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2일 월요일

'문자주의' 비난에 대하여 / 김재욱

아래의 글은 김재욱 형제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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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성경은 완전치 않다?

몇 달 전, 기독교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쇼핑몰에 있는 책 마니아들의 게시판에 '그리스도예수안에'의 최근 신간 10권을 간단히  소개한 적이 있다. '10권의 책만을 무인도에 가져갈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는데, 그곳에 자주 오는 사람들이  댓글을 남겼다. 호의적인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10권이 다 한 출판사(물론 번역사)의 책일 수가 있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고, 세대주의를 주장하는 곳으로 안다면서 더 볼 것  없다는 식으로 쓴 사람도 있었으며,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주장은 이미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 어떤 이가 성경비평가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이야기들을 적었는데, 자기는 성경 이슈를 많이 모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다음과 같이 썼다.



1. 성경은 원본은 없고 사본만 존재합니다.
2. 성경은 교리집이 아닙니다.
3. 성경은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관점으로 통일성을 유지하며 읽어야 합니다.
4. 인간의 지식으로 성경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이런 말이 하고 싶은 것처럼 느껴진다.



1.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2.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 안 된다.

3. 성경은 여러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하며 신학자나 종교개혁자의 주석 등을 참고해야 한다.

4. 성경은 모두 해석하기가 어려운,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책이다.



말하자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런 자로 재는 식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세상 역사나 과학과 일치할 수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가?





어느 창조론자의 입장변화

약 2년 전에 양승훈 교수가 교계에 반향을 던지는 발언을 했다. 양 교수는 창조과학회 부회장을 역임한 적 있고, 기독교적 세계관  분야의 권위있는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캐나다 밴쿠버에서 세계관대학원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는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기존의 믿음을 바꿀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었다.

지구의 나이는 1만년보다 훨씬 길다는 것이며, 6천 년이라는 시간은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증거를 많이 발견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새 주장이며, 따라서 기존의 성경에 입각한 과학들도 씌어진 그대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나름 숙고한 후의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는 또 새 저서를 통해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전의) '다중격변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입장변화는 금세 이슈가 돼서 국민일보 등에서 그의 기사를 실었고 토론이 이어졌다. 그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양 교수의  그간 행보들을 되짚으면서, 창조론과 진화론 진영 중 어느 쪽에서도 욕을 먹지 않겠다는 심산이라고 비난했다.

한국창조과학회도 서둘러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며, 양승훈 교수가 학회의 부회장을 역임했다고 해서 그의 입장이 학회의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우리는 여전히 성경대로 믿고 있으며 양 교수의 뒤바뀐 입장에 대해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개인의 믿음 변화에  불과하다는, 일종의 성명을 반박자료와 함께 게재했다. 또한 파급효과를 우려해 창조과학회에서 제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두고 양  교수와 지지자들은 타인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마녀사냥과 같은 것이라고 유감의 뜻을 밝혔다.



양 교수의 입장 변화는 물리학자였던 자신의 연구에 의한 증거들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물론 일반 과학과 진화론적 증거들에 귀를  기울인 결과일 것이다. 기존의 과학으로는 돌덩이 하나만으로도 창조론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오랜만에 고국땅을 밟으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양 교수의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다. 여러 근거를 들며 과학과 성경을 일치시켜서 믿으려는 자들을 비난했고, 다른  주장에 귀를 전혀 기울이지 않고 성경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어리석은 고집불통의 신자들로 몰아세웠다. 그중 적지 않은 크리스천  학자들이 '문자주의'를 고집하는 창조론자들의 행태를 크게 비난하고 있었다.

위 게시판에 글을 쓴 사람처럼, 성경을 과학책이나 역사책으로 알고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나 기존 과학의 증거들을 무시하려는 이들이  답답하고 어리석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주장들을 대변하는 어떤 이의 글 중 한 대목이다.



과학철학을 하시는 장대익 교수님은 물론이고 종교학과 신학을 하시는 김윤성, 신재식 교수님도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진화론을 수용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 분 모두 개신교에 영향을 받았으면서 창조론에 매몰되지 않은 것은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열린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중고교 시절부터 축자영감설 같은 성서의 문자주의에 반대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진보적인 개신교에서 자라 진화론을 수용하는 데 별로 갈등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는 종교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각각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본인의 소박한 성서 이해는 신의 말씀을 직접 녹음하여 성서를 만든 것이 아니고 옛 성서 기록자들이 명상 (또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이라고, 그리고 신의 계시라는 것은 기록자가 속한 당시 사회의 지적 수준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서 어디에도 '지구'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고, 언제나 '땅'과 '하늘'뿐입니다.  이는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이나 지동설이 나오기 훨씬 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그의 말대로 잘못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성경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역성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사야 40장 22절에 하나님께서 땅의 원(circle og the earth) 위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다.

지동설 또한 지금은 정설로 통하지만 이는 성경을 의심하는 사고의 분기점을 가져온 학설이고, 하늘과 지구는 마찰하고 있을 뿐 땅이  도는지 천체가 도는지는 상대적인 것이므로 알 수 없다. 지구는 적도 기준으로 시속 1,600km로 엄청나게 빨리 돌고 있는데도  우리가 아무렇지 않은 것은 관성의 법칙 등의 이유가 아니라 천체가 돌고 있기 때문일 수 있으며, 땅은 하나님의 발받침이라고  했으므로 돌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입맛대로 골라 믿는 즐거움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어디까지 믿고 어디부터 상징이며 영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성경과 기독교는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했던 한 청년이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니, 이런 모호한 정체성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 예수라는 청년은 신성모독하며 혹세무민한 사기꾼 아니면 참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지만 훌륭한  성인으로 인정한다면 그는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개념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개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창조주요 구세주로 아는 것  외에는 모두 그 분을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창조가 사실이면 처녀탄생도 사실이고, 장사되심과 부활도 모두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부활은 믿고 처녀 탄생은 못 믿겠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기록된 6일 동안의 창조를 못 믿으면 첫 사람 아담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그에게는 둘째 아담도 의미가 없으며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의심이 가시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면, 성경을 일부만 취해서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다 믿는다는 것이 모두 이치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을 진화론의 연대와 끼워맞추거나 아담과 창세기 족장들의 천 년에 가까운 수명에 대해 당시의 1년은 지금의 한  달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말씀을 믿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심지어 천지창조 기사를 신화적인 창조에 관한  상징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때문에 점차 영적인 문제로 생각하게 되어 영지주의자와  같은 관점을 지니게 된다.
최근에 진보적이라는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의 보수적인 입장을 오히려 비판하며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좀 통이 크게  세상과 눈높이를 맞추라고 한다. 그 러나 사실인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세련된 포용력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잣대로 판단할 자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 어떠한 변명이나 설득도 없이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문자주의가 잘못된 것일까? 그 들은 성경에 쓰인 대로 믿는 것이 무지이며 과학을 잘 모르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 어느 누가 모든 이치를 깨달았으며 모든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기독교 교리의 심장인 처녀탄생과 보혈에  의한 구속을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마 속으로 어찌 생각하든 그런 것은 믿는다고 할 것이다. 논의에서 제외되거나 이단 취급을  받기는 싫을 테니 말이다.
그 렇다면 처녀 탄생은 세상의 잣대로 볼 때 과학적인가? 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논리적인가? 그럼 어떤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상징으로 해석하겠는가? 그거야말로 인간의 기준과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성경 신자들도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치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모든 해답을 줄 수 있음을 알고 있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알게 될 것을 믿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만을 알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유서나 법전도 영적해석 한다면?

법전에 담긴 법은 그 말의 어감이나 단어, 조사, 토씨 하나까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때문에 법의  애매모호한 표현 등은 계속 수정되고 있다. 인간의 법이 이토록 민감한데 하나님의 말씀이 두루뭉술하게 쓰였을까? 성도들을 헷갈리게  하고 논란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을까?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하다가는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인간의 유언은 어떤가. 누군가 아버지로부터 유언장을 받았다면 그것을 꼼꼼하게, 그리고 충실히 해석하고 또 실천할 것이다.  자기에게 어느 지역에 얼마간의 땅을 남겼다고 했는데 그 문자들을 무시하고 상징적으로 받아들여, 그 유언에 나오는 땅 2만 평을  아버지가 남긴 영적인 유산이라고 해석하며 찾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유언장 역시 법전처럼 민감하고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며 문자들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이 남기신 말씀이 인간의 손에서 마음대로 가위질 당하고 엉터리로 해석된다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이다. 그러나 믿기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믿어야 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의  자세이다. 더구나 신약과 구약은 '남기신 말씀'이고 약속이며 유언(testament)이다. 그래서 '신유언, 구유언'으로 제목을  바꾸는 시도를 했던 이들도 있었다.



하나를 양보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홍해를 가른 기적을 갈대밭이라고 하거나,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의 설교에  감동한 청중들이 감췄던 식량을 꺼내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석하는 등 인간 세상의 가능성에 맞게 하늘의 일들을 해석한다면 모든 것이  뒤틀리고 만다. 신천지 같은 이단에서 주장하는 대로 하면 교주 이만희가 보혜사가 된다. 그런대도 그들은 성경이 모두 풀리는 난생  첫 경험을 했다며 자신들만 진리를 찾은 양 행복해(?) 한다.

이런 식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통해 갖가지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144,000이라는 숫자를 성경에서 발견하고 나름  고민을 하다가 하루가 1,440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게 그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희한한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전에 '천국 복음 전도회'의 구인회 교주는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는 스가랴서 14장  20절(개역)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다.

" 말죽거리에 있는 '말산'은 성경에서 언급한 성지다. '말방울'이라는 것은 말산의 정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니 말세에  말죽거리에 있는 말산의 봉우리에 초막성전을 짓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만이 마지막 때의 환란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구인회는 구속되고 나중에 옥중에서 죽었는데, 그를 추종하던 신도들은 재림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러 왔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천벌을  받으려고 그를 핍박해서 결국은 죽이고 말았다면서 한동안 그 집단을 지켰다고 한다. 이런 황당하다 못해 실소가 나오는 주장을 실제로  하고 또 많은 이들이 따랐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그처럼 기준이 없는 존재이다.





알아야 할 것만 알기
해 외토픽에 911로 응급전화를 거는 개가 나왔었다. 그 개는 주인이 훈련시킨 대로 위급한 상황에 전화기의 9와 1 버튼을 두 번  누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개는 반복적으로 시킨 일을 할 뿐이지, 911의 매커니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 개는  자기가 알아야 할 것만을 안다. 주인은 개에게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는다. 개가 인간들의 세상에 있는 긴급구조 시스템과  구조대원들의 숫자와 그들의 서류와 업무와 그 복잡한 네트워크를 알 리가 없다. 개와 인간은 그 차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개가 911 버튼 누르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주인이 죽어가는데 '911이란 숫자에 불과한 것이니  다른 걸 해 보자'고 생각해서 직접 인공호흡을 하는 식이라는 것.

그런데 인간은 그들을 창조하지 않았다. 때문에 동물과 인간의 격차보다 인간과 하나님의 격차는 실로 상상할 수도 없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일과 그 분의 말씀을 다 알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려니와 맞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말씀 그대로 두면 모든 과학이 풀리고 합리적으로 드러난다.



말씀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것은 911을 누르는 개한테,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주인의 말을 좀 다르게 해석해 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다. 또한 문자를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명백한 상징적 표현이나 은유, 비유를 파악하지만  과도하고 무리한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가능한 글자 그대로를 믿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이다.  세대주의 또한 굳이 '주의'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경륜을 바르게 나누고 그것을 믿는 것뿐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기 위해서는 바르게 보존된 말씀이 존재해야 한다. 어쩌면 바른 성경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해답을 찾지  못하고 이런 돌고 도는 늪에 빠지는 것은 예정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기준을 붙잡는 크리스천들

결론적으로 세대주의, 문자주의 등의 용어는 파당을 짓는 구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겠다는 믿음일 뿐이다.  사람들은 원리주의, 유일주의, 근본주의 등의 용어를, 다른 것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 싫어하는 경향이 있지만  문자주의는 ('주의'라는 말을 빼도 상관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일 뿐이다.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 (벧전 3:15) 여 기서 '대답'이란 헬라어 apologia인데, '변증'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증거에 의한 방어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을 세상학문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양 교수와 같은 이들은 그런 시도를 하는 모양이다.



땅을 허공에 매다셨다는 욥기의 이야기, 물과 바람의 순환회로를 이야기한 전도서의 이야기, 땅이 둥글다는 이사야서의 이야기도  당시의 학문에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의 인간의 욕심대로 보려는 과학의 잣대로는 틀려보이는 일들도 모두 드러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빛의 속도를 들어 수억 광년 떨어진 별이 6천 년 동안 어떻게 오느냐고 묻지만, 한 연구에 의하면  과거로 갈수록 빛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며 창조 때에는 거의 무한대였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인간에게 베푸신  것이므로 관측이 가능한 상태로 창조하셨을 수 있다.

이런 모든 궁금증이 성경대로 풀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문자주의를 비난했던 이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것이다.



'각주구검'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배를 타고 가다가 검을 빠뜨린 무사가 재빨리 뱃머리에 표시를 하고는 건너편 도착지에 가서  표시한 자리로 뛰어들어 검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는 뜻으로, 움직이는 배에 아무리 표시를 한들 그 아래 잃어버린 칼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흔들리고 움직이는 기준으로 성경을 재고 탐구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체육시간에 "기준!"을 외친 아이가 이리 저리 왔다갔다하면 모두가 흐트러진다. 그러나 완전하게 보존된 최종권위의 성경은 언제까지나  흔들림이 없다. 그것만이 어떤 경우에도 해답을 줄 것이며 거기에 담긴 뜻을 가능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게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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