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3일 수요일

믿음 vs. 신념 / 김재욱

요즘 인터넷 한 구석에서 논쟁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종교에 대해 넓은 길을 제시하는 신학자가 쏟아내는 망언에 갑론을박하기 위해서다. 그 신학자는 대략 이런 주장을 한다.

"특정한 종교로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편협한 것."

"하나님은 기독교인도 불자도 아니다."

이런 식의, 이젠 새롭지도 않은 역겨운 말들로 줄줄이 달라붙는 댓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신학자를 자처하는 그들의 믿음이란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될 때가 있다. 바로 요즘 같은 때다.

오래전부터 교인들이 잘 하는 얘기 중에 "믿음이 좋다", "예수 잘 믿는다" 등의 말들이 있다. 일단 그들의 속은 몰라도 흔들림 없이 종교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크리스천들 중에 열심을 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 좋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 글은 순전히 내 생각임을 밝혀 둔다.


1

'믿음'으로 걷는 사람이 있고 '신념'으로 걷는 사람이 있다. 두 단어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그 말맛은 좀 다르다. 사전에서는 어떻게 정의하든 나는, 최소한 이 글에서는 두 단어의 뜻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고자 한다.
' 믿음'은 믿음이다. 믿는 것이다. 그것은 확인과 다르고 검증과도 다르며 이해와도 다른 것이다. '신념'은 한자의 단어 그대로 '믿는 생각'이다. 이것도 믿는 것이지만 믿고 있는 생각, 그것이 자기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확고히 어떤 것에 뿌리를 두고 신봉하는 것이다.


글로는 표현이 참 어렵다. 아무튼 모두가 믿음이라는 재료로 자기 세계를 만들고 그것으로 생각을 지탱해나가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믿음을, 어떤 경우에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어떤 일을 두고 흔들림 없다는 것은 참 좋아 보이고, 생각이 유연하다는 것은 좀 안 좋게 보인다. 특히 어리석은 신학자가 존경받는 이 시대에는 참으로 흔들림 없는 것이 좋은 덕목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많은 정보와 생각 가운데서 늘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것을 부정하고, 어떻게 일말의 의심이나 나약함을 가질 수 있느냐는 식으로 몰아붙이면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는 척하고 아무런 검증 없이 그냥 무작정 믿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단과 괴상한 집단일수록 그처럼 미동도 않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복음이나 믿음의 교리 이외의 것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충돌이나 이견은 오히려 건강한 것이다.


2

오래전 20대 초반에, 한 친구가 자기 여고 동창들의 속임수로 다단계 강연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강연을 들어 보니 옥장판을 팔면서 밑에 판매원을 거느리면 금세 부자가 될 수 있고,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 파는 것까지 자기 수익이 돼서 금방 떼부자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고.
그런데 처음엔 누구나 거부하지만 몇 시간만 들으면 정말 그럴 것 같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질긴 사람도 이틀만 들으면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하루 종일 듣게 하는 것도 모자라 한 친구 집에 데리고 가서 합숙을 하며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 출근도 못하게 하고 전화도 못 걸게 했다고 한다.


당시는 삐삐도 없던 시기였는데, 동화되고 설득되는 척하며 다음날 겨우 거짓말로 잠시 시간을 내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그녀는 몇몇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잡지사에 다니던 나는 강남의 모처에 있는 그곳에 혼자 찾아갔다. 사전에 그 친구에게는 일행에게 말을 전하라고 했다. 계열사인 OO신문사의 기자와 함께 내가 간다고 말이다. 무모한 시도였지만, 그토록 질기게 놓아주지 않던 친구들이 기자라는 말에 인근 다방으로 나왔다.
그녀들을 만나 보니 좀 억세긴 했지만 보통 사람들이었다. 주변을 살피며 기자를 경계했는데, 거기엔 그 조직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도 혼자였기 때문에 두려웠지만 철판을 깔고 강력하게 말했다. 이 친구를 지금 놓아주면 문제 삼지 않겠지만 계속 귀찮게 하면 인근에 대기 중인 기자에게 취재를 의뢰해서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처음엔 '당신이 보호자도 아닌데 왜 나서느냐'며 따졌지만, 결국 신문사라는 말에 사람을 놔줬는데, 신기한 것은 그들이 친구를 자기 밑 판매원으로 넣기 위한 것도 있었겠지만 정말로 팔자를 고쳐주려는 진심이 엿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래, 미련한 것아, 이렇게 좋은 기회를 네 발로 차냐... 너네집 어려운 거 알고 우리가 알아서 도와주려는 건데... 평생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라... 이런 악담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는 물론 그들에게 세뇌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들의 머리에는 옥장판과 백만장자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둘째 믿음, 즉 신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 '나'는 없다. 오직 팔자를 고친 옥장판 갑부만이 그들의 신념이다.

이런 것은 말 그대로 무아지경, 무념무상과 비슷하다. 요 즘 '생각 버리기'를 주제로 책을 내는 일본 중이 있는데, 그는 너무 많은 생각이 사람을 그르친다고 생각한다. 극도로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니(렘 17:9)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이 때문에 그는 생각을 아예 안 하는 연습을 하며 산다고 한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데, 걸을 때도 생각을 없애기 위해 무작정 달리기도 한다. 뛰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

이것이야말로 마귀가 가장 원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나한테 오라는 것 아닌가. 마귀 입장에서는 손도 안 대고 코푸는 가장 효율적인(?) 아이디어 중 하나다.


3

이단의 형태가 사이비 다단계와 비슷하다. 자기를 찾지 못하게 하고, 다른 책이나 다른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늘 무아지경 속에서 산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신념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 같은 우리 목사님 말씀, 칼빈주의, 십일조와 록펠러, 은사와 간증, 성 어거스틴과 모니카 모자,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힌 베드로 등은 부동의 지식이다. 성경 이상의 신념을 갖게 하는 이런 지식들을 평생 반복학습하면서 신념으로 삼는다.

목사들은 그들에게 늘 성령의 새 술에 취하라고 하면서 무작정 따라오게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기뻐해야 하니 늘 이를 드러내고 웃으라고 한다. 안 그러면 믿음이 약한 거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 겉으로 희희낙락하라는 것인가? 성도의 삶에 감당할 만한 시험과 고난이 와서 그것을 넘으며 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며 오히려 영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믿는 사람의 삶에도 예외 없이 져야 할 십자가와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면 자기를 잊고 성령의 새술에 취했다는 최면을 거는 수밖에 없다.

믿음이란 각자 정의하기에 따라 다른 것이겠지만, 나는 믿음이 일말의 궁금증이나 석연치 않는 구석도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르는 것도 많고 때로는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고, 이해도 안 가고, 좀 안 그러면 안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의미가 명백하면 확인할 수 없고 내 바람과 달라도 믿는 것이다. 어떤 계산이나 생각도 없이 믿고 끝내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오류가 없는 성경을 믿는 것도 배우고 읽고 연구하여 믿음의 증거와 개수를 늘려가는 것이지, 당연히 오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상상'을 악하다고 하시지만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라는 말씀은 참 많다.

그런즉 이 날 너는 위로 하늘에서와 밑으로 땅에서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그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신 4:39)

옛날을 기억하라. 많은 세대의 햇수를 깊이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보여 줄 것이요, 네 장로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해 주리라. (신 32:7)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 3:1)

분별이 너를 보존하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잠 2:11)

물론 믿음은 바른 성경을 통한 것만이 온전하다. 자기 생각을 믿으면 아무리 생각하고 분별해도 종교다원주의자가 되거나 옥장판 전도사가 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바른 성경을 믿을 때도 깊은 생각과 분별이 필요하다. 진리가 부족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믿을 의지가 없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베레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행 17:11)


4

내 경우에 킹제임스 성경이나 바른 믿음의 이야기들도, 이게 진리니 입 닫고 무조건 믿으라거나 딴 얘기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방식이었다면 아마 크게 관심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바른 성경과 진리를 알게 된 사람들은, 강요를 통해 이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을 보고 스스로 판단하고 깊이 생각한 뒤에 믿어져서 자기 발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오만한 사람들은 심지어 진리를 가졌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의 외면을 당한다. 그들은 진리를 잘못 간수하고 잘못 표현하기 때문에 부실한 진리를 가진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아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들의 믿음이 신념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한 믿음은 아무리 귀하고 확고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타인에 대한 정죄와 심판의 도구로 삼을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할지 결정하는 것이고, 남의 믿음까지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로 악한 것을 분별하고 멀리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의 길이 험하고 자기와 동일하지 않아도 화평을 유지하며 설득하고 권면하고, 안 되면 각자의 길을 가든지 하는 것이다.

구원은 단번에 받는 것이지만 믿음의 경험은 축적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서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라(딤후 3:14)'고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
믿 음은 귀를 막고 무작정 신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를 가지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나를 바꿔가는 것이며 덮어놓고 믿는 게 아니다. 눈 딱 감고 무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과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에 비추어 성경 기록을 비교 연구하면서 믿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과 내 신념을 내려놓고 마음을 늘 겸허하고 부드럽게 가지고 오류가 없는 말씀에 정상적으로 비추어 아집을 버리며 인정하고 것이다.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지만, 신념은 내가 확실히 보았다는 생각이나 볼 줄 안다는 자세와 비슷하다. 그래서 신념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 생각을 선택한 '나'를 믿는 것인 경우가 많다. 그것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주변에 많은 잡동사니를 새로 창조하고 겹겹이 없던 벽을 만들어놓고도 자기는 그것을 지킨다고만 알고 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온전한 말씀과 율법을 가지고도 최악의 위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념은 위험하다.

믿음으로 걷는 것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믿는 것이다. 그 줄은 바른 성경에 묶어 고정시켜야 한다. 오늘도 저들은 세상의 철학과 고상해 보이는 정신적 산물에 줄을 대놓고 그곳을 향해 겸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보내며 성경을 그 잣대로 재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유치한' 반론을 내려다보는 신학자 행세를 하고 있다.
다단계의 어리석은 감언이설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불법과 신용불량의 굴레에 들어가 있고, 무용지물인 옥장판만 산더미처럼 남는 법이다. 신념을 신봉하는 이들도 육신의 장막을 벗는 그날이나 되면, 자신들이 산더미처럼 쌓아올렸던 '신념의 장막'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음도 깨달을 것이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7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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