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2일 월요일

상대주의와 주관적 사고의 위험성/김재욱

아래의 글은  김재욱 형제님의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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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주의와 주관적 사고의 위험성 / 김재욱


열린예배 혹은 구도자예배

요즘 기독교에 깊이 침투한 가톨릭의 신비주의 영성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감하기만 하고, 예배는 변질되어 열린예배 등의 형태로 은사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예컨대  금이빨의 기적을 보여 주는 코미디의 극치 알파코스의 창시자 니키 검블은 성공회 신부이다.

예 전에 청년사역으로 잘  알려진 하정완 목사의 책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나는 그분한테 개인 감정은 없다. 그때는 선교단체에서 일할 때였는데, 그분이  편집자와 그곳의 디자인 실장이었던 나를 초청해서 식사대접을 한다고 할 때도 괜히 처음 보는 사람 만나는 것을 원래 어색해 해서  가지 않았었고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다.

그 선교단체에는 하정완 목사의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도 몇 있었다. 수년 후,  지금으로부터 한 3년 전에 내가 다니는 교회에 그분이 강사로 온 적도 있었다.

하정완 목사의 열린예배 드라마 관련  저서에 보면, 서두에서 그는 유학 중 참여한 윌로우크릭의 열린예배(구도자예배, Seeker Sensitive Service)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런 열린예배의 시작은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로 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슐러가 만든  드라이브-인 처치, 즉 자동차 극장처럼 넓은 정원에 차를 타고 모여 스크린을 보며 예배하는 것이 그 시초였으며 이에 영향받아 그  뒤를 이은 것이 빌 하이블스와 릭 워렌 등이라는 것. 물론 계보로 본다면 로버트 슐러보다 앞서 적극적 사고방식의 주창자 노먼  빈센트 필이 있을 것이다.

아 무튼 이런 예배의 전자기타와 드럼과 음악들, 감성을 자극하는 쇼와 같은 설교에서 뭔가  자극을 받고 후련해지는 느낌을 은혜로 아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시들해질 경우 더욱 자극적인 방법을 쓰는 것은 주최측이나  참여자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은사운동으로 옮아 가는 것은 당연한 코스이다.

뉴 에이지 아티스트 시크릿  가든의 You raise me up 같은 노래는 그 대상 You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단지 종교적 선율과 CCM 같은 가사로  크리스천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여러 찬양사역자들이 앞 다투어 자기 레퍼터리로 삼아 왔다. 교회에서 하면 다 좋다고 생각하는  순진하고 무지한 크리스천들은 지금도 이 노래를 찬양이나 CCM으로 알고 있다. 물론 사실을 알아도 '그게 뭐 어때서?'라고 할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문화는 중립적인 것?

그런데 나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말하고 싶다.

문화는 무색투명한 도구이며 중립적이라는, 좋게 쓰면 좋은 것이라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칼이  요리사에게 들려지느냐, 강도에게 들려지느냐와 같은 이치라는 것인데... 어찌 들으면 그럴 듯한 이 말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있다.

크 리스천과 일반인을 막론하고 점차 팽배해지는 주관적, 상대적 관점은 무엇이든 내가 만족스러우면,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말한다. 좋지 않은 영화에서도 내가 좋은 점을 발견하면 그것이 복음의 메시지로 쓰일 수 있다 해서 하정완  목사의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들이 많은 영화를 의무적으로 보면서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상영하면서 영화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영화예배라는 것을 처음 주창하여 교계에 논란이 됐던 것도 하 목사였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CS 루이스의 저서 <인간폐지> 를 보면 어떤 이가 자기의 저서에서  '큰 폭포에 대해 느끼는 장엄함'을 논하면서, '그것은 단지 주관적인 느낌으로서의 장엄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쓴 것에 대해 철저히  반박한다. 거대한 폭포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누구나 그렇게 느낄 만한 절대적인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선은 보기에 따라 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악도 보기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으로나  찰학적으로나 인간 본성으로나 아주 잘못된 위험한 생각의 시발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아주 마땅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만 일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적으로 보게 되거나 상대적으로 보게 되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상대적인  개념을 적용하여, 상위 1%만이 천국에 올 수 있다면 어떨까. 주관적 개념을 적용하여, 기분이 안 좋으니 오늘 죽는 이는 무조건  지옥이다...라든지, 이런 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나 는 기독교의 가장 우수함이 합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인간이 감당 못할 요건으로 구원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다. 퍼센트가 문제가  아니라 100퍼센트라도 다 오면 다 받아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또 오락가락하는 잣대를 쓰지 않으시기 때문에 누구도  변명치 못할 정도로 완벽하신 분이다. 정말로 찬양하고 또 찬양할 만한 분이 아니신가.

칼은 요리사가 잘 쓸 수 있지만  마약은 누가 사용해도 병폐만을 불러온다. 예배에 쓰는 세상음악이란 바로 그런 '나쁜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영 화 '블랙'의 감동 메시지?

주관적 잣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얼  마 전에 <블랙>이라는 인도 영화를 보았다.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처럼, 삼중고를 겪는 장애 아이 미셸과 그녀를  가르치는 스승 사하이와의 이야기이다. 그냥 보면 매우 감동적이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요, 또 철학적 명언들이다.

그 러나 감정을 조금 치워놓고 보면, 영국계 부유한 인도인들이 주인공이며 일반 인도인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는 그 영화는 철저히  할리우드적 구성과 스토리에 철저히 상업적인 코드로 만들어진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철학이란 인도의 범신론적 철학이며  윤회적인 사상이다.

다른 것은 다 관두고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하고 싶다.

선 생님이 돌아오시기를 성당에서  10여 년째 기도하던 주인공은 드디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돌아온 사하이 선생님을 만난다. 이제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선생님에게  반대로 가르쳐주는 일에 성공한 주인공... 얼마 후 선생님이 죽어 성당에서 열릴 장례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영화에는 우리 인생의 여정은 블랙에서 시작하여 블랙으로 끝난다고도 하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대략 이런 것이다.

"사하이 선생님의 알파벳도 저처럼 A B C가 아니라 B L A C K로  시작되겠죠. 블랙으로..."

이 영화에 특정한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그저 성당에 다니는 장면, 그리고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대상은 다루지 않는다. 암흑 자체인 블랙에서 시작해서 블랙으로 끝난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선생님은 죽어서 다른 사람 또는 어떤 것으로 태어날지 모르지만 암흑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감동적이라 할 때, 뭘 그리 파고들어 따지느냐고  하면서 내가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기독교의 진리를 발견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  리가 있는 말일 수 있지만 나는 반대다. CS 루이스가 말한 것, 그러니까 남을 위해 희생한 선생님의 숭고한 사랑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감동적이었다고 해서 이 영화를 보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것만 빼서 설교에 적용한다는 것은 절대 반대이다.

왜  냐하면 좋은 점에 감동해서 그것만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화의 초당 30프레임 중 하나만 바꿔 놓아도  전혀 인식을 못하는 가운데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인지하고 뇌에 저장한다고까지 하는데, 굳이 그런 실험 결과를 들추지 않더라도  윤회를 말하는 것은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윤회사상일 뿐이고, 범신론이나 불가지론도 고유의 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  떤 영화에는, 밖에서는 살인자요 깡패인데 집에서는 평범하고 좋은 아빠가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의 인간적 면모에 연민을  느끼는 것은 물론, 그는 악인도 선인도 아니라고 여기거나 연약한 선인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런 적용은 곤란하다. 그는 철저히  회개하고 돌아서기 전까지 의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객관적이시다

다 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이 그때그때 바뀌는 것이어서, 방에서 한 발을 밖으로 뺀 다음 "내가 들어갈 것 같으냐? 나갈 것  같으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설 자리도 없고, 아무런 존재가치도 없는 단순 피조물이자 미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하나님을 발견할까요? 못할까요?" 이렇게 말이다.

이  런 식의 주관적 관점과 상대적인 적용이 절대 선이나 악은 없다는 위험한 생각의 씨앗임을 그들은 모른다. 이런 잣대는  이교도들에게나 줘버릴 일이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모든 종교가 그런 식이다. 예컨대 이슬람은 욕정을 참지 못하느니 여러 부인을  거느리는 게 낫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선문답 같은 말로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느냐거나 하느님도 사탄도 다 같은 부처  아니겠느냐고 한다. 천주교는 맘에 안 들면 죽이고 교황을 세계의 최고권력자로 만들기 위해 교리 조작은 물론 창작도 서슴치 않는다.

세 상의 모든 종교가 비슷하고 기독교만 다르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잣대를 따라가고 있는 양상이다. 이런 미묘한 변화와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고 또 다른 형태로 변화를 거듭할 것을 알기에 안타깝다. 제발 한국교회에 참복음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나만 잘한다고 나팔 부는 게 아닌데 친지나 가까운 이웃도 설득하기 어렵고,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회방향에 반하는 요주의 숙청대상(?)이 되는 현실이다. 세상을 잘 들여다 봐야 한다. 나는 그런 것에 속아서 먼 길을 돌아온  사람이다. 이제 상대주의적 생각과 주관적 느낌에 의존하는 신앙과 사고를 버려야 할 때이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보시기 때문이다

[출처] 상대주의와 주관적 사고의 위험성|작 성자 김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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