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2일 월요일

기도와 금식/김문수

이 글은  www.keepbible.com 의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을 옮긴것입니다.

***************************

(마 17:21, 개역) (없음)
(마 17:21, 킹흠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마 17:21, KJV) Howbeit this kind 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막  9:29, 개역)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킹흠정)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런  종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KJV) And he said  unto  them, This kind can come forth by nothing, but by prayer and fasting.


이미 앞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는 금식 기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폄하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께서도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는 마 17:21과
막 9:29 말씀을 통해서 악한 영적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금식하며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한 집회  때마다 "금식"을 했으면서도 하나님께 책망을 들은 것은 그들의 마음 자세와 삶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 28:9, 킹흠정) 사람이 자기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식을 하건, 철야를  하건, 금식기도를 하건 새벽기도회를 하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5:7, 킹흠정)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예 수님이 계시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동기로 금식을 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서   책망하셨습니다.

(마 6:16, 킹흠정) 또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금식" 그 자체는 어떤 신비한 힘도, 주술적인 효능도,  영적인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금식 자체에 능력이 있는 거라면, 상황이 어떠하거나 개인의 삶이
어떠 하거나 영적 상태가 어떠하거나 간에 금식은 항상  같은 효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했지만 오히려 책망을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하며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금식 기도를 외면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금식 그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것 다 팽개치고 무조건 머리띠 동여매고
밥 굶으면서 요구조건  들어줄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단식 투쟁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개역성경을 사용하시는 분들은 금식기도의 중요성을 말씀에 근거하여 주장하기가 참 힘듭니다.  마태복음 17:21을

인용하면 좋겠는데, 개역 성경에 그 구절은 "없음"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고 막  9:29을 인용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그들의 성경에 "금식"이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없습니다. 결국  킹제임스성경을 인정하기 싫어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마태복음 17:21의 난하주에 있는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인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용을 할 때에는 제대로 번역해서 인용해야 합니다.

(마   17:21, 바른)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가  있음.
(마   17:21, 개정) (없음) /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
(마   17:21, 개역) (없음) /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
(마 17:21,  공동)  ㉠(없음) / ㉠어떤 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마귀는 기도와 단식을 하지
않고서는 쫓아낼 수 없다."
(마 17:21, 가톨릭) 그런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마 17:21, 현대인) (그러나 이런 귀신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마  17:21,  현대어) ㄷ) (없음) (ㄷ. 어떤 사본에는 21절이 `이런 병을 기도와 금식 외에는 고칠 길이 없다'로 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본에는 21절이 빠져 있다)

"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마귀는 기도와 단식을 하지 않고서는 쫓아낼 수 없다"
" 이런  귀신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
"이런 병을 기도와 금식 외에는 고칠 길이 없다"

이런 번역은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기도와 금식을 하면, 즉 금식기도를 하면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해서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선 한 가지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금식기도가 마귀를 쫓아낸다면, 기도와 축사가 같은 겁니까?  그러니까 금식을  하면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 앞에서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쫓아내는 행위)하면 마귀가 떠난다는 겁니까?

그런데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는 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라고 하는 겁니까? 이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겁니다.

여담입니다만, 대학 다닐 때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단체를 두 군데 보았습니다.
하나는  총기독학생회(그 당시에는 종교를  가장한 운동권 단체였음)인데 구국기도회를 한다면서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OOO 정권은  회개하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아멘" 합니다.
또 한 단체는 CBA(베뢰아아카데미)인데, 중얼중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하다가,
느닷없이 "귀신아  그에게서 썩 나오느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하 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에게 "회개하라"고 하지를 않나, 하나님을 향하여 "귀신아, 나가라"고 하지를 않나,
도대체 이게  무슨  망발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보고 한 말이라구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기도한
내용은 마귀에게 기도한  겁니까?

만약 "마귀야 그에게서 떠나라"라는 말이 마귀에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마귀에게  말 걸고 마귀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너무 사소한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금식기도와  축사를
혼동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겁니다.

마 15:22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의 간청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행 16:18에서 바울이 어느 소녀를 사로잡고
있는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나오게 하는 것을 축사라고 합니다.

(마 15:22, 킹흠정) 보라,  어떤 가나안 여자가 바로 그 지방에서 나와 그분께 소리 질러 이르되,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내 딸이 마귀에게 몹시 시달리나이다,  하나

(행 16:18,  킹흠정) 여러 날을 이같이 하거늘 바울이 근심하여 몸을 돌이켜 그 영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령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오라, 하매 그가 그 즉시 나오니라.

금식기도와 축사는 다릅니다. 성경에 금식기도로 마귀를 내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게 다 성경이 저렇게 번역되어 있으니, "금식 기도를 해야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성경에는 "금식기도를 해서", "금식기도에 의하여",  "금식기도로" 가 아니라, (사람이나 금식 기도가 주체가 됨)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금식 기도는  수단이 됨)

우리 주님께서는 마 17:21과 막 9:29 말씀에서 악한 영적 존재를  물리치는 것은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1) 와(and, kai)

위의 마 17:21과 막 9:29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도 "와" 금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금식이 단독으로는
의미가  없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I ate bread and butter.

위 문장을  "나는 빵과 버터를 먹었다"로 읽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버터바른 빵"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prayer and   fasting 이란,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귀를 내어쫓는  것은 금식의 힘일까요, 기도의 힘일까요?

금식은 자신의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고, 잡념을 버리고, 기도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줄 뿐, 그 자체로서는
마귀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마귀가 굶주린 사람 앞에서는 약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굶주려 있을 때 시험하려고
했 습니다. 하나님이  밥 굶은 사람의 목소리는 더 잘 들으실까요? 밥을 굶고 자기 몸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중요한 것은 금식이 아니라, 기도, 즉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회자들, 기도원장들 이런 분들이 성도들에게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바르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칠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이 금식을 기뻐하신다느니, 금식하면 마귀가 떠나고, 결박을  풀게  되고,..."
등과 같이 성경에도 없는 금식의 효능에 대해서 소개하거나, "금식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물과 소금을  챙겨라,
기간은 며칠이 적당하고, 변비 문제와 몸에서 냄새나는 것은 이렇게 해결하고, 금식 시작할 때에는 뭘 먹고,
금 식 끝나거든  보식으로는 무슨 죽이 좋다"는 등 금식하는 요령이나 가르치고 있으니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초점은 금식의 효능이 아니라, 기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를 전념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2)  통하여(by, en) - 수단, 도구를 의미함.

금식이 그 자체로는 효험이 없고,  기도와 합쳐져야 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두 가지가 합쳐진 "금식 기도"에는
뭔가 특별한 효험이  있는 것일까요? 즉, 일반  기도 말고 두 가지가 합쳐진 "금식 기도"는 다른 기도들보다 효험이

있는 것일까요?

기도가 효험이 있느냐, 혹은 금식기도가 효험이 있느냐 하는 질문은 그렇다고 해야 할 지, 아니라고 해야 할 지

참 망설여지는 질문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답변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글로 표현하자니 전달에 한계가

있어서 혹시라도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제 가족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화요일(7월 21일)에는 유치원에서 캠프를 가기로 예정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내내 일기예보에서
월, 화 이틀간  많은 비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유치원 선생님들도 다들 걱정했습니다. 아내가 날씨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두 아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일기예보와는 달리 캠프 당일 화창한 날씨가 되어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일기예보만 믿고 다른  유치원들에서 모두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모든 시설물을 전세 낸 것처럼 독점하여
사용하고  여유있게 관람하고 왔다고 하네요.

아내가 고맙다며, "얘들아 이게 다 너희 기도 덕분이야"라고 말했고, 아들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효력을 발휘했다며
좋아했습니다.  아내가 아들들에게 기도의 동기력을 심어주기 위해 한 말이기 때문에 면전에서 틀렸다고  따지지는
않고, 넌지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  덕분이야"라고 말하고 그쳤습니다.

자, 세 남자는 비가 오지 않기를 위해서 "합심 기도"라는 것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세 남자의 합심  기도가 장마전선을  물러가게 하고, 화창한 날씨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기도 덕분입니까, 합심기도 덕분입니까,  새벽기도 덕분입니까?

어떤 분은 "예"라고 하실테고, 어떤 분은 "아니오"라고 하실  건데, 둘 다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정답은  "아니오" 쪽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면, 아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민 20:10,11, 킹흠정) 모세와  아론이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 /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크게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하 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게 말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반석을 쳐서 물이  솟아나게  했습니다. 거기에다 모세는 마치 자기들이 물을 주는 것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을 내세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았지만, 또 잘못된 태도로

능력을 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준 것은 모세일까요, 모세의 지팡이일까요, 반석일까요?

셋 다 아닙니다.
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신 겁니다.

저와  아들들의 합심 기도가 비를 그치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분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금식 기도가 마귀를 쫓아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귀를 쫓아내  주십니다.

일반 기도보다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금식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오른팔을 움직이는 가느다란 신경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 기도가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이런 종류(악한 영적  존재)가 나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능력, 금식기도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그 능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기도는 그 분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관계를 나타내자면 이렇게 되겠네요.

능력의 원천 =  하나님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 = 기도
기도에 전념하도록 도와주는 수단 = 금식


2.   금식의 의미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음으로 금식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밥 굶는 금식, 사람들에게
보 여주기 위한 금식, 금식과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제가  앞의 글을 통해서 "금식"에 대해서 경계하는 글을 쓴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금식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 자체에 효험이 있다거나, "금식을 하면 하나님이 빨리 응답하신다"거나,
금식을 마치 문제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처럼,  혹은 주술  행위처럼 여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만약 금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에는 금식 기도 이외에, 굵은 베옷을 입고 기도하는 것, 옷을 찢고
기도하는 것,  머리에 재를 뿌리고  기도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도 한 번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최근에는 "야베스의 기도", "다니엘 기도"가 유행인  모양인데  누군가가 "베옷 기도", "찢어진 옷 기도",
"재투성이 기도", "눈물병에 눈물 모으기" 등도 만들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그 기도의 본질을 무시하고 외면만 베껴서 따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명령과 인간적 교리를 따르는 것이며,
"의지대로  경배하는" 행위에 속합니다.

실 제로 약 10여년 전, 저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던 목사님네 동네에 이상한 교회가 하나 들어섰답니다.
이름하여 행주치마 교회,  이  교회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갈 때 남자나 여자나 모두 앞치마를 하나씩 두르고 간답니다.
앞치마에는 각각 영력의 정도를  나타내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답니다. 예를 들어, 그 앞치마를 입고 30일 새벽기도회에
하루도 안 빠지고 나오면 교회에서  "30일 새벽기도회 출석" 이라고  써 준다는 겁니다. "100일 작정기도 앞치마",
"3일 금식기도 앞치마"도 있고, 제일  센 건 "40일 금식 기도 앞치마"라고 합니다.  이걸로 뭘 하느냐구요?

(행  19:12, 킹흠정)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질병들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악한 영들도 그들에게서 나가더라.

성경에 사도  바울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대면 낫는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자기들도 말씀대로 따라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벼운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3일 금식기도 앞치마"를 던지고, 그걸로 병이 안 나으면 좀 더
레벨이 높은 앞치마를 쓴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유희왕 카드나 슈팅바쿠간 카드로 공격력, 방어력, 마법력을
비교하여 누가 더 센가 시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그  앞치마를 착용하고 금식기도를 했으니까,
철야기도를 했으니까, 100일 작정 기도를 끝냈으니까,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덕을 쌓았고, 그  영적인 파워가
앞치마에 축적되어 있다는 겁니다.

너무 어이가 없는 생각이지요? 그런데 금식 기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런  사람들처럼 "금식 기도"를 주술 행위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일반 기도보다는
"3일 금식기도"가 낫고,  "3일 금식기도"보다는  "40일 금식기도"가 더 영험하고, 그것보다는 "일천번제 기도"가
더욱 큰 능력이 있다고 믿는  자체가 미신적 행위요, 주술적 행위라는  겁니다. 여기서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라는
판단의 기준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한 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일반 기도보다 금식  기도가 낫다고
믿습니까? 왜 3일 금식기도보다 40일 금식기도를 더  높이 쳐 줍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보다 더 지극한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는 겁니다. 내가 "공덕"을 쌓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감동 먹으라고 내가 율법적 행위를
더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자랑스럽고, 당당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도
빨리 주시고, 문제도 잘 해결해 주실  거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금식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셨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금식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경 말씀을 통해서 금식이 기도 생활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은  번역에 일관성이 있어서 특정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례를 쉽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성경에서 KJV 역으로 prayer, fast  두 단어가 동시에 들어가는
구절들을 찾아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  17:21, 막 9:29을 제외하고도 다섯 구절이 더 있습니다.

각각의 말씀에서 금식을  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이 단순히 밥을 굶는 게 아니라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식 기도에는
어떤 것들이  수반되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① 금식을 하면서 주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

(시 35:13, 킹흠정) 나로 말하건대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고 금식하며 내 혼을  겸허히
낮추었더니 내 기도가 바로 내 품에 돌아왔나이다.
(시 35:13, KJV) But as   for me, when they were sick, my clothing was sackcloth: I humbled my  soul  with
fasting; and my prayer returned into mine  own  bosom.

② 죄를 자백하고, 낮아져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약속의 말씀을  주장한다.

(단 9:3, 킹흠정) 또 내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쓴 채 주  하나님을 향하여 내 얼굴을  고정하고
기도와 간구로 구하니라.
(단 9:3, KJV)  And I set my face unto  the Lord God, to seek by prayer and  supplications, with  fasting,
and sackcloth, and ashes:

③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며, 섬긴다.

(눅 2:37,  킹흠정) 과부가 된 지 팔십사 년쯤 되니라.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더라.
(눅 2:37, KJV) And she was a widow  of about  fourscore and four years, which departed not from the  temple,
but served God with fastings and prayers night and  day.

④ 참고 절제하면서 기도에 전념한다.

(고전 7:5, 킹흠정)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그리하는 것은 예외이나 다시 함께하라. 이것은 너희가 참지 못함으로 인해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7:5, KJV) Defraud ye not  one the other,  except it be with consent for a time, that ye may  give
yourselves to fasting and prayer; and come together  again, that Satan  tempt you not
for your incontinency.

성경에서 금식과 기도라는 단어가 같이 사용될 때에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으로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고,  겸손히 주와  함께 동행하며, 자신의 욕심을 제어하는 삶이 수반됩니다.

금식은 그 자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효능이 없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욕심을 절제하고  기도에만 전념하도록 하며,  더욱 주님만을 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생활에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금식을 했기 때문에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의 기도를 보십시오. 다니엘이 굶어가면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낮아진 마음 자세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얼굴을 주께로 향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금식했기 때문에"로 해석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제가 다섯 구절이 더 있다고 했는데, 하나가 빠졌지요?

⑤ 금식기도를  하고서도 하나님께 좋은 말 못 듣는 사람도 있다.

(눅 5:33, 킹흠정)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또한
그리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까? 하매
(눅 5:33, 킹흠정) And  they said unto him, Why  do the disciples of John fast often, and make  prayers,
and likewise the disciples of the Pharisees; but  thine eat and  drink?

여기서 "그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눅 5:30).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투덜댔습니다.

"나는 금식하는데, 너는 왜 하지 않느냐?", "나는 그대보다 거룩해.", "다른 사람들 다 하니까 너도  금식기도해라."

만약 금식기도를 하면서 위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은 태도를 품고  있다면, 금식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금식 기도를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는  것을 보고 다들 놀라고,
주님을 시기했습니다. 자기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능력있게 행하시니까 놀라고 시기하는  겁니다.
금식기도 자체에 능력이 있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께
책 망을 들었을까요?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의 제자들도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십니까?"
그들의 말에 나타나 있듯이,  그들의 금식은 모두 자기 만족과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지, 자기 마음을 낮추고
주님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물을 사랑하고, 외식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했지,
그 마음과 삶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금식기도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한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기도가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나, 자기 만족을   채우고,
자기 의를 쌓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금식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능력이 있으며,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 분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끊고 기도한다고 해서 능력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면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의 욕심을 제어하며, 기도에 전념해야만
그 금식이 기도에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낸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그 백성들에게 능력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이었듯이,
우리 능력의 원천은 금식기도가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내가 금식기도를 했더니", "내가 100일 작정기도를  했더니", 이런 간증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 의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주의해야겠습니다.

덧 붙여, 체질적으로 한 끼만 굶어도 힘을 쓰지 못하는 분들은 굳이 금식기도를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금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에 의해서 제한받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 역시 금식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
이 글은  www.keepbible.com 의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을 옮긴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