장병과 갖가지 속병을 고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보여 줄 수 없는 것들', 서로 확인할 수 없는 일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고, 직분이나 체험 경력에 따라 받거나 타인에게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성도 개인의 자격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마치 장풍을 쏘듯이 자기에게 언제든 그런 능력이 있기를 늘 바라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크리스천 엑스맨(?)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면 곤란한 말씀도 많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 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로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5~18)

이런 말씀을 그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믿는 자들이 다 이런 능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닌가. 이것에 대해 무어라 말하겠는가? 이 말씀을 보고 뱀을 집어들거나 치명적인 독이라도 마신다면 그것은 마치 <슈퍼맨>을 시청한 뒤 빨간 보자기를 두르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어린아이와 비슷한 결과를 맞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런 무모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럼 성경이 틀렸는가? 그렇게 말할 순 없고... 이럴 때 사람들이 피해가는 방법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만큼 능력이 생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한다.

이럴 때 그들은 극보수주의와 문자주의의 극단적 신앙이 문제라며 말씀을 유연하게 해석하고 거기 담긴 뜻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영해하고 어느 부분을 문자 그대로 믿을 건가.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표현이지만) 극보수주의나 문자주의적 신앙이 아니면 존립할 수도 없는 것이 기독교이며 그것이 아니면 믿을 필요도 없는 것이 또한 기독교이다. 결국 그들은 창세기 1장 1절도 믿지 않는 것이며, 천지창조가 사실이 아닌 사람에게는 궁극적으로 아무 교리나 신앙적 논리도 전혀 쓸데없는 것이다.

위의 말씀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 확증해 주시니라. 아멘. (막 16:20)

그런데 왜 지금 시대에는 그런 일을 볼 수 없을까. 심지어 능력의 사도 바울조차도 없어왜 그런 신기한 능력들을 잃고 아픈 제자 디모데에게 민간요법 수준의 처방만을 내리거나 자신의 질병도 해결하지 못했을까.

우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병이 낫는 것, 방언하는 것,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각자의 희망사항인 것도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사람이 더 많이 원하거나 오히려 그릇된 것을 구하면 이루어질 리가 없고 잘못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약의 성도에게 적용할 수 없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가지고 자꾸만 우리에게 맞추려다 보면 말씀이 틀려 보이고 궤변이 도입된다. 예수님께서 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구속이 완성되고 엄밀한 의미에서 신약이 시작됐지만 아직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거의 전부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되어야 할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행전의 시작 부분을 보면 땅에서 주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인 위의 상황에 이어지는 내용이 나온다.

또 그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느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내게서 들었나니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그런 구역을 지정하시지 않는다 해도 제자들에게는 이방인이나 교회, 신약 성도 등은 개념조차 없었다. 또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마가복음 마지막 부분의 말씀처럼 표적이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 (고전 1:22)

이런 혼란을 분별하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사도행전은, 그래서 시간에 따라 차례대로 기록돼 있다. 기록자인 누가는 첫머리에서 그분이 승천하신 후 그곳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또 그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느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내게서 들었나니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 (행 1:4~5)

기다리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이 유명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예루살렘(유대인) - 사마리아(반쪽 유대인) - 땅의 맨 끝 지역(이방인)의 순서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 된다는 것이다. "임하시면"의 조건부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들은 눈 감고도 이 구절을 외우면서, 거의 모든 목회자들이 이 의미를 알고자 하지도 않은 채 "성령이 임해야" 증인이 된다며 "성령을 받으라"고, 그것도 못 받느냐고 성도들을 쥐어짜고 있다.

4

예수님의 행동이 성도의 표준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성전 상인들에게 분노하신 예수님처럼 한바탕 둘러엎으려 하면서 이것은 거룩한 분노라고 합리화한다. 이를 막으려는 목사는 부흥사를 데려다, 목사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날벼락 맞은, 혈기 부리는 집사 이야기로 입을 막는다. 참 성도라면 하나님을 팔아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일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메시아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자 천지창조의 주로서 능력을 보여 주셨으며, 많은 가르침과 본을 보여 주셨다. 이 중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르게 성경을 분별할 줄 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해 주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마 11:29)

우리는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도 엄청난 능력이나 신기한 은사만을 쫓기 때문에 혼의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성품을 닮아야 한다. 바로 성령의 진짜 열매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섬기고, 감사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전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성경을 보고 행하려는 자세는 좋다고 할 수 있지만 바른 지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작정 예수님을 따르려 하다 보니 제자를 삼는 제자훈련과 신사도 운동 등 열매가 부실한 각종 시스템이 유행하는 것이다. 신약성도라면 각 교회들에 주는 서신서가 지침에 돼야 하며 성령님을 따라 그분의 열매들을 맺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야 한다.

더이상 변천기를 다룬 책들에서 아무 구절이나 뽑아 행하지 말고 시대를 잘 구분해야 한다. 또한 문자 그대로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되돌려놓아야만 바른 분별을 할 수 있는 진리가 맑게 떠오를 것이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7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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