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2일 월요일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신앙생활의 여러  행위들을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것으로 나누어 본다면,
해야할 것은  성경의 말씀을 기초하여 찾아야 할 것이고
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둘 모두에 속한 것들이 있을수 있습니다만, 의외로 하고 싶은것에만 속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것은 해야할 것일까요?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일까요?

말씀에 나와있는 만큼 우선은 해야할 것에  속할것이고, 게다가 하고 싶은것이 되는게 자연스러운 크리스천의 모습일것입니다.

둘  모두에 속하되 그러나 우선은 해야할 것에 속하는 신앙행위이지요.

이처럼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것을 말씀을 통해 구분해보는 것은 의외로 많은 생각과 반성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해야할 것일까요? 하고 싶은 일일까요?

크리스천들과 (성경적인) 교제를 나누는 나누는 일은 해야할 것에 속하는지, 아니면 하고 싶은   일에 속하는지요?

말씀속을 찾아보면 우리가 해야할 것들은 뚜렷이 나와있는걸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몸은 하고 싶은것이지만 해야할 것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더욱 더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죄입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옛  본성이 남아있어서 끊임없이 죄를 짓고 싶고 죄의 유혹으로 우리의 마음이 죄를 짓고 싶도록 합니다. 하지만 해야할 것(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에 속하지 않지요.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속합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가운데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것에 속하는 것을 구분하다보면 그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것도 있습니다.

유아세례는 어떤가요?

대부분 개신교에서 행해지는 유아세례는 그 유래가 비록 천주교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새롭게 바뀌어서  꺼리낌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해야할 것인가요?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인가요?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침례 대신 세례가 행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역시  천주교에서 그 전통이 나왔지만 결국 그 의미가 또한 개신교에서는 새롭게 추가되고 바뀌면서 꺼리낌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해야할 것인가요?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인가요?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많은 것들이 머리속을 가득채웁니다.

말씀에 그 사례조차 나와있지 않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 그러나 좋은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들에는 신학이 큰 지지대가 됩니다. 신학을 기본으로 말씀이 광범위하게 해석되고 비록 말씀의 그 어디에도 사례가 없고 그런 모양은  전혀 나와있지 않지만, 전체적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때, 이런 일들을 하는것이 딱히 나쁜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쪽에 속한  일이 아니냐는 사람들의 의견과 함께 장려할 만한 일로 바뀌는 것이죠.

곰곰히  생각해보면 말씀속의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이 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수많은 종교행위들로 가득차있는 타 종교에서는 이런 행위들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1년을 단위로 각종 반복되는 절기들..  행사들마다 여러가지 의미를 담은 규율과 법칙들 등등.. 또한 세세한 법을 따라 각각의 의미를 담아 행하는 것들을 따라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존의 삶을 벗어난 그런 경험을 하게됩니다.

행위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인간을 직접 지으신  하나님께서 모를리가 없습니다. 신약보다 훨씬 두꺼운 구약의 내용 하나하나가 이런 행위를 추구하다 실패하고마는 유대인들의 역사로  가득합니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 내게되고 오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새로운 일들, 이방의 신기한 문화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전혀 새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닐겁니다.

이렇게 새로운 일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더하면서 결국 해야할 일들은 하고 싶은 많은 일들  속에 섞이게 되고, 해야할 일은 하고 싶은 많은 일들 중의 하나처럼 여겨지게 되지요.
신학은 계속해서 사람의 생각을 지지해줍니다. 신학은 신앙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할수 있는 학문으로 문을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있는 신학자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술해놓은 수많은 자료들은 깊은 신앙의  토대위에 있는 신학자들의 글과 점점 복잡하게 섞여가고, 어느새 긴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유행과 시대의 지지를 받으면서 어느새  비판하기 힘든 하나의 인정받는 생각으로 여겨집니다.

참으로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면 진실에 거짓을 조금씩 섞어가는 마귀의 일들과 참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하 나님을 섬기는 일들로 바쁘던 유대인들이 눈 깜짝할새에 외국 문화와 종교행위를 받아들인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섞여가는 것이겠지요.

어느새 해야할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하고  싶은 일들이 먼저 선행되는 일도 몇차례 생기게 되고 이 둘의 구분은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뒤면 어느새 누구도 신경쓰지 않게  될것입니다.

해야할 일이건 하고 싶은 일이건간에 어쨋거나 할 일이 많다는건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도 되니까요.. 바쁘게 움직일수록 점점 더 바빠집니다. 생각할 시간도 없어져갑니다. 생각은 내가 하는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님이 하는것이 되어버리지요.

그저 교회에서 하자는 대로, 목사님이  하자는 대로..  말씀과 비교하여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는 절대 알수 없는 잘 섞인 포도주를 함께 마시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곧 우리가 해야할 일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무심해져 버린 우리의  모습을 되돌려 우선 해야할 일에 항상 전력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저 하늘의 푯대를 향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저 제 남은 삶이 모아지길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