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성경 말씀에 설득당하기/김재욱

아래의 글은 김재욱 형제님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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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그렇다...?

언젠가 행사 때문에 개신교 모 교단 목사님들의 모임에 한동안 낀 적이 있다. 식사 중 여담으로 어떤 전도사의 목사 안수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알기로 그 사람은 아직 미혼이었다. 그래서 물어 보았다. 원래 결혼한 사람만 목사 안수를 주는 것 아니냐고. 많은  분들이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결혼하는 것이 그런 조건 때문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자 대답이 이랬다. 원래 그런 것은 아니고, 미혼이면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개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미혼이면 신자들 사이에서 문제가 많고 불편하기 때문에 아무도 목사로 청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물은 '원래'라는 것은 성경의 규칙을 물은 것인데, 그들은 교단이 만든 규칙을 '원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목사들에게는  교단법이 '원래'가 되고 그게 개정되면 '원래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음을 알았다. 여성에게도 목사 안수를 하기로 하면 그때부터  '우리 교단은 원래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말씀이란 무엇일까. 또 나에게는 무엇일까... 왜 그들에게 '말씀은 원래 이런데,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지  못했을까. 과연 그렇게 해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옳은 말도 포기한 것의 정당한 이유가 될까...


말씀의 귀는 얇을수록 좋다

근래에 온라인을 통해 진화론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 환난통과를 믿는 크리스천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또 UFO 에 대해 책을  권했더니 사서 읽어본 이들도 몇 있었다. 다른 길을 걸어온 크리스천들끼리 한 순간에 의견이 맞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판단할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진화론자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일부 다른 것을 믿는 크리스천과는 대화는 가능하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후자와 대화할 때  더욱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오래전에 환난 후 휴거설을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면서 말씀을 통해 종말론을 열심히 배운 적이 있다. 이후 다미선교회 사태로  건전한 종말론까지 교계에서 사라지고 조용한 동안도 나는 환난 후 휴거설을 믿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말씀을 잘못 나누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그것을 한참 믿을 때 여의도 순복음교회 신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자신은 환난 전 휴거를 믿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내가  환난 통과를 믿는 논리를 배운 대로 설명했지만 그분은 막무가내로 듣지 않고, 논쟁의 근거가 부족하자 '그럼 나는 휴거될 테니,  당신은 남아서 고생 좀 하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래서 환난 전 휴거를 믿는 이유를 성경적으로 말해 달라고 했더니 그분의 말이,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훌륭한 조용기 목사님이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는 논리를 조금 알고 있었지만 납득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또 내가  알고 배운 것에 대한 확신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환난 전에 휴거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흠정역을 알고 난 뒤부터였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개역성경을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였기 때문이었고,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그 때에'와 같은 결정적인 단어들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고, 안  풀리는 것을 모두 영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며, 이스라엘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많은 이들처럼 나도 이 사이트를 통해 공부하는  사이에 말씀의 후련함, 말씀에 설득 당하는 (그야말로 넉다운 되는) 시원함을 알고 많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런  교리나 지식을 다룰 때, 그걸 가르쳐준 목사님이나 기타 믿을 만한 저자 등을 빼면 근거가 부족하고 논리가 빈약했는데, 이제는  말씀으로 충분한 근거와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좋은 성경을 권하고 좋은 사이트와 지식들을 권하면 간혹 '귀가 얇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마치 이상한  모임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처럼 취급을 하기도 한다. 사람은 심지가 굳어야 한다고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까지 심지가  굳으면, 즉 자기 소신이 너무 강하면 한 번 마음에 담은 잘못된 지식까지도 끝까지 우기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바른  말씀에 귀가 얇은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 같다.


우리 목사님이 그러던데요...

예전에 킹제임스 논쟁 기사 중에 침례에 관한 긴 논쟁이 있었는데, 세례로 번역해도 무방하다는 어떤 이가 자기 논리를 변호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가 3천 명을 침례를 주려면 좁은 강에서 가능하겠느냐, 그래서 물을 뿌려 약식으로 주었을 수  있으며 그 행위가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므로... 등등 집요하게 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자기가  알고 실천해 오던 것을 틀렸다고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지만 성경과 명백히 다른 것까지도 우겨서 정당화하려고 애쓴다면  말씀을 믿는 자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온라인에서 환난 통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람들의 논리에 대해 들어 본 뒤 여러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도 설득이 안 되었다.  아무리 심판을 하신다 해도 의인들을 피신시키시는 소돔에서의 하나님을 말하고, 환난이 겨울에 오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 남북반구에  흩어져 사는 세계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알리는 등 여러 자료를 제시했지만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겨울일 수가 있고, 믿음의 시험 없이 어떻게 천국에 가느냐는 식이었다. 또 전 세계가 북한처럼 억압받는 상황이 돼야 믿음을 판별할  수 있을 텐데, 아직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은 지구 곳곳에는 종교적 태평성대가 많으므로 아직 환난이나 휴거가 이루어질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어린 아기들이 죽으면 천국에 가는지 못 가는지 문제는 죽을 때까지 해답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해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자기 교회에 성경학에 능통한 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이 문제는 누구도 결론내릴 수 없는 문제라고  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런 증거들에 대해 다시 가서 물어보겠다고 한다. 그 신학자는 성경에 능통한 것이 아니라 성경 '학'에 능통한  것이며, 칼빈과 기타 등등에 능통한 사람일 뿐임을 왜 모르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금한 것이나 성경의 의문점이 생기면 구역장이나 교역자, 목사에게 묻고 간단한 답을 얻은 후 믿어버린다. 마치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고 믿는 천주교 신자에게 '성경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있느냐'고 물으면 '교황님과 아무개 교부가 그랬다'고  답한다는, 정수영 목사님의 성경공부 중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적당한 거리에서 보기

의견이 다른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생각은 다를 수 있고,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을 제시해도 변화가  없는 것이 의아했고, 전에 내가 설득 당했던 이야기들이 벽처럼 튕겨지는 것이 참 이상했다.
이런 와중에 요즘 마음에 와 닿는 두 가지 말이 있었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나 자신 뿐이다."
"중요한 순간에 일을 망치는 것은 '감정'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성경에 관련된 것들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다. 말씀에 근거했지만 내 생각과 다른 것을 들을 때  가장 걸림이 되는 것은 '자기 생각'인 것 같다. 자기가 평생 주장하고 연구한 것을 뒤집기가 힘들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일지라도 매우 불편해서 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당신은 틀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이 상해서 바로 인정하기보다는 다양한 반론들 중에서 대응논리를 선택해 반박하게 된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논리적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아는 것에 대한 믿음과 근거가 있기 때문이고, 성경과 배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사람의 감정과  자아 때문에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도 진리를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부드럽게 설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사물과 세상사와 성경에 대한 거리는 늘 적당한 것이 좋다. 좋은 뜻이지만 매우 애매한 말인 동시에 '대충 대충'이라는 의미로도  오해하기 쉬운 '적당한'을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너무 가깝고 너무 먼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너무 작은 것과 너무 큰 것을 볼 수 없다. 박테리아나 세포 등을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지구 전체와 우주와 별들을 다 볼  수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모든 세포와 집먼지진드기와 미생물을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살기 힘들 것이다. 멀리서 보면 지구는  파란색과 초록색뿐이고 전쟁도 없고 평화롭게만 보여서 할 일도 없어 보인다. 소리도 너무 작은 것이나 너무 큰 것을 들을 수 없게  되어 있으며 주파수가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말씀도 마찬가지로 주어지지 않은 것까지 억지로 풀다 보면 괴상한 이단 교리가 나오고, 너무 자세히 보고 의미를 대입시키다 보면  논리가 뒤틀리기도 한다. 한편 너무 멀리서 보면 모든 교리가 다 비슷하다고 주장할 수 있고, 대강 섞어서 같은 것으로 묶어 통합해  버릴 수가 있다. 모든 성경을 비슷한 것으로 여기고, 말씀도 세세히 쪼개고 나눌 필요 없이 그냥 '잘하자'는 정도로  두루뭉술해진다. 그래서 말씀을 보이는 만큼 가능한 글자 그대로 담백하게 보고 문맥을 고려해서 살피며 연구하고 비교하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황금률일 것이다.
자아에 대해서 너무 가깝고, 타인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멀리 떨어지는 것도 문제이다.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으며 이웃이나 하나님, 또 말씀의 진리에 대해서 좀 더 다가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적당한 거리'에 문제가 있으면, 자아 때문에 말씀에도 하나님에게도 설득을 당하지 않게 된다.


말씀에 설득 당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성경적 증거를 말해도 듣지 않는 돌밭처럼 딱딱한 마음들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깨지고, 영이 가난하고 말씀에 귀가 얇아지게 된다면 그것이 축복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존중되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갖는다면 이런 문제들이 조금씩 해소될 것이다. 내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자신과 세상을 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둔다면 이토록 많은 지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참된 분별력을 지니고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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